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옹 함석헌의 ‘씨알사상’ 국내학계서 집중조명
철학계에선 종교인으로, 종교계에선 이단아로 치부돼 한평생 철학과 종교 사이에서 시대의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살았던 신천옹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국내 학계에서 집중 조명됐다. 지난 10일 씨알재단(이사장 김원호)과 이화여성신학연구소(소장 박경미)의 공동주최로 ‘한국철학과 씨알사상’이란 주제의 제2차 ‘씨알사상’ 포럼이 열린 것.이날 ‘함석헌과 씨알 철학의 이념’이란 주제로 발제에 나선 김상봉 교수(전남대학교 철학과)는 철학과 종교 사이에서 머리 둘 곳을 찾지 못했던 신천옹 함석헌을 “철학의 결핍을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자각한 사람이자 주체적 철학의 수립을 절박한 현실적 과제로 정립한 사람”이란 표현을 통해 철학자이자 종교인이었던 함 선생의 ‘자리’를 찾아줬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함석헌은 우리나라의 고유 철학의 필요성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한 유일한 철학자였다. 이는 그가 쓴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철학하지 않는 인종은 살 수 없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고유의 철학이 없는 나라다. 그러면 이 비참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물질적 가난은 정신적 가난의 상징적 표시일 뿐이다”『새교육』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고유 철학을 개발하려 했던 함석헌. 그런데 그의 철학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종교’였다. 함석헌은 종교와 철학을 분리하지 않았다. 즉, 함선헌에게 있어 ‘철학함’은 ‘종교함’이었던 것이다.
이 또한 그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와 철학이 따로가 아닙니다. 종교도 절대자를 찾는 것, 철학도 절대자를 찾는 것이다. 철학을 따져 올라가면 믿음에 이르는 것이고, 반대로 참 믿음 있으면 반드시 철학이 나올 것입니다. 철학을 반대하는 종교, 아무 뜻 모르고 맹신하는 종교, 그것은 미신이고, 또 종교 반대하는 철학, 생명의 뚜렷한 빛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이론, 사색, 그것은 빈말뿐입니다. 오늘 지식인이 믿음을 가지기 어렵다 하고, 믿음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지식이 껍데기 지식이요, 참 지혜가 못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철학이 없기 때문이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생활철학』
함석헌은 절대자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전체’라고 김 교수는 전했다. 그는 “절대자는 다른 무엇보다 전체다. 진리는 언제나 전체에 있고, 지혜도 전체에만 있다. 그리하여 함석헌이 평생을 두고 추구했던 것은 전체와 만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철학자인 함석헌에게 철학의 과제는 “새로운 정신적 종합을 통해 깨진 전체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함석헌은 이것을 굳이 철학의 일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함석헌은) 전체인 하나로서 절대자를 추구하는 것은 철학의 일인 동시에 종교의 일로 평했다”고 설명했다.
함석헌의 ‘전체’의 추구는 종교와 철학의 하나됨으로 이어진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함석헌은 오직 철학이 종교가 되고 믿음이 지혜가 되는 지경에서만 참된 전체가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김 교수는 “이런 확신이 그가 평생을 두고 추구해 온 일이 철학을 종교로 그리고 종교를 철학으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철학과 종교를 하나로 묶는 데는 어려움도 뒤따랐다. 특히 철학은 이성의 길을 따라, 종교는 믿음의 길을 따라 절대자를 찾기에 두 분야의 방법론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종의 코드를 찾고 있었던 것.
연구 끝에 함석헌이 내린 결론은 “이성의 끝은 믿음”이란 것이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함석헌은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오직 믿음으로 자기의 한계를 초월하려 하지 않는 게으른 이성은 이성 이전으로 퇴행하고 전락하고 만다”며 “그런 까닭에 이성이 이성다우려면 그것이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성이 자기를 초월하는 비법은 믿음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성을 넘은 믿음을 강조한 함석헌. 하지만 그 ‘믿음’은 기성세대가 말하는 믿음과 또 달랐다. 함석헌의 믿음은 말하자면 존재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곧 우주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전체 속에서 본 믿음. 이것은 함석헌이 하나님이든, 부처이든, 브라만이든, 진리이든, 생명이든 그 불리는 이름이 다양할 수 있어도 사실은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해주었으며, 특히 철학과 종교 사이에서 그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서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기사제공=베리타스(http://www.theverita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