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 같이 부드럽다가도 사자같이 엄위해야
9: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솔로몬은 이렇게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잘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일들을 힘을 다해 하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세월을 아껴 후회없이 인생을 사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솔로몬은 우리의 인생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알차게 잘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날마다 기쁘게 감사함으로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과 가족들과 사랑하며 오순도순 잘 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으로 잘못 입력돼 맛있는 것을 먹어도 안 되고, 아내와 너무 기쁘게 살아도 안 되며,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금욕주의’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 신앙이 아니다. 전도서 말씀은 즐겁게 여러분 가족과 자녀와 성도와 이웃과 매일매일 값지고 보람되게 하루하루를 살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일은 주님이 주신 복이다. 일을 할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므로 열심히 힘이 있는 대로 일하라고 솔로몬은 말한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구약 시대는 죽음에 대해서 신약만큼 계시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구약에도 부활 사상이 있지만, 죽은 다음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른다. 슬피 울며 음부에 내려간다고도 했다. 이 구절에서도 죽은 후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아무 감각도 없는 것처럼 돼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오늘 밤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오늘 밤’, 즉 죽은 바로 그날 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신약성경을 통해서 죽음에 대해서 보다 더 분명한 계시를 받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내가 육신을 떠나면 즉시 주와 함께 있게 된다(빌 1장)’고 했고, 고린도후서 5장에서도 ‘내가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다. 우리가 만일 유감스럽게도 일찍 죽는다면 바로 그 순간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 이것이 신약의 계시이다.
물론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죽었던 성도들이 다시 부활해서 주님과 함께 올 것이다. 이 땅의 성도들은 주님이 오실 때 그 몸이 홀연히 변하게 돼 산 채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주님과, 또 이미 주님께 간 모든 성도들과 공중에서 만나게 된다. 이것이 신약의 계시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죽은 후에 다만 ‘스올(히, 음부)’에 간다고만 돼 있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 ‘죽으면 끝나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죽기 싫다’. 그러나 신약 성도들은 부활의 소망이 있고 주님과 함께 있게 될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오늘 밤에 죽어도 즉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1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지혜로운 솔로몬이 지혜의 말을 하고 있다. 그는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고 했다. 그가 보았더니 빠른 사람이 반드시 선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올림픽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체조를 제일 잘하는 선수가 있었는데, 그 전 올림픽 때 금메달을 딸 수 있었지만 미국 심판들 때문에 억울하게 금메달을 놓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쉽게 실패했다. 그리고 다른 선수가 은메달을 땄다.
전도자가 봤더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고, 유력자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우연이 있고 소위 말하는 행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지혜롭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대단히 지혜롭고 똑똑해도 엄청나게 가난한 사람이 있다. 또한 기능자라고 해서 은총을 얻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세상에는 시기와 우연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우연의 일처럼 보이는 일들이 세상에서는 발생한다.
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사람은 자기의 시기-이것을 우연이라고 말해보자-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래에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듯 걸려들고 새가 올무에 걸리는 것처럼 어떻게 하다 보니 우연히 재앙을 만난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이처럼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또 인간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췄는데도 이르지 못하는 수가 있고, 갖추지도 못했는데 이르는 수도 있다. 이것을 재수나 우연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것이 인생 가운데는 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구약성경에서는 시기나 우연이라고 표현했지만, 신약의 해석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람들이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전도서는 지혜로운 인간이 최대의 지혜를 사용해 인간 세상을 살펴본 사람에게서 나온 생각일 뿐, 이것이 곧 주님의 계시는 아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가장 많이 연구할 때 여기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야 전도서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연처럼 보이는 그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이 신약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다 세신 바 된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아야 하는가? 이것도 알아야 한다. 사람이 볼 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야 그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주장하고 계신 것을 균형있게 깨닫고 적합하게 대처할 수 있다. 뭐든지 기계적으로 ‘주님이 이렇게 하셨어. 이것이 주님의 인도야’라고 하는 사람은 치우친 사람처럼 보이고 생각이 없는 사람 같다. 그것이 아니다. 사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속에 기묘하게도 주님의 인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손길을 믿기도 하고 경외하기도 하고 신뢰하면서 한 발씩 따라간다. 여러분도 이렇게 지혜를 얻으시기 바란다.
13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14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15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이 구절들의 말씀은 ‘지혜도 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작은 성에 다른 큰 왕이 쳐들어와 작은 성읍을 에워싸고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 성읍의 어떤 가난한 지혜자가 지혜롭게 말해서 성읍이 보존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 성읍 사람들은 이 지혜자 때문에 성읍이 지켜졌기에 그 이름을 늘 기억하면서 고마워해야 할텐데 그가 가난하다 보니 다 잊어버렸다는 얘기다. 언제 우리가 그 사람 때문에 살게 됐느냐는 식으로 모두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자신이 분명히 지혜가 힘보다 낫다고 말했지만, 가만히 보니 지혜도 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해 아래 모든 것은 다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전도서의 결론이다.
17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호령이 크다. 소리가 크고 목소리가 큰 사람은 약간 어리석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혜자는 종용히 말한다. 지혜롭게 되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조용히 말하기 바란다.
18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괴케 하느니라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고 키우는 이유는 그러한 호령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찍어 누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용한 지혜가 병기보다 힘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괴케 하느니라”. 이 마지막 말씀을 좀 강조하려 한다. 내가 때로 왜 한 사람 때문에 열을 내는지 아는가? 여러분 생각에는 ‘한 사람이 잘못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목사님은 그렇게 열을 내십니까?’ 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도서 말씀은 한 사람이 많은 선을 패괴케 한다고 했다.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다 헐어버리는 법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때로 한두 사람의 악한 죄나 거역을 대할 때 ‘그 작은 일에 그렇게 신경쓰십니까?’ 라고 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여러분은 교회를 세워 봤는가? 교회를 돌보고 성도 한 사람이라도 온전케 해 보았는가?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 보지 않은 사람이다. 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 쉬운가? 여러분이 자식 한 명을 키우는 것이 쉬웠는가? 대범하게 그냥 놔 두면 잘 키워지던가? 그렇지 않다. 아이 때문에 많은 시간 울기도 하고 소리도 질러가면서 키우지 않았던가? 자식들은 그렇게 쉽게 키워지는 것이 아니다.
나도 이런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됐다. 처음에는 한쪽 구석에서 안 좋은 말들이 퍼져 나온다. 내가 젊어서 사역할 때는 ‘하나님의 교회니까 저런 것은 하나님이 다 처리하실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교회니까 없어질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까 구석에 조금 있던 것이 점점 퍼지는 것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니까 그때 퍼졌던 작은 것을 어린이까지도 다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악한 말들을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하는 광경을 보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더니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래서 작은 것을 작게 보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한 사람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서 오면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몇 주 지나면 두세 사람 얼굴이 그렇게 된다. 몇 달 지나면 절반이 다 시커먼 얼굴이 된다. 왜 그런가? 돌아가서 계속 독소가 있는 악한 교제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일찌감치 심각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큰 문제로 비화된다.
우리가 지혜가 있다면 조용히 행해야 한다.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괴케 하느니라”. 여기서 ‘그러나’ 라는 말이 중요하다. 지혜가 병기보다 낫지만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부패시킨다. 지금까지 많은 선을 행하고 업적을 쌓아놓고 교회를 세워놓고 많은 성도를 일으켜 놨더라도 한 죄인이 그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고 패괴케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음 좋은 아저씨 같은 사람은 절대 교회를 건축하지 못한다. 어떤 일이든 해내는 사람들은 다 양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부드러울 때는 한없이 양순한 어머니 같고 유모 같지만, 때로는 사자처럼 엄위하고 아비같이 엄하게 책망하는 양면이 없으면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세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