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속 ‘부족한 기독교’에 대하여
K는 영화를 봤고 교회엔 가지 않았다
정신이 희미하다. 방금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시계를 보니 6시……, 벌써 6시다. 시간은 항상 그렇게 냉정하게 나를 배신한다. 어젯 밤에도 잠을 설쳤다. ‘5분만…’ 하다 1시간을 더 자버렸다. 마음은 허탈하고 몸은 개운하지 않다. 대충 몸을 씻고 집을 나섰다.
노트를 꺼내고 수업 준비를 했다. A대학 연극영화과 4학년 K. 유치하게 노트에다 이런 걸 왜 적었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화란 정신의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이라는 교수의 말에, ‘저런 표현을 쓰다니 역시 교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 졸음에 눈을 감았다. 교수는 ‘브로크백 마운틴’을 본 사람은 동성애를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한다느니 ‘천하장사 마돈나’를 본 사람은 트랜스젠더를 이해할 수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했던 것 같다. 그 후론 잘 기억 나질 않는다.
건물을 벗어나니 햇살이 눈부시다. 잠시 걸어볼까. 길 양 옆으로 심어놓은 플라타너스 잎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싱그럽다. 이럴 땐 내가 대학생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는 시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영화는 정신의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이라…, 정말 시같은 표현이군.
늘 이 기분만 같았으면…, 하지만 나는 취업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출세를 해야 한다. 시가 좋아 시인이 돼볼까 했지만 현실은 나를 시인으로 받아주질 않을 모양이다. 법조인이 되길 바라시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래도 영화배우나 감독이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끝내 이 영극영화과에 입학했는데, 졸업할 때가 되니 막상 꿈이고 뭐고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산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B선교회 L이라고 소개 하면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적힌 쪽지를 웃는 얼굴로 내민다. 사랑이라는 말에 순간 가슴이 울컥했던 것 같다. 아직도 이 세상엔 사랑이라는 게 있을까. 20대 후반의 나이에 나는 벌써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회에 한번 나가볼까 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친구와 함께 영화 ‘밀양’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을 접었다. 아이를 납치해놓고도 자신은 용서를 받았으니까 됐다니. 그 후 가끔 교회 옆을 지날 때면 납치범의 그 말을 듣고 미쳐버린 여주인공이 떠오른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자꾸 시선이 갔지만, 나는 “관심없어요” 라는 말과 함께 그 종이를 다시 돌려줬다.
집에 도착하니 밤 9시. 다리에는 힘이 다 빠졌고 친구들에게 마지못해 끌려가 마신 술은 자꾸만 넘어오려 한다. 머리도 아프고 몸살 기운도 도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더 아픈 것 같다. 외로움 때문일까. 대학 입학으로 상경한지 벌써 7년째.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야만 하는 집은 내게 마치 동굴과도 같다. 과제 때문에 앉은 책상에 한참 동안 엎드려 있다 겨우 컴퓨터 전원을 켰다.
‘친절한 금자씨’를 본 후 소감을 적고 감독의 의도를 파악해 오라는 과제.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과제를 교수는 정기적으로 낸다. 어떤 신문에선가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성경을 항상 옆에 둔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 그래서 금자씨는 복수를 하면서도 복수를 하지 않길 원했고 하얀 눈이 내리는 곳에서 하얀 케이크 위에 얼굴을 묻는 것일까. 친절했지만 결코 친절하지 않았던……, 그런 자신이 더 슬펐던 금자씨. 영화학도랍시고 나름 고상한 말들을 써가고 있던 차에 문득, 지금은 유행어가 돼버린 “너나 잘하세요”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단발버리에 너무나 비호감이었던 목사. 금자씨의 촌철살인 같은 그 말에 내가 약간의 쾌감을 느꼈던 건 왜일까.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근만근 같았는데 지금은 눈이 말똥거린다. 자야 하는데, 눈은 DVD가 가득 들어찬 선반으로 향했다.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 ‘다빈치코드’를 집어들었다. 전설적 거장의 명화에 알 수 없는 코드가 있었고 그것을 파헤치자 드러나는 거대한 종교적 비밀들. 사람들에게 신비의 대상인 종교는 역시 이런 추리나 스릴러물 영화에 적합한 재료임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무래도 신이란 건 없나 보다. 신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보면 다 이렇게 인간들의 손길이 닿은 것이겠지. 그 비밀들은 로버트 랭던에 의해 결국 다 밝혀지고 마는 것이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자리에 누웠다. 빡빡한 내일 하루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하다. 어디 탈출구는 없을까. 낮에 만났던 B선교회 사람이 생각난다. 그 사람이 건네준 종이에 씌어 있었던 사랑이라는 두 글자. 공부를 좀 못해도 돈을 좀 못벌어도 출세를 하지 못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걸까. 하나님은 사랑해주신다는데, 교회에나 나가 볼까.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생각에 죄를 짓고도 뻔뻔한 얼굴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 교회는 무슨.
공포영화와 교회의 잘못된 만남
위 글은 가상의 인물 K를 설정, 그의 하루를 상상해본 것이다. 비기독교인이 반기독교적 정서를 담은 영화를 접했을 때 어떤 영향을 받을까를 그려봤다. K는 꿈을 잃고 지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대학생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그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아무 조건 없이 그를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랑이다. K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찾고자 하지만 그가 접했던 많은 영화들이 그것을 막았다. 글 속 교수의 말처럼 ‘밀양’ ‘친절한 금자씨’ 등의 영화들은 K의 마음에 교회에 대한 부정적 파도를 치게 한 것이다.
공포영화 ‘불신지옥’이 제작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종교적 소재를 사용한 최초의 공포영화란다. 기자는 최근 시사회를 통해 이 영화를 미리 볼 수 있었다. 제목이 제목인만큼 내용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포영화의 소재로 사용된 종교, 아니 기독교라…. 영화를 보기도 전에 거부감부터 들었던 건 기자 뿐일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화를 봤지만, 역시나 이 영화에서도 교회는, 그리고 믿음이라는 숭고한 가치는 한 광신도의 사이코패스적인 행태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피가 흩뿌려지고 섬뜩한 귀신이 관객을 응시하는 그러한 몇몇 장면들 속에서 말이다.
이 영화에서 공포를 야기하는 핵심 인물은 사라진 소진(심은경 분)이다. 그녀가 사라진 후 하나 둘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고 소진의 행방을 좇는 언니 희진(남상미 분)과 형사(류승룡 분)에 의해 조금씩 어둠의 비밀이 풀려나간다. 주변 사람들은 소진이 사라지기 전부터 그녀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웅성댔고, 실제 소진은 사람들의 죽음을 예언하면서 부적을 써주기도 했다.
소진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건 그녀가 아버지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뒤 기적처럼 살아난 후다. 그리고 절실한 크리스천인 엄마(김보연 분)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기도한 덕분으로 여긴다. 결국 엄마의 그 ‘기도’ 후 변한 건 소진과 ‘광신도’가 된 엄마 둘 다이다. 어찌 보면 겉으로 드러난 공포적 인물은 소진이지만 공포적 분위기를 은근히 풍기는 인물은 다름아닌 엄마라 할 수 있다.
카메라는 그런 ‘광신도’ 엄마를 시종일관 비정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심판이 시작됐어” “사탄을 집에 들여선 안돼”라는 엄마의 대사는 일견 기독교적인 듯하지만, 그 뉘앙스는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자신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여기에는 믿음 있는 자만 들어올 수 있다고 말하는 그 태도 역시 여느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악인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엄마의 기도 후 회복한 소진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는 내용은, 물론 그 기도의 주체가 광신도 엄마였다고는 하나 자칫 관객들에게 왜곡된 기도의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이후 신앙 생활과 관련된 엄마의 모든 행동은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비이성적 크리스천의 행동이며, 그것은 첫째 딸 희진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신도의 그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영화는 또한 스토리의 핵심이 되는 광신도 엄마의 잘못된 믿음 위에 무속신앙을 포개놓는다. 신들린 소진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녀의 그 신비한 능력에 기대면서 자신들의 이기심과 끝없는 욕망을 채우려 한다. 감독은 결국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빠진 나약한 믿음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듯하다. 이는 믿음의 본질을 묻고자 한 의도로 보이지만 믿음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부정으로도 비칠 수 있다. 영화의 후반 혼란이 마무리되는 순간, 형사가 “도대체 무얼 믿어야 하는 거냐?”라고 하는 장면에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풍긴다.
영화의 감독은 시사회 후 “사이비에 대한 이야기라 (교회의) 반발은 없을 것”이라며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고 스스로 믿음을 규정하는 엄마(광신도로 등장)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정말 감독의 말처럼 지금의 교회와 영화 속 광신도를 정확히 선을 그은 채 구별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일종의 상징의 예술이다. 한 사람을 통해 그 사람이 속한 조직과 사회를 보여주고 한 사건을 통해 시대를 조명하는 예술이 바로 영화이기 때문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가 “너너 잘하세요”라고 한 대상은 영화 속 한 명의 목사지만, 관객들은 모든 목사들에 이 말을 적용한다.
영화만큼 대중적인 것이 없는데, 그러한 영화들에 교회가 자꾸만 부정적으로 비쳐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교회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으니까. 철저히 반성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교회보다 교회를 부정적으로 그리는 영화들이 더 야속한 건, 그것들이 겉으로 드러난 교회의 일부분을 마치 전부인 것처럼 나타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대중영화라는 점 때문이다. 많은 이들에게 노출될수록 수습은 그만큼 어렵다.
영화 ‘밀양’이 개봉되고 교회에 한창 논란이 있었을 때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부 최은 박사는 “대체로 ‘냉소’ 혹은 ‘코믹함’의 외양을 띠는 정서를 담은 이러한 영화들에서 기독교는 주로 위선적이고 무력하게 묘사된다”면서 “뭐라 반박하기 어렵지만 이와 같은 반기독교 정서를 끌어안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교회가 이렇게 된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이고 넓은 마음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 쯤으로 해석된다. ‘불신지옥‘ 같은 영화가 야속하지만 결국 최 박사의 이 말이 정답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하루빨리 대중영화 속에서 부정적인 교회의 모습이 사라졌으면 한다. 언젠가, 외로움 속에서 사랑을 찾는 K가 영화를 통해 교회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는 그런 기사를 쓸 날이 있을까. 그 땐 이렇게 상상이 아닌 현실의 K가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