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19)
나사렛 예수가 행하신 설교들 가운데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내용이 바로 마태와 누가가 그들의 복음서에 기록한 산상설교이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가 전파한 복음의 핵심이요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헌장이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그의 메시아적 사역 가운데서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를 기대하는 신자들의 삶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5장-7장에서, 누가는 6장 20절-49절에서, 예수의 산상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예수의 여덟 가지 복(福)선언을 마음이 청빈하고 경건한 자가 받는 복으로 특징짓고 있는데(마 5:2-12) 반해서, 누가는 사회적인 곤궁 속의 적나라한 궁핍을 더욱 반영하며 그러한 궁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눅 6:20-26).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하여 신자가 살아야 할 윤리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태도와 삶의 방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예수는 신자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헌장을 반포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제 예수의 설교와 치유의 사역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는 이제 신자의 삶 속에서도 수용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산상설교의 신자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새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제자들 안에서 발아(發芽)된 모습으로 현재해 있다. 산상설교는 이 세상에 침입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신자들에게 요청되는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새로운 삶의 윤리를 가진 자들이다. 그 윤리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자들이다.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자들은 그 삶과 사고방식이 새로워진다. 중생한 자의 삶이란 그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는 자이다.
팔복(八福) 메시지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여덟 가지의 복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는 이러한 팔복 선언을 듣는 사람들이 이에 상응하는 삶과 태도를 가지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약속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다.”(마 5:3) 천국은 그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천국은 부자나 권세자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겸손하고 겸허한 자들이 영접한다. 욕심을 떠난 자들에게 천국은 다가온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 5:4) 진리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자신의 허물을 알고 뉘우치는 자에게 천국은 다가온다. 자신의 허물을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마 5:5) 인자를 실천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게 된다. 천국은 그 마음이 인자한 자의 것이다.
“의에 주리는 자는 배부를 것이다.”(마 5:6) 하나님의 공의를 간절히 추구하는 자는 그의 삶 속에 정의가 실현 됨을 볼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을 받을 것이다.”(마 5:7) 어려운 지경에 있는 자에 대하여 동정과 연민을 가지는 자는 자기가 그러한 동정과 연민을 받을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5:8). 그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마 5:9)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사람들 가운데 퍼트리는 자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복음과 의 때문에 박해와 어려움을 받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 이름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이 있다.
율법의 완성
나사렛 예수는 모세의 계명을 부정하지 않고 그 내면성, 즉 정신을 살리고자 한다. 마태는 예수께서 직접하신 말씀을 다음같이 생생하게 전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신약학자들은 ‘진실로’(amen)로 라는 단어는 바리새인이나 다른 율법학사들 등(等), 다른 랍비에게서 볼 수 없고 역사적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용어라고 본다.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전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예수는 율법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한다. 모든 사람이 십계명을 지킨다면 이 세상은 더 행복한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산상설교의 더 놓은 기준을 충족하는데 성공할 수는 없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하나님 나라 시민의 윤리를 당시 율법종교의 윤리 보다 높게 책정하고 있다. 기독교 신자의 의는 율법종교의 의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이 멈추는 곳에서 산상설교는 시작한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살인이란 분노하는 행위에 의하여 유발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동기를 중요시한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1-28) 예수는 범죄한 눈을 빼어 버리고 범죄한 손을 찍어 버리라고 극단한 설교를 하신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예수는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고 너그러이 대하라고 가르친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9-42) 예수는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이 원수 사랑의 가르침은 유대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의 독특성이다.
종말론적 윤리
이러한 산상설교의 윤리는 이 세상에서는 지킬 수 없고 천국에서만 지킬 수 있는 윤리이다. 이것은 슈바이처가 해석하는바 세상 끝날이 오기 전까지 임시적으로 지키는 ‘중간기의 윤리’내지 ‘잠정 윤리’(interim ethics)가 아니다. 이것은 이미 다가온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말론적 윤리(eschatological ethics)이다. 이러한 윤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킬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윤리가 전혀 이 세상에서 실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특별한 경우에는 역사 속에서 실천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에게 특별한 사랑의 은혜가 주어질 때 종말론적 윤리는 가능하다. 한국교회 안에서 우리는 손양원 목사의 경우 이러한 원수 사랑의 계명이 실천된 것을 볼 수 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공산당 청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살해범이 경찰에 붙들여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에 손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들의 석방을 탄원하고 석방된 청년을 자기 수양 아들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손양원 목사가 실천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교회사적으로는 중세의 성 프랜시스, 현대에 와서는 테레사 수녀 들이 이러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한 신자들이다.
물론 보통 신자들은 손양원 목사, 성 프랜시나 테레사 수녀처럼 살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안에서만 이러한 성화의 삶은 가능하다. 이러한 경우는 부자청년에게 극단한 요구를 하신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부자청년이 예수에게 나아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였다. 이에 예수는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고 대답하신다. 이에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는 말씀하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말씀하신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4) 이에 제자들이 몹시 놀라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는 실망하고 좌절한 제자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인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다. 기독교 윤리란 불가능한 가능성의 윤리(ethics of impossible possibility)이다.
영적 권세있는 말씀
마태는 예수의 설교가 당시 랍비들이 하는 설교는 전혀 다른 권세있는 자의 말씀이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 7:28-9) 마태는 예수가 산상에서 행한 설교의 말씀이 당시 유대사회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왔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 주시는 가르침의 독특성은 “옛 사람에게 말한바…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22, 27-28, 31-32, 33-34,38-39, 43-44) 라는 어귀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설교의 어법은 당시 서기관의 설교방식에서는 찾아 볼 수 없으며, 오로지 역사적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설교 어법만이 아니라 설교 내용도 역사적 예수의 독특한 유일성을 우리들에게 전달해 준다. 예수는 여태까지 전해 내려오거나 당시 유대교에서 만들어 율법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단지 부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정신을 살리면서 그 규정의 정신을 내면화 시키고 있다. 그 예가 위에서 언급한 바같은 살인과 간음에 내적 동기까지 포함시키고 있으며, 악한 자에 대하여 보복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마 5:43)은 구약성경에는 없다. 예수 시대의 유대교 내부의 당파 싸움에서 비로소 그러한 계명이 나타난다.
당시 쿰란 문서에는 “모든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모든 어둠의 자식들을 미워하라”는 요구가 나온다. 예수는 유대교 종파의 가르침을 거절할 뿐 아니라 수정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4-48)
이러한 가르침의 내용은 여태까지 어느 선지자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이다. 이러한 설교 어법과 내용들은 예수만이 메시아적 권위를 가지고 사용하신 설교방식이다. 이러한 산상설교는 나사렛 예수가 ‘영적 권세’를 가지신 존재였음을 드러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