‘소통’의 부재는 진화론 내에서, 또는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지만, 서로간의 소통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창조론 오픈포럼’을 열며 창조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나누는 일을 주도하고 있는 양승훈 교수가 최근 창립 초기인 지난 1981년부터 지금까지 몸담고 있던 창조과학회에서 탈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지난 8월 탈퇴하지 않으면 제명하겠다는 창조과학회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양승훈 교수는 이에 대한 심경을 담아 ‘한국창조과학회를 떠나며…’라는 글로 본지에 보내왔다. 본지는 이 글을 연재하며, 창조과학회의 이에 대한 공식 입장도 곧 청취할 예정이다.
한국창조과학회를 떠나며…
1981년 1월 24일은 저의 결혼식 날이었습니다. 원래는 결혼 예정일이 1월 31일이었지만 제가 결혼 일자를 잡은 후에 한국창조과학회에서 창립총회 일자를 그 날로 정했기 때문에 도리 없이 일주일 앞당긴 것이지요. 부랴부랴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피곤한 중에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창립총회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창조과학회와 관련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전설이 된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를 편집하기 위해 박사과정 학생이 을지로 출판 골목의 허름한 여관방에서 출판업자와 며칠 밤낮을 지새우던 일, 애써 외주를 주어서 제작한 창조과학회 로고가 진화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에 따라 지금의 로고로 다시 뜯어고쳤던 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주일학교 꼬마들을 대상으로 첫 창조과학 강연을 시작한 이래 국내외에서 1천여회에 이르는 창조과학 강연을 쫓아다니던 일, 그리고 수많은 원고들... 2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저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창조과학 운동을 이제 “공식적으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몇몇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근래 창조론오픈포럼(이하 창조론포럼)을 개최하고, <창조와 격변>(예영, 2006) 출간을 통해 우주/지구가 6천년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을 수 있으며, 노아의 홍수 이전, 인류가 창조되기 전에도 전 지구적 격변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다중격변 창조론을 제시한 것으로 인해 지난 8월 말까지 한국창조과학회로부터 탈퇴하지 않으면 제명하겠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저의 주장들이 창조과학회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창조과학회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켰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정말 창조과학회에 해를 끼쳤는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해가 되었는지 여부는 제가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제명 통보는 두어 주 전에 이메일로 보낸 것 같은데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창조과학회 회장 명의의 우편물이 학교에 도착해 있더군요. 하지만 방한 중에 이미 간접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창조과학회 지도자들과 만나서 대화하기를 수차례 요청했지만 아쉽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나눌 기회가 있겠지만 20대 중반이었던 1980년 8월, 창립준비위원회 모임으로부터 시작하여 30여 년 가까이 관여해 왔던 창조과학회를 탈퇴하면서 이 논쟁의 핵심을 창조연대 및 다중격변 창조론에 관련된 저의 입장과 창조론오픈포럼에 대한 취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창조연대가 오래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며,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복음주의 진영의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성경해석입니다. 그러므로 6천년 우주/지구 나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해석들은 성경의 진리를 타협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랜 창조연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라거나 진화론과 타협한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적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창조연대가 오래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전문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입니다. 오히려 6천년 우주/지구 연대는 근본주의 진영의 극소수 의견이며,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대를 연구하는 전문학자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아마추어 과학 운동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고 창조과학의 진원지인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대측정 분야에서 정상적인 연구활동을 하면서(peer-reviewed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우주/지구 연대를 6천년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 과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오랜 연대의 과학적 증거가 그 만큼 압도적이고 분명함을 의미합니다.
셋째, 제가 <창조와 격변>에서 제시한 다중격변 창조론은 수많은 증거들에 기초하여 세운 하나의 가설입니다. 학문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자신의 연구를 기초로 새로운 이론과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당연히 이 이론에 학문적인 비판이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 환영합니다. 하지만 그 비판이나 반론은 논문이나 그 외 학문적인 글로서, 신뢰할 수 있는 증거에 기초해서 제기되어야지 일방적인 비난 성명이나 신뢰하기 어려운 비학문적 문헌이나 증거를 기초로 제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중격변 창조론 역시 다른 학문 이론들처럼 명백히 반증되거나 더 나은 이론이 나오면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넷째, 이러한 저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창조론포럼은 오랜 창조 연대를 주장하려는 모임이 아닙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와는 무관하게 창조론포럼은 각 분야의 복음주의 전문 과학자, 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나누자는 것이 근본 취지입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전 세계적으로 복음주의 진영의 전문 신학자와 과학자들의 창조론 연구결과들이 산더미처럼 발표되었지만 아쉽게도 한국교회에는 극소수 근본주의 진영의 견해만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건전한 여러 창조론 논의들을 균형 있게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창조론포럼을 시작한 것입니다. 당연히 창조론포럼은 여러 창조론 운동들 중의 하나인 창조과학에 대해서도 열려 있으며, 실제로 지난 세 차례의 창조론포럼에서 발표된 논문들 중에는 창조과학 입장을 지지하는 논문들도 있습니다.
다섯째, 창조론포럼은 한국 교회가 지적인 황무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 불신을 막론하고 전문 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의 핵심이랄 수 있는 6천년 우주/지구 연대와 모든 지층과 화석이 1년 미만의 대홍수로 인해 형성되었다는 단일격변설을 천동설 내지 평면 지구설과 비슷한 수준의 이론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만일 앞으로도 지금처럼 전문 학회나 학회지가 아니라 일반 성도들을 대상으로 대중적 캠페인에만 의존하는 과학운동이 한국교회를 휩쓴다면 한국교회는 지적인 게토(ghetto)가 될 것이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지적 자살”이라는 기독교에 대한 오랜 편견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도나 복음의 변증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소중한 복음이 폄훼(貶毁)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조롱받는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저는 창조과학회를 떠나지만 창조론 운동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제 좀 더 자유롭게 창조론 운동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며, 함께 창조론 운동으로 젊음을 불태웠던 여러 친구들과 더 가깝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6천년 우주/지구 연대와 단일격변설이 신학적, 과학적 문제는 물론이고 왜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는지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틀린 주장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주장들에 대해 아예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것입니다. 창조과학회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관계없이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우리의 눈의 비늘을 벗기셔서 성경말씀과 창조세계의 비밀을 밝히 깨닫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우리 모두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엡4:15) 자라가기를 소원합니다.
080904/080906
형제 된 양승훈 드림
양승훈 교수의 ‘한국창조과학회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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