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神話다’ 비판과 기독교 대응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  

한복협 2월 월례회 오성종 박사 강연 전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 이하 한복협)는 13일(금) 오전 7시 새문안교회(담임 이수영 목사)에서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2월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가졌다. 다음은 오성종 박사(칼빈대학교 신약학 교수)의 “‘예수는 神話다’에 대한 비판과 기독교적 대응” 강연 전문.

▲오성종 박사(칼빈대학교 신약학 교수).

▲오성종 박사(칼빈대학교 신약학 교수).

티모시 프리크(Ti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 두 사람이 공저한 ‘예수는 신화다’는 1999년에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에 의해 ‘1999년의 책’으로 선정된 바도 있는데, 국내에서는 2001년에 동아일보사에서 번역·출판되었다. 기독교계에서의 강력한 항의로 인해 국내의 출판은 계속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안다. 절판 상태에 있는 책에 대하여 구태여 또다시 관심을 기울여 다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기록된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왜곡되고 간교한 방법에 의한 도전은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으므로 그 책에 대한 비판과 기독교적 대응을 제시해보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수 년 전 미국에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인데 국내에서도 출판되어 역시 베스트셀러로 팔린 바 있는 댄 브라운(Dan Brown)의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도 비슷한 문제점을 가진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학문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성경기록을 비판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앞의 책에 비하여 덜 파괴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1. 예비적 고찰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 내용들을 연구하면서 그 역사적 사실성을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게 된 것은 ‘역사비판적 성경연구(die historisch-kritische Schriftforschung) 프로그램’ 방법을 추구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였다.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역사비판적 방법에 의한 성경연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이거나 온건하거나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학계에서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역사비판적 방법을 복음서 연구에 적용시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의 모델을 제시한 최초의 사람은 라이마루스(H. S. Reimarus, 1694-1768)였다. 그에게 있어서 해석학적 출발점이 되는 것은, 성경 자체나 사도적 전승이나 믿음 또는 신조가 아니라, 오직 역사와 유대교의 환경이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상(像)은 단순한 ‘인간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복음서에서 놀라운 기사·이적을 행하셨고 물 위를 걷기도 하고 죽은 자도 살리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묘사되고 있으며 인간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재림하실 분으로서 신앙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종교사학파에 속하는 브레데(W. Wrede)와 부세트(W. Boussett), 바이스(J. Weiß), 라이쩬쉬타인(R. Reitzenstein) 등은 복음서에 묘사된 “역사적 예수”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유대교의 종말론적 메시야관과 주위의 종교들의 영향을 통해 초대교회가 발전시킨 신앙과 신학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같은 해석학적 관점을 취하면서 역시 철저하게 종교사학파의 역사비판 방법론을 따랐던 불트만(R. Bultmann)은 “역사적 예수” 문제에 있어서 20세기에 수십 년간에 걸쳐 누구보다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불트만은 신약성경 속에 묘사되고 있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재림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당시의 유대교 종말사상과 그리스의 신비종교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초대교회의 신앙을 당시의 세계관과 언어를 가지고 표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독론적 표현들은 신화적 세계관과 구원관의 옷을 입고 있으므로 문자적인 이해를 해선 안 되며,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인격이나 생애가 아닌, 예수와 교회의 케리그마(Keryma, ‘선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세례 요한과 같이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하나님께의 회개와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순종을 가르친 ‘랍비’로서 살았던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였으며, 다시 그를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속의 죽음을 죽고 부활하신 구세주로 만들고 ‘주의 만찬’ 의식을 시행하기 시작한 것은 헬라어를 쓰는 교회였다고 불트만은 설명하였다.

불트만 등에게서 보게 되는 역사비판적 및 종교사학파적 성경연구 방법을 “역사적 예수” 문제를 다루는 데 똑같이 적용시켜 최근에 출판한 책이 바로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불트만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고 육체적으로 부활하셨으며 장차 재림하실 것이라는 신약의 기록을 역사적인 사실로, 즉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신화를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365-367쪽). 오히려 영지주의자들처럼 영적으로 해석하고 비유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과 접근방법을 비판적으로 다루기 전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사를 먼저 간단하게 살펴본 것은 내용과 접근방법이 결코 새롭거나 독창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함이었다. 내용과 접근방법이 완전히 불트만 아류로 보면 정확한 평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불트만의 연구방법과 전제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부분이 많은데, 프리크와 갠디의 문제의 책도 동일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들의 책은 한편으로는 신비주의와 고대문명 연구자들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신약학자가 아닌 비전문가들에 의해서 신약성경의 기록이 비판적으로 새롭게 쓰기를 시도하였다는 점이 새롭고, 또 한편으로는 신학계보다는 훨씬 폭넓은 독자 대중을 향하여 흥미있는 전개방식과 효과적인 상술을 통하여 세상에 유통시키는데 성공한 사례에 속한다.

2. “예수는 신화다”의 핵심 주장과 특징

먼저 제목과 부제에 대하여 약간의 비평이 필요할 것 같다. 본서는 원서의 제목이 “The Jesus Mysteries”로 되어 있는 것을 국내에서 “예수는 신화다”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원서의 부제는 “Was the ‘Original Jesus’ a Pagan God?”이라고 되어 있는데, 국내판에서는 “기독교 탄생의 역사를 새로 쓰는 충격보고”로 되어있다. 결국은 비슷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되기도 하겠으나, 원서에서는 고대신비주의 연구가들인 저자들의 관심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책의 내용에서 주장하고 있는 핵심주장을 나타내주고 있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반면에 국내번역판의 경우는 훨씬 도발적인 성격의 선포를 말하고자 하며 충격요법을 통한 강력한 호기심 유발을 목적으로 하는 고도의 상술이 엿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출판사의 상술이라기보다 오히려 번역자의 의도적인 번역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역자는 ‘역자서문’을 “인식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8쪽에 걸쳐 써서 본문 이해를 위한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도 은근히 독자들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역자가 깨달은 불교적 진리관을 공유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선(禪)불교 고승들의 문답을 인용하면서 “…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곧 불성 자체, 부처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깨달은 부처, 이미 부활한 그리스도라는 인식의 전환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바깥에 있지 않다. 우리 모두가 곧 그리스도(구원자)이며, 우리 모두가 곧 부처이다. 다만,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뿐이다”(15, 17쪽)라고 한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초기 기독교의 본래의 신앙내용과 예배의식은 현재의 그것들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19-20쪽).

(2) 오늘날 ‘이교적 종교’와 ‘영지주의’라고 불리고 있는 형태의 것이 기독교의 원형이었었다(22쪽).

(3) 그리스 신비종교들에서 있었던 것처럼, 최초의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입문하는 단계에 따라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가 있었는데, 전자에 입문한 그룹은 “문자주의자들”(the “Literalists”)이었고 후자에까지 입문한 그룹은 “영지주의자들”(the “Gnostics”)이었다. 그런데 문자주의자들이 따로 갈라서 나가서 더 높은 단계로 입문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문자주의자들이 본 것은 거짓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하였고, 4세기 초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재위 306-337)의 정치적 목적과 야합하여 영지주의자들을 출교할 기회를 만들었다. 콘스탄틴 대제는 자신의 제국 내에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를 확고하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급조된 니케아 신조를 만들게 하고 이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을 추방하였다. 콘스탄틴 대제에게 고용된 최초의 교회역사가 유세비우스(263-339)는 변조된 기독교를 정통으로 삼고 본래의 기독교는 이교적 종교로 정죄·날조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기독교의 초기 역사를 집필하였으며, 이전의 사실들은 은폐하고 역사적 자료들을 폐기하여 오늘날 기독교의 기원을 바로 알 수 있는 정보를 구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36-37쪽). 그런데 1945년도에 낙 함마디 영지주의 문서(특히 도마복음서, 빌립의 복음서)를 통해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게 되었다(29-32쪽).

(4) 승리자들에 의해 기록된 기독교 역사가 왜곡된 것이었음을 알게 하여 준 것은 오시리스-디오니수스(Osiris-Dionysus)의 신화적 전기와 복음서 중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는 발견이었다(61쪽). 곧 이교도들이 숭배했던 오시리스-디오니수스가 12월 25일에 동굴이나 외양간에서 태어났고, 결혼식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였으며, 종려나무 잎을 들고 민중이 환호하는 중 나귀를 타고 개선장군으로 행진하였으며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부활절 기간에 죽었으며, 지옥에 내려갔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영광 중 하늘로 올라갔다(26쪽). 또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아버지인 제우스 신과 어머니인 인간 동정녀간에 태어난 아들로서 자애로운 구세주 신이며 동시에 육체를 가진 인간이고(20, 26, 58쪽), ‘구원자로 오신 이’며(86쪽), 또 하늘로 올라갔으며 심판을 위하여 재림하게 될 신인(神人)이다. 고대의 이교도들은 세례의식을 통하여 거듭나게 된다고 믿었으며, 그들의 구주를 찬양하며 그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들면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마지막 날 그의 재림과 심판이 있을 것을 믿었다(20쪽) 등등. 유사성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예들이 책의 115-117쪽과 160-162쪽에 종합적으로 나온다.

그래서 저자들은 이렇게 추정한다: “예수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메시아의 전기가 아니라, 이교도의 유서 깊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한 하나의 ‘신화’라고 우리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새롭고 유일무이한 계시 종교였던 게 아니다. 유대인 방식으로 각색된 고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신앙이었다”(21쪽).

3. 책 “예수는 신화다”의 왜곡과 허구성

(1)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영지주의 기독교였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

저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에 대한 결정적 근거가 (이단적인) 영지주의 기독교 종파의 문서인 낙 함마디 복음서들에 있다고 보는데, 비평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처럼, 바로 이 사실이 그들에게 결정적 약점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은 신약의 기독론과 구원론, 인간론, 교회론 등의 주요한 부분이 근본적으로 영지주의와 그리스 신비종교에서 영향받아 생성·발전된 것으로 보는 불트만과 그의 학파의 입장과 같은 데, 역시 후자의 방법론과 이론의 치명적인 약점들을 똑같이 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① 이원론적 세계관을 중심 모티프로 하는 일반적 종교현상으로서의 영지주의적 사상(‘Gnosis’)은 당시의 헬레니즘 세계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던 시대정신이었고 최초의 기독교보다 역사적으로 오히려 더 오래 전에 기원한 것이었음이 사실이다. 유대교와 사도시대의 정통교회들 안에 침투하여 영향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허지만 구속자 신화(Erl?sermythos) 내지는 영지주의적 기독론이 특징으로 나타난 기독교적 영지주의(‘Gnosticism’)는 1세기 내에 완성된 신약성경 중의 기독교 신학의 영향으로 나타난 것이며(그 반대가 아니라!), 낙 함마디 문서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영지주의 문헌들 역시 2~3세기에 기원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프리크와 갠디는 반대로 “신약은 가장 초기에 가장 널리 인용된 일부 문헌”에 속한다고 보는 ‘도마복음서’를 배제했다고 비난하고 있다(387쪽).

② 저자들은 원문에서 63쪽에 달하는 후주(後註)를 달면서 많은 참고문헌을 인용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학문적으로 시효가 지난 것들이 많으며 자기들의 주장에 유리한 자료를 위주로 인용하여 독자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신약배경사와 영지주의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저자들은 객관적 진리추구보다는 편향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평가된다. 저자들은 자기들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낙 함마디 문서 전문가인 일레인 페이절스(Elaine Pagels)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인용문에서 그녀는 “역사를 쓰는 자는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제멋대로 쓴다”고 비꼬면서, 새로 발견된 낙 함마디 문서 중의 영지주의 복음서들을 통해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정통’ 기독교의 오류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말하고 있다(37쪽).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리크와 갠디 두 저자는 자기들에게 불리한, 영지주의 전문가 페이절스의 다른 견해는 언급하지 않는다. 즉 영지주의가 제도권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단죄되었던 일은 2세기 때의 이레니우스(Irenaeus) 등의 교부들에 의해서 이뤄졌고 (4세기 초 콘스탄틴 때가 아니라) 이미 200년경에 로마교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정통적이지 않은 불건전 신앙집단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교회 밖으로 쫓아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 말이다.

③ 영지주의자들을 사도들과 2세기 때의 속사도교부들이 신앙공동체 안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이원론적 신관과 구속자관, 세계관, 구원관, 인간관은 구약과 신약의 교훈들과 너무나 이질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 많은 교리들을 가지고 있었다:

1) 물질세계를 창조한 창세기 1장의 하나님 ‘데미우르고스’(Demiurgos)는 어리석고 열등한 신이며, 반면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미지의 신”으로서 데미우르고스가 모르게 세상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2) 하늘의 고향으로부터 세상으로 떨어진 인간이 본래적인 자아의 출처와 미래에 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영혼 속에 있는 신적인 불꽃으로 하여금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늘의 고향에 이르는 길에 대한 소식의 전달자로서 구속자-그리스도가 신에게서 인간 세계에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왔는데, 실제로 그는 인간이 아니고 고난과 죽음을 받지 않았다.

3) 구원의 길은, 죄에 대한 용서와 하나님께의 회개와 구세주에 대한 인격적 믿음이 아니라, 본래적 자아의 출처와 중생에 대한 계시적 ‘지식’(‘gnosis’)이다(cf. 딤전 6:20-21).

④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외경 복음 중 이해가 되지 않는 괴이한 내용이 부지기수이며 신약의 보도와 모순이 되는 내용이 적지 않다.

(2)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오시리스-디오니수스를 숭배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

프리크와 랜디가 그들의 책에서 그리스와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의 다양한 신화들과 신비종교에서 숭배하는 신들 중 특히 이집트와 주변지역에서 숭배하였던 오시리스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수스의 생애가 신약의 그리스도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오시리스-디오니수스를 숭배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지 부분적이고 형식적 유사성만을 볼 수 있을 뿐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여러 면에서 본질적 차이점들을 명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오시리스와 그에 대한 예배의식에 대해서는 고대문헌에 자세히 나와 있다: 본래 오시리스는 나일강에서 왕으로 다스렸었는데, 동생 티폰(Typhon)이 꾸민 계략에 넘어가 관 속에 들어가 누웠다가 모반자들이 급히 상자 뚜껑을 닫고 납으로 봉해 강에 던져 살해되었다. 누이이자 아내인 이시스(Isis)는 죽은 오시리스를 찾아내어 관을 열고 시체에 얼굴을 대고 슬피 울었다. 티폰이 알고서 오시리스의 시체를 열 네 조각으로 토막을 내어 사방에 버렸는데 이시스가 그 토막들을 찾아 한 군데에 모았고, 오시리스는 지하 세계에 들어가 신으로서 다스리게 되었다. 예배의식에서 숭배자들은 함께 드라마를 연출하는데, 죽은 오시리스를 찾기 위해 슬퍼하면서 밖으로 나갔다가 환호하면서 오시리스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지하 세계에서 다스린다고 노래하였다.

디오니수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바쿠스(Bacchus)라고도 하며 번성과 남성, 포도주, 드라마, 황홀경의 신이며 어느 때는 식물의 신도 되고 죽음과 재생의 신도 되는데, 아버지 제우스 신과 어머니인 인간 세멜레(Semele)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신’이라기 보다는) ‘영웅’으로 분류돼야 한다. 그가 잉태되자 얼마 안 되어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Hera)의 질투심을 인한 간계로 그를 잉태한 어머니가 재가 되어버려 제우스가 배아를 재빠르게 잡아채어 자기의 넓적다리 안에 숨겨 후에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고 한다. 디오니수스에 대한 예배의식에서 사람들은 들짐승을 가지고 다루면서 디오니수스의 야생의 힘에 참예하게 된다고 생각했으며, 디오니수스 신은 극도의 열광 가운데서 체험된다고 보았고, 먹고 마시고 드라마를 공연할 때 디오니수스가 주는 쾌락을 누리는 의식도 가졌다. 반면 소아시아의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수스는 프리기아(Phrygia) 땅의 여신 제멜로(Zemelo)의 아들인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식물의 신으로 숭배받았다. 매년 디오니시우스 축제일에는 신전의 우물에서 물 대신 포도주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예수님의 생애와 오시리스-디오니수스의 생애를 형식면을 단순 비교할 때 유사한 여러 구절들을 예거할 수 있겠지만, 내용적으로 그리고 사건들의 의미에 있어서 차이는 크다고 보겠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저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신 것과 오시리스-디오니수스가 죽은 것이 유사성이 있다고 말하나, 구체적인 내용과 의미에 있어서, 위에서 금방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차이는 무시할 수 없이 큰 것이다. 또 저자들은 예수께서 ‘구원자로 오신 분’인 것처럼 디오니수스도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예배의식에 참예하는 자들은 비밀스런 의식을 거행할 때 관 위에 놓인 신상(神像) 앞에서 신의 고통과 죽음의 생애를 자신의 것인 것처럼 연극하듯이 애통해하며 재현함으로써 신의 운명에 동참하고 구원을 보장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이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누린다(요 3:14-16; 고전 15:1-3; 골 1:13-14)고 가르친다.

(3) 기타의 비판들

저자들이 기독교에서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서 이교도가 다신교를 신봉한다고 (오해하여) 정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주장(144-152쪽)을 읽을 때는 억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신론을 비판하는 글을 남겼던 일련의 ‘철학자들’의 신관을 소개하고서 반증을 제시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고대의 “모든 민족, 모든 지방의 신들은 다만 하나의 위대한 힘(Power)의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을 따르는데(53-57쪽), 실제 시리아와 터기, 그리스의 여러 고대도시들을 직접 방문해본 사람들은 그러한 식의 느낌을 전혀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할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과 주변에 강력한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외래 종교가 전반적으로 깊이 침투하였다. 특히 페니키아와 시리아, 데카폴리스, 가버나움, 불레셋, 사마리아 지역의 도시들에서는 고유한 지방신들 외에 헬리오스(Helios), 디오니수스(Dionysus), 제우스(Zeus), 아르테미스(Artemis), 헤라클레스(Heracles), 판(Pan), 아프로디테(Aphrodite), 아폴로(Apollo)와 같은 헬라신화 속의 신들을 위한 신전을 세워 숭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두 신(神)이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숭배된 것은 아니고 도시마다 주신(主神)으로 섬기는 신들이 다양하였던 것이다.

또 저자들이 바울은 이교도 신비종교의 중심지였던 다소에서 태어나서 영지주의자로 활동하였고 이교도 교리를 가르쳤다(282-311쪽)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가 ‘그노시스’(‘지식’을 뜻하는 헬라어)와 ‘뮈스테리온’(‘비밀’을 뜻하는 헬라어)과 같은 영지주의에서 즐겨 쓰는 단어를 자주 쓴 사실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과 신자가 연합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여(롬 6:3-5등) 영적으로 자주 해석한 사실을 들고 있다. 바울이 사용한 위의 두 헬라어 단어는 영지주의자들의 용례와 전혀 다르다. 또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문자적인 사건으로 인정하고 강조한 구절들이 무수하다. 바리새인 출신으로 철저하게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던 바울이 신화적인 이교도 신앙을 가르쳤다는 것은 너무도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한 생각이다.

팔레스타인에는 특히 아폴로를 신적(神的) 조상으로 받들었던 셀류시드 왕조(Seleucids)의 통치시기, 그 중에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치하에서 헬레니즘의 종교문화의 세례가 강압적으로 이뤄져서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으며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게 하고 디오니수스 축제일에는 디오니수스를 찬양하게 했다. 드디어 주전 167년 마카비 가문을 비롯한 핫시딤(“경건한 자들”)은 목숨을 걸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기로 맹세하고 분연히 일어나 투쟁한 결과 많은 희생 속에서도 마침내 성전을 청결하게 하여 다시 봉헌할 수 있었고 제한적인 정치적 독립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세속적 권력과 교권의 욕심으로 세속화되어버린 마카비 가문을 떠나 핫시딤 중 특히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율법의 세세한 규정까지 엄격하게 지키는 전통을 세운 바리새파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랍비들이 만들어 놓은 ‘조상들의 유전’까지 철저히 지키면서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않는 일반 유대인들과 ‘구별된 자들’(Pharisees, ‘구별하다’는 뜻의 ‘parash’에서 온 말로 여겨짐)이라는 독특한 선민의식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율법에 대한 열심히 특심했고 율법과 조상의 유전을 가르치며 랍비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였던 바리새파는 민중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회당과 공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그들은 사두개파와 함께 예수님을 율법과 조상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정죄하였고 마침내 십자가 처형을 당하도록 하였음을 복음서는 자세히 증거하고 있다. 만일 바울이나 최초의 기독교인들이 이교도의 신관과 예배의식을 받아들였다면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던 당시의 바리새파 지도자들이 강력하게 문제삼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랬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전무하다.

저자들과 같이 본래의 기독교를 이교적 신비종교와 영지주의에서 출발하였다고 이해한다면,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수많은 말씀들은 설명이 전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씀들도 유세비우스가 날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나? 또 신약에서 수많은 구약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사역, 그리고 신자의 구원의 축복들이 (영지주의 기독교에서와 전혀 다르게) 구약 예언들의 성취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4. 책“예수는 신화다”류의 운동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대응

(1) 증거 자료를 제시하면서 반기독교적이고 성경파괴적인 주장을 하는 운동에 대해서 무시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안일하고 무책임한 대응이 될 것이다. 단순하게 정통 교리와 성경을 가지고 반박하고 단순히 신앙적인 열심히 변증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고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무식과 반(反)계몽주의(obscurantism)는 계몽주의에게 패할 수밖다.

(2) 신약배경사적 지식으로 무장하는 일은 신학생과 목회자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한국의 복음주의 교단들과 신학교들은 전략적으로 초기기독교역사 연구소를 세워 공동으로 연구사업을 하기 위한 계획을 속히 수립해야 할 것이다. 또 성경원어 외에 고대근동 언어·역사·종교 전공자들을 키우고 연구소를 세워 연구사업을 해야 할 것이다.

(3) “예수는 신화다”와 “다 빈치 코드” 등에 대한 비판서를 개인 학자 차원이 아니라 한국교회 차원에서 공동으로 연구하여 출판하고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4) 한편 반기독교적 및 무신론적 출판·문화 활동이 전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교회는 교회사적인 과오들에 대한 겸허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며 한국교회에 상존하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들(교권주의, 배금주의, 기복신앙, 지연·학연을 따른 파당색, 교파주의, 개교회주의, 신행불일치와 외식, 교역자들의 낮은 도덕의식과 명예욕, 무인가신학교에서의 신학생 양산과 부실교육, 경쟁적 교회성장주의 등)을 버리고 치유하는 일을 위해 투쟁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5) 반기독교풍조와 성경파괴적인 역사비판 방법론은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 그리고 자율주의적 이성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므로, 단순히 학문적 토론이나 변증이나 이성적 설득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없다. 오히려 마귀의 궤계와 전략에서 나온 영적 현상임을 간파하고 영적 싸움 차원에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기도와 영적 대적의 행동이 필요하며 진리의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이 나타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있을 때 더욱 효과적일 수 있을 것이다.

(6) 기독교인과 신학자 중에서 성경과 정통신앙 파괴적인 발언을 하고 저술활동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 이들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책을 쓰는데, 실은 기독교 진영 내의 비판적이고 지성적인 성향의 기독교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불트만이나 (몇 년 전에 ‘예수는 없다’는 제목의 베스트셀러를 쓴 바 있는) 오강남 교수와 같은 사람이 그 부류에 속한다고 보겠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논쟁이나 설득의 노력이 별로 효과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그들은 거듭난 자들이 아니고 “육에 속한 사람으로 성령이 계시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교훈하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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