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박사의 ‘살자’ (31)-자살의 예방[4] 기독교인들의 경우
Ⅰ.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Ⅱ. 자살의 역사적 이해
Ⅲ. 자살의 원인
Ⅳ. 자살의 유형
Ⅴ. 자살의 예방-(4) 기독교인들의 자살 예방
자살은 개인이 심각한 무력감에 빠질 때 출구의 하나로 선택될 수 있다. 이는 최근 젊은 연예인들이 기독교적 신앙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자살한 것이 입증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외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실제로 극한 상황에 이르면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구분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모두가 심각하게 무력화되는 상황을 간과하지 말자는 것이다. 신앙 만능만을 고집하다 화를 당하는 경우를 방지해야 한다. 필자는 신앙적 관점에서 기독교인의 자살 예방을 위해 몇 가지 대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1) 병리적 신앙을 경계하자
병리적 신앙이란 이른바 ‘병든 신앙’이다. 신앙이 병들면 생기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활력이 없어진다. 최근 목회 보고서들에 의하면 기독교인이라도 각종 병리 현상에 예외가 없다. 이런 현상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해 정신의 허약함이 드러난 결과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의 정신 질병은 신앙과 관련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런 질병은 대개 특정한 신앙 형태, 즉 권위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 신앙, 신앙적 기대가 과장됐거나 소원 충족에만 집착하는 신앙심에 빠진 경우 등에 관련된다. 이들의 특징은 대개 포용하거나 이해하는 태도를 갖지 못한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잘 하려는 목표가 너무나 뚜렷하다 보니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정죄한다.
우리는 최근 잇따른 기독교인들의 자살을 두고서도 얼마나 마음 좁게 비판과 정죄를 가했는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음을 선택하였을까?” 라는 태도로 이해하지 못하고, 심한 욕설과 함께 비판과 정죄를 서슴치 않았다. 그런 태도는 진위 여부를 떠나 분명히 기독교인이 취할 태도는 아니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물론 모든 것을 덮어 놓고 ‘옳다고 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을 옳다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열심이 있지만 편협된 신앙은 ‘신앙적 오만’을 낳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인은 자신이 갖고 있는 적대감을 통제하기 위해 신앙을 잘못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대개 신에게 높은 소원을 요구하거나 신이 징벌하는 주체로 자신을 생각하는 특성을 보인다. 이런 현상은 신앙심과 병리적 현상의 모순된 관계로 발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의 행동은 자신의 생각에는 너무나 신앙적일지 모르지만, 그와 달리 상당히 병리적인 경우도 발생한다. 스스로 정신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신앙의 특별함이라 자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정신적인 장애가 발생할수록 진정한 신앙에의 참여는 감소하는 반면 병리적 행동은 증가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의 병리적 행동이란 현실 생활과의 균형을 잃는 것으로, 내적인 의미와 다르게 신앙적 행위만을 일삼는 경우다. 예를 들어 일상 생활을 소홀히 하면서도 더 많이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는 데 치중하는 형태다. 이는 신앙 공동체를 떠나서 행하는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하지만, 증상적으로는 정신 질환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신앙적 투신과 정신병, 신경과민적 불신 등은 이미 생활에서 균형 감각을 잃은 병리적인 상태다. 그러므로 삶과 신앙의 균형 유지가 중요하다.
2) 분기별로 정신건강을 체크하자
기독교인에게도 정신 건강(Mental Health)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을 가지면 정신이 저절로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신앙인이라도 정신 건강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정신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대개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삶에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이 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맹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탓에 오히려 죄책감을 많이 갖고 있다. 대개 동일한 잘못을 했어도 신앙인이기에 두 배의 죄책감을 느낀다. 잘못한 것을 두고 개선의 여지를 보이면 될 것을 ‘하나님이 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다. 그런 교인들 중에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시다! 심지어 그 일이 일어났던 것까지도 감사합시다!”고 권유한다.
교인들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발견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는 성도들을 목회적으로 돌봐주는 행위에 해당한다. 모든 것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것 보다 교회가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춰 이들을 돌보려는 목회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분기별로, 아니면 전·후반기로 나눠서라도 간단한 정신건강 체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껏 해야 구역장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목회적 태도는 옳지 않다. 구역장은 전문가도 아닐 뿐 아니라 그 자신도 문제를 가진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교구 담당 부목사가 이를 개입하거나 관여한다 해도 그들 역시 전문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 차원에서 간단한 심리검사를 실시, 정신적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교인들을 미리 발견하고 일정한 교육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얼마 전 기독 연예인들의 자살도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면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 필요성과 함께 아쉬움이 남는다.
3) 기독교인의 영적 건강을 중요시하자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건강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여기서의 건강은 물론 영적인 건강을 의미한다. 신앙이 활력을 잃게 되면 각종 병리적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신앙인들에게서 매우 신앙적이지 않는 면도 발견된다. 신앙적 형식주의에 치우쳐 실제로는 활력있는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상담자는 영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치료를 진행한다. 영적인 힘이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적 건강과 관련해 대표적인 것은 전술한 대로 ‘우울증’이다.
우울증과 관련, 매사에 의욕이 없고 부정적인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정신 에너지를 ‘제로(zero) 상태’로 보고 관찰해야 한다. 이는 신앙이 약화될 때 자살 위험이 더 높아짐을 시사한다. 특히 우울증이 유발되는 측면과 관련된 사람들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울증은 흔히 강박적이고 철저한 사람에게서 잘 나타나며, 이들은 대개 사회 생활을 착실히 하고 사회의 도덕규범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 특히 신앙적으로 교회 일에 성실하게 봉사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절망감, 허무감, 삶의 무의미 등에 빠져 기력을 잃기도 한다. 이런 우울증이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면과 연계되기도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추구하는 본질적인 삶과 죽음의 문제보다는 현실적 욕구와 불만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당 부분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과 관련을 갖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의 경우 현실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무력감을 경험하고 자살할 수 있다.
신앙인이라 해도 급박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반대급부로 ‘저 세상적인 것’을 이상화시키는 비현실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일종의 현실 도피적 태도를 취하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중세 수도원에서 자살이 많았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세상과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하고 오로지 신앙에만 정진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우울증을 증가시켰다.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열망이 강해졌던 것이다. 괴롭고 힘든 세상을 벗어나면 하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겼다.
이때 우리는 자살자들이 죽은 다음 천국과 지옥의 문제를 왜 생각하지 않는지 등을 두고 의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들은 당장 그런 것조차 생각하고 싶지 않거나 생각할 힘이 없는 상태다. 평소 기도하면서 신앙적으로 무장하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4) 신앙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강화하자
최근 기독교인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기독교의 신앙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런 문제는 지난날 기독교가 사회를 선도하던 시대에 비하면 격세지감마저 든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게 돼 버렸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편협된 시각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한 신앙을 상실한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잘못된 신앙, 형식적인 신앙은 생활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뭔가에 가리고 얽매인 신앙적 특성은 자칫 세상을 포용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격리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세상을 결코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만 여기면 안 된다.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이 땅의 삶은 ‘영원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데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저 세상을 지나치게 이상화시키면 삶에 대한 의욕이 서서히 약화되는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상태는 다름 아닌 신앙의 무기력 상태다.
신앙의 무기력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상실한 데서 비롯된다. 활력을 가져야 할 신앙생활이 그렇지 못하다면 질병 상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 치료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은 그 원인의 하나로 현대인의 무의미(無意味)를 정신적 문제로 지적한다. 현대인에게 삶의 무의미(無意味)는 삶의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 무의미(無意味)가 삶의 무기력과 정신병을 유발하는 요인이라면 신앙 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인(敎人)은 무의미는 아니라 해도 곧잘 무기력 상태에 노출될 수 있다. 게다가 신앙 생활이 무의미한 상태의 교인이라면 언제든 무기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교인은 잠재력이 침전되고 삶의 단조로움과 무기력이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힘이 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의욕 상실의 심리적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교인은 원인 모를 공허감이 그들의 실존적 공백을 채워, 신앙적으로 생활을 창조하기 어렵다.
5) 내세 신앙으로 소명을 강조하자
기독교인의 심리는 고정적이지 못하다. 주변 환경은 신앙을 끊임없이 위협한다. 이런 경우 신앙이 확고하지 못하면 외부적인 위협에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이는 신앙이 일시적인 병리적 현상, 갑작스런 사건 변화 등에 의해 손상이나 상실에 노출됨을 의미한다. 이런 점은 목회자에게 내세 신앙을 다시 강조하고 새 힘을 얻게 만들어야 함을 상정한다.
내세 신앙은 물론 죽은 다음 천국 가고 지옥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삶에서 자신의 소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각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소명은 바로 자신이 삶에서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일을 발견하는 데 있다. 이런 내세 신앙은 존재와 신앙, 그리고 소명 내지 사명의 문제와 중첩된다. 즉 삶을 사는 존재로서의 회복일 뿐 아니라 사명자로서 건전한 신앙의 회복이다. 소명감이 분명할수록 삶에서는 힘이 될 수 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어려움을 극복할 힘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을 포기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살아야 할 이유를 순간이나마 망각한 경우로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순간적인 망각이 엄청난 죽음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내세 신앙으로 삶의 의미를 되찾은 한 중년 여성이 있다. 그녀는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오랜 시간 동안 사람과의 접촉 결여로 생의 무의미한 악순환 속에 빠졌다. 그녀의 삶에 대한 무의미의 문제는 치료 과정에서 발견됐는데, 일기 속에 그 일단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계신다. 나는 그것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내 일이다.” 그녀는 ‘인간은 삶의 의미를 묻는 것보다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무슨 임무를 마련하고 계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무의미의 발견은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인데, 이는 마침내 삶에 대한 소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로 그녀의 무의미의 발견이 끝내 진정한 소명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6) 체험적 신앙 생활을 훈련하자
기독교인의 신앙 생활은 체험적이어야 한다. 체험적인 신앙은 힘이 있어서 생활 속에 만나는 여러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 체험적인 신앙은 감동을 낳고, 삶으로 이어지는 생동감을 발휘하게 된다.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세대이다. 미래학자인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에 의하면 포스트모던 세대는 EPIC이라는 네 특성으로 요약된다. 이 네 가지는 그 첫글자를 딴 것으로 먼저 그들은 경험(Experience)하고 싶어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그저 알기보다 자기 것으로 체험하고 싶어하며,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원한다. 또 그들은 참여(Participatory)하길 원하고 그저 일방적인 수여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또한 관계성(Connected)을 중시하며, 이미지 중심적(Image-drive)이다. 즉 포스트모던인들은 말과 글로 충분히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이미지나 은유로 표현하기 원한다.
실로 오늘의 기독교는 고대 기독교의 영성과 오히려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이는 ‘빈티지’(vintage)가 중요시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교회도 적극적인 참여와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고 공동체성을 더욱 지향하며, 이미지와 상징을 추구하는 예배를 강조한다. 여기서 젊은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생활에서도 실천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됐다. 이제 나에게는 무의미의 심연이나 나락(abyss)은 없으며, 나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존재로 나의 삶은 다시 멋있고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떠오르는 교회들이 ‘빈티지 신앙 예배’(Vintage-Faith-Worship)를 추구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체험적 신앙이란 피나는 훈련으로만 가능하다. 일과성에 그치는 수련회나 집회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스스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지난한 노력이 요구된다. “너희가 말대로 살면 내 제자가 되고(요 8: 31)”라는 말씀은 체험을 요구한다. 성경을 읽고 듣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말씀을 붙들고 한 주간, 또는 일생을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성경을 공부하는 것으로만 되는 삶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체험이 더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는 진정한 ‘통회와 자복’이 없는 것도 문제다. 정신 분석에서도 ‘애도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면 진정한 인격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신앙적으로는 통회와 자복의 자리다. 교회가 진정한 신앙의 부르짖음을 상실하지는 않았는가? 신앙 집회도 문제다. 유명한 코미디 강사나 모셔 말씀을 곁들여 한바탕 웃고 쓸쓸히 돌아서는 교인의 뒷모습을 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식하지만 눈물 콧물 흘리고 부르짖던 뜨거운 ‘심령부흥회’가 그립다.
7) 결론: 신앙으로 자살위기 극복한 사례 많이 나타나길
이상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자살을 예방적 차원에서 기술했다. 이는 신앙적인 측면을 강화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단순히 신앙의 문제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올바른 신앙 외에도 세상을 보는 관점, 보다 긍정적인 시각, 그리고 삶의 가치관까지를 다양하게 포함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정신 세계를 넓히는 문제가 매우 중요시된다.
이런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려는 무모한 노력을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신앙이 형식적이지 않고 실제적이라면 삶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위에 기독교인의 정신 건강에 관심을 기울여 목회적인 체계를 가지고 대응하자는 깊은 권고가 내포돼 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신앙이 위력을 발휘해 극복하였다는 간증을 들을 수 있는 시대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