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받은 십자가형: 가장 잔인하고 치욕스런 형벌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  

[김영한 교수]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45)

▲ 김영한 교수(본지 편집고문,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 원장).

▲ 김영한 교수(본지 편집고문,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 원장).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형(刑)은 그가 사셨던 로마시대에 행해진 극형(極刑) 가운데 하나였었다. 십자가 처형은 당시 로마 황제의 체제에 반란을 획책하는 자들에 대하여 내리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로마 시대에 행해진 십자가 처형에 대한 시대사적 연구를 통해서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형은 그 역사적 사실성이 더욱 명료히 드러난다. 독일 튀빙엔의 복음주의 신약 신학자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은 그의 저서 『십자가 처형』(Kreuzigung, Crucifixion, Fortress Press, 1977, 김명수, 번역, 십자가 처형, 대한기독교서회, 1982)에서 역사적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형에 대한 시대사적 연구를 함으로써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형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자료들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이 글은 헹엘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십자가 처형

초대교회 유대인 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로마군이 70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디도(Titus) 장군의 유대인 고문관으로 있으면서 예루살렘 함락의 모든 일을 목격한 장본인이었다. 3세기에 쓰여진 그의 증언은 십자가형의 잔인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지를 뻗고서 처벌을 받을 때, 그들은 사형틀을 그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포박을 당하여 가장 뼈 아픈 고통을 받으며, 못 박힌다. 그들의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고 개들은 모질게 씹어 먹는다”(Apotelesmatica 4, 198f., 헹겔, 십자가 처형, 23)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페르시아와 마게도니아의 전쟁에서 유발된 잔혹한 행위가 십자가 처형의 동기가 되었다고 본다. 십자가형은 통치자에 대하여 반기를 든 반란자들에 대한 형벌로 집행되었다(헹겔, 상게서, 29). 십자가형은 범죄자들에게 수 일 동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한 후 죽도록 하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통치자들은 십자가형을 집행함으로써 체제에 대한 반란에 대해 복수하는 원초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고, 이를 보는 대중적인 새디즘적인 잔인성을 만족시켰다. 통치자들은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십자가형을 공개적으로 실시하였고, 죄패를 달아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하였다.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비인간적인 잔인성과 야수성 등 악마적인 본성의 표현이었다.

주전 3세기부터 하류계층 가운데 저속한 조롱거리로서 십자가(crux)형이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헤르도투스의 책에 의하면 십자가형은 본래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대자료에 따르면 십자가형은 야만족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처형양식이었다. 로마인들은 야만족이 사용하던 십자가 처형을 야만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노예 등 하류계층이나 체제에 대한 반란자들에게 사용하였다. 로마시대의 처형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매질을 하고, 처형당할 자는 가끔 처형장소까지 형틀을 메고 운반한다. 거기서 그를 양 팔을 벌린 채로 못박은 다음, 일으켜 세우고 조그만한 나무 못으로 발을 받쳐놓는다(헹엘, 상게서, 42).

로마 네로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4?~AD 65)는 십자가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나는 거기에서 십자가들을 보았다. 그 십자가는 한 가지 모양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어떠한 자의 머리는 거꾸로 땅을 향하고 있었고, 다른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의 국부는 창으로 찔려 있었다. 또 다른 십자가에 달린 자들은 교수대 위에서 양팔을 뻗친 채 처형당하였다”(Dialoge 6 (De consolatione ad Marciam), 20,3: Martyria Petri et Pauli (Lipsius I, 170))

세네카는 삶을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의 고통에 비교하였다: “고통을 잊게 하는 일, 즉 숨을 거두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상처를 짓누르며, 교수대에 매다는 일은 가치 있는가?” 세네카는 고대문학에서 유래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자가 죽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단번에 숨을 거두기보다 방울방울 피를 흘리며 사지(四肢)가 갈기갈기 찢기며, 고통 가운데서 서서히 죽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가? 저주받은 나무에 묶여 오랜 고통에 시달리고, 몰골은 흉악해졌고, 채찍을 맞은 자국이 어깨와 가슴에 부풀어 오르고 단말마의 고통 가운데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기를 원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살려달라고 수없이 애원하였을 것이다”(Dialogue3(De ira I) 2.2).

이처럼 “못으로 박는”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한 처형방법이었다. 최소한 매질은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행해졌다. 먼저 행해진 고문은 십자가형의 실제적인 고통을 단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십자가형은 무엇보다 고통을 지속시키는 수단으로 취한 것이다(헹겔, 상게서, 47).

로마인들에게 인식된 십자가 형벌

로마의 법률가 율리우스 바울(Julius Paulus)이 편찬한 『형법』(Sentientiae)이라는 저작은 로마시대에 행해진 세 가지 가장 잔인한 형벌을 다루고 있다(Julius Paulus, Sentientiae 5, 17. 2: Krüger, Collectio librorum iulrius anteiustiani II, 126, 헹겔, 52). 첫째 십자가형(十字架刑)(crux), 둘째 화형(火刑)(crematio), 셋째 교수형(絞首刑)(decollatio)이다. 그리고 짐승에게 찟기는 형(damantio ad bestias)은 잔인한 형벌로서 교수형을 대신하여 종종 행해졌다. 십자가에 해당하는 범죄자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적에게 투항하는 자, 비밀 누설자, 반역 선동자, 살인자, 통치자의 번영에 대하여 불길한 예언을 하는 자, 야간에 음란한 행위를 하는 자, 마술을 행하는 자, 절박한 상황에서 변절한 자 등이다. 십자가형은 그 형벌의 가혹함 때문에 항상 하류계층에게만 적용되었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것은 당시 그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당시 사회의 하류계층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류계층에게는 보다 인간적인 형벌이 적용되었다. 십자가형은 처형자를 맹수에게 던지는 대중오락과 비교할 수 있으나, 짐승에게 찢기는 형은 대중적인 축제가 거행되는 특수한 때에 수행될 수 있지만 십자가형은 어느 곳에서나 시행될 수 있는 일반적인 처형방법이었다.

당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 같은 지성인도 십자가형과 같은 고대사회의 처형방법이 잔인한 방법이라고 혐오하면서도 범죄자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처형되어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실감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러한 잔인한 형벌에 의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의 낮아지심과 대속적 죽으심의 사랑과 헌신을 깨우쳐 준다.

수치스러운 죽음

십자가형은 처형당하는 자를 벌거벗겨 눈에 띄는 장소, 네거리, 극장 안, 높은 언덕, 범행 장소에 공개적으로 진열시킨다. 그럼으로써 십자가형은 내면적인 차원에서도 처형당하는 자에게 최대의 수치를 드러내었다. 십자가형은 인간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고대세계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헹엘, 상게서, 112). 십자가형은 처형한 자를 대부분 매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처참하게 평가되었다. 처형당한 자는 매장을 거절당하고 그의 시체는 맹수들과 시체를 뜯어 먹는 새들의 먹이로 주어졌던 것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처럼 십자가형은 처형당하는 당사자에게 완전한 굴욕과 수치를 가져다주었다.

구약시대 모세도 “십자가형이 저주받은 형벌”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하). 그러나 모세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악한 풍습에 반하여 십자가에 처형된 자들을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로 장사지내라고 명하고 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은 십자가에 처형된 자

로마 시대에 십자가형은 사회의 안전을 깨뜨리는 위험한 범죄자들과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천민계층에게 실시되었다. 이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법 테두리 밖에 있는 자들이거나 인간으로서 권리를 박탈당한 노예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로마가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억압해야 하였던 집단들이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슬로건 이면에는 체제에 저항하는 자들을 응징하는 잔혹한 형벌과 이를 실시하는 엄청난 군사력이 있었다. 이러한 체제에 대한 반란자를 잔인하게 응징하는 결과로 로마는 사회적인 안정과 법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일반 군중들은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달린 자들이란 의당히 사회적으로 윤리적인 면에서 반국가적 내지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였다. 십자가 처형자들은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께서 판결받은 십자가형이란 그 당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에 실재하는 신들은 영원히 죽지 않은 자들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자기들의 신들에 비교하여 이들은 참된 유일하신 하나님의 선재(先在)하는 외아들이 갈릴리의 이름없는 유대인 가운데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기다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여 정치적으로 선동했다는 범죄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어리석음”(moria) 내지 “미친 짓“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이 언급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 1:18)라는 말은 당시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표명하고 있다. 십자가라는 말의 꺼리낌은 십자가에서 당하는 고통에 필적한다. 심지어 바울의 희랍 청중들은 십자가의 말씀을 좀처럼 인정할 수 없었다. 십자가라는 단어에는 잔혹한 수치와 멸시와 미련함과 무시가 동반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에게 인식된 십자가 처형

더욱이 로마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세운 십자가를 자주 볼 수 있었던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증거한 십자가의 말씀을 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나무에 달린 자들마다 저주받은 자(신 21:23)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세계의 종교적 이상과 비교하여 볼 때 기독교의 메시지는 로마시대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용어인 “해로운, 새로운 미신”(superstitio nova et malefica, Nero 16, 3)으로써 서술될 수밖에 없었다. 소위(所謂)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기 때문이었다. 십자가는 수치스러움의 상징(히12:2)이었다. 그러므로 그 시대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희랍인들이나 로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는 죽을 수 없고, 가장 잔인한 처형으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십자가라는 수치와 걸림돌의 베일을 걷어내고 나사렛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한, 마음이 가난하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만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구체적인 역사성

“십자가형은 결코 피흘림이 없는 처형방법이었다”는 최근 학자들(브란덴부르그, 예레미아스 등)의 주장(E. Brandenburger, Kreuzigung Jesu und Kreuzestheologie, WuD NF 10, 1969, 18: J. Jeremias, The Eucharistic Words of Jesus, London & New York 1966, 223)은 잘못된 이론이다. 이것은 당시 로마시대의 처형방법에 맞지 않는 해석이요,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십자가 처형에 대한 기록과도 배치된다. 당시 스토아 철학자들은 무감정과 덕성(德性)에 대한 설교에서 십자가를 지혜자의 침착과 덕으로 해석하였다(헹겔, 상게서, 114). 이러한 스토아적 해석에서 십자가형이란 구체적인 사실 아닌 하나의 은유가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십자가란 지혜자가 죽음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는 고통에 대한 본보기, 즉 영혼을 결박하고 있는 육체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본보기가 된다. 이러한 해석은 십자가형을 역사적 예수가 당한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은유에 불과한 것으로 만든다.

당시 로마 시대에서는 처형당하는 자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 뿐 아니라 처벌의 전형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던 채찍질은 많은 처형당하는 자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했다. 세네카가 언급하는 바같이 예수는 몸이 너무 허약하였기 때문에 십자가 형틀을 처형 장소까지 운반해 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어찌하여 십자가 상에서 빠르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해준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2004년에 상영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Jesus Christ)이라는 기독교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고통이 너무나도 참혹하고 인간적으로는 견딜 수 없는, 감각적이며 수난적인 극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십자가형의 시대사적인 연구는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형이 하나의 픽션이나 은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고통은 종교적 낭만으로 명상될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연재 바로가기]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

에디터 추천기사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성료 감사 및 보고회

“‘현장에만 110만’ 10.27 연합예배, 성혁명 맞서는 파도 시작”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성료 감사 및 보고회’가 21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렸다. 지난 10월 27일(주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열린 예배는 서울시청 앞 광장을 중심으로 광화문-서울시의회-대한문-숭례문-서울역뿐만 아니라 여의대로…

제56회 국가조찬기도회

‘윤석열 대통령 참석’ 제56회 국가조찬기도회… “공의, 회복, 부흥을”

“오늘날 대한민국과 교회, 세계 이끌 소명 앞에 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며 온전하신 뜻 분별해야” 윤상현 의원 “하나님 공의, 사회에 강물처럼 흐르길” 송기헌 의원 “공직자들, 겸손·헌신적 자세로 섬기길” 제56회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가 ‘…

이재강

“이재강 의원 모자보건법 개정안, 엉터리 통계로 LGBT 출산 지원”

저출산 핑계, 사생아 출산 장려? 아이들에겐 건강한 가정 필요해 저출산 원인은 양육 부담, 비혼 출산 지원은 앞뒤 안 맞는 주장 진평연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강 의원 등이 제출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21일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

다니엘기도회

다니엘기도회 피날레: 하나님 자랑하는 간증의 주인공 10인

①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 이미재 집사 (오륜교회) ②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 박광천 목사 (올바른교회) ③어린이다니엘기도회를 기대하라! - 강보윤 사모 (함께하는교회) ④천국열쇠 - 강지은 어린이 (산길교회) ⑤용서가 회복의 시작입니다 - 최현주 집…

예배찬양

“예배찬양 인도자와 담임목사의 바람직한 관계는?”

“담임목사로서 어떤 예배찬양 사역자를 찾고 싶으신가요?” “평신도의 예배찬양 인도에 한계를 느낀 적은 없으신가요?” “예배찬양 사역을 음악 정도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가르치고 계신가요?” 예배찬양 사역자들이 묻고, 담임목사들이 답했다…

 ‘생명윤리와 학생인권조례’

“학생 담뱃갑서 콘돔 나와도,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훈계 못 해”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세미나가 ‘생명윤리와 학생인권조례’를 주제로 21일(목) 오후 2시 30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됐다. 이상원 상임대표는 환영사에서 “학생인권조례는 그 내용이 반생명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고, 초‧중‧고등학교에서 사실상 법률…

이 기사는 논쟁중

인물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