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고통, 그리고 그 가운데 뿌려진 피…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  

[남 프랑스 위그노 후예들의 이야기 3] 광야 박물관

▲돌로 된 광야 박물관은 개신교 박해기간 동안 위그노들의 저항과 도피의 중심지였던 세벤느 산지에 있다.

▲돌로 된 광야 박물관은 개신교 박해기간 동안 위그노들의 저항과 도피의 중심지였던 세벤느 산지에 있다.

고대 로마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프랑스 남부 도시인 님(Nîmes)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세벤느 산지의 미알레(Mialet)라는 마을 근처에는 좀 특별한 박물관이 하나 있다. 이 지방 옛 가옥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돌로 된 이 박물관은 100여년간 지속된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담고 있는 ‘광야 박물관(Musée du Désert)’이다. 이런 의미 있는 박물관이 조그만 마을만 드문 드문 있고 교통도 불편한 이 세벤느(Cévennes) 산지에 세워진 것은, 바로 이 지역이 개신교 박해기간 동안 위그노들의 저항과 도피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상 16세기 후반부는 가톨릭을 지지하는 진영과 개혁신앙을 받아들인 진영간에 벌어진 치열한 종교전쟁에 휩싸여 있었다. 이것은 칼뱅 사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프랑스 개혁교회 성도들이 예배의 자유를 얻기 위해 내몰린, 피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결국 1598년 앙리 4세가 서명한 낭뜨칙령으로 인해 30년간 지속된 종교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고, 위그노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예배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신교도들을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로 간주한 루이 13세 때(1629년)부터 그들의 자유는 다시 각종 법적인 제한을 통해 축소되기 시작하였고,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하나의 군주, 하나의 법, 하나의 신앙>이라는 말로 요약된 정책을 시행하면서 낭뜨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들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 낭뜨칙령 폐지로부터 종교적 관용법이 발표된 102년간(1685-1787)의 가혹한 박해의 시기를 가리켜 이른 바 ‘광야의 시기’라 부르는데, 여기서 광야(Désert)란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위그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인 은밀한 장소를 가리키기도 했고, 탄압에 맞서서 벌인 그들의 저항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좀 더 성경적인 의미로 광야는 방황과 고난과 절망의 장소였으며, 동시에 이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의 음성을 듣게 하신 곳이기도 했다.

▲첫번째 방인 끌로드 부르송.

▲첫번째 방인 끌로드 부르송.

전시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1전시관의 첫번째 방인 끌로드 부르송(Claude Brousson)실에는 루이 14세 때 발표된 수많은 법령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위그노들에게 사회적, 법적 불이익을 줌으로써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유도하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들이다. 또한 폭력으로 개종을 받아내기 위해 조직된 왕의 군대가 자행한 ‘드라고나드’라는 박해 행위는 위그노들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었는데, 전시된 자료들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군화 신은 선교사들’의 강압에 못 이겨 가톨릭으로 개종했는지 알 수 있다.

낭뜨칙령 폐지 후 정부는 국경까지 폐쇄하며 위그노들의 망명을 막았지만, 이미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국외로 탈출했으며, 남아 있던 이들은 ‘광야’의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당시 목사들은 사형에, 여자들은 종신형에, 남자들은 노예선을 젓는 형에, 아이들은 수도원에 강제 입양되는 형에 처해졌다. 전시실 곳곳에 있는 유죄판결문들은 이러한 사실을 상세하게 증명해 준다. 낭뜨칙령 폐지 이전 뚤르즈 법원의 변호사였다가 후에 광야 교회의 목사로 헌신한 끌로드 부르송도 몽펠리에에서 사형에 처해진 순교자 중의 한 사람이다.

▲까미자르 전쟁에 대한 자료.

▲까미자르 전쟁에 대한 자료.

부엌 뒷방을 지난 계단 위쪽으로 올라가면 까미자르(Camisards) 전쟁에 대한 자료가 있는 롤랑과 까발리에 실이 있다. 까미자르란 1702년에서 1704년 까지 세벤느 지방에서 정부군에 대항한 위그노들을 일컫는다. 극렬한 박해자였던 한 가톨릭 신부를 암살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3천명의 위그노들이 2년간 2만5천명이 넘는 왕의 군대를 상대로 끈질기게 저항하며 전개되었다. 이 까미자르 부대의 대장이었던 롤랑의 집은 여러 세대 동안 잘 보존되어 왔는데, 광야 박물관은 이 집을 중심으로 건축되어 당시 가옥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부엌 진열장 안에 은밀히 감춰진 성경과, 수배 중인 목회자들을 숨겨주기 위해 만들어진 벽장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숨가빴던 상황을 잘 전해준다.

▲예배를 드리는 데 사용된 도구들.

▲예배를 드리는 데 사용된 도구들.

집회실에는 ‘광야’에서 예배를 드리는 데 사용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 때문에 모든 집기들은 신속하게 숨길 수 있도록 고안되어, 성찬의 잔은 컵과 대와 받침이 따로 분리되게 만들어졌고, 설교단(사진)은 큰 통이나 나무의자 형태로 접혀지게 제작되었다.

그 옆의 성경 자료실에는 수많은 성경과 신앙서적들이 수집되어 있다. 모두가 금지된 책들이어서 숨기기에 알맞도록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 있고, 거울 뒤나 여인들의 쪽진 머리 위 등 다양한 성경 은닉 장소도 전시되어 있다. 예배 처소와 목사가 없었던 여러 세대 동안 위그노들이 박해를 이겨내며 살아있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정예배 동안에 읽고 묵상한 성경 덕분이었다고 한다.

성경 자료실의 한쪽 벽에 있는 그림은 은밀한 세례식을 묘사하고 있고, 그림 밑에 있는 문서들은 18세기 위그노들의 호적관계를 보여준다. 당시에는 가톨릭 신부의 세례를 통해 교회 명부에 등록된 경우에만 합법적인 출생신고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은둔 생활 속에서 시행된 위그노들의 세례식과 결혼식 등은 어떠한 법적 효력도 가질 수 없었다. 사실상 그들의 결혼은 동거였고, 그들의 자녀는 사생아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개혁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1715년 최초의 ‘광야 신교도 회의’를 소집하여 은둔 중인 개혁교회의 조직을 회복시킨 앙뜨완 꾸르(Antoine Court)에 대한 자료들이 있는 방을 지나, 제1전시관의 마지막 방인 뽈 라보(Paul Rabaut)실에 이르면 박해의 마지막 시기와 관용정신의 출현을 볼 수 있다. 1787년 종교에 대한 관용이 선포되고, 2년 후에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전환기를 거치면서 위그노들은 차츰 시민적 권리를 되찾았는데, 님(Nîmes)의 목사이자 뽈 라보의 아들인 라보 생떼띠엔느는 대혁명 때 국민의회 의원으로 인권 선언문 작성에 참여하여 제10조 양심의 자유 항목을 넣는데 영향을 미쳤다: “어떤 사람도 그의 의견, 심지어 종교적인 의견 때문에 위협을 당해서는 안 된다…”. 이것으로 은둔과 박해의 ‘광야 시대’는 끝을 맺게 된다.

제2전시관에 들어가면 광야의 설교자와 목사로 순교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와 그들의 설교 사본들 및 비밀 교회 회의록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자신들의 집과 재산을 남겨둔 채 망명길에 오른 수많은 위그노들과 노예선에서 노를 젓도록 판결을 받은 5,000명 가까운 위그노들의 순교를 기념하는 자료들이 있다. 천장에는 노예선의 노 하나를 복원해 놓았는데, 무게 130kg에 길이 12미터인 이 노를 5명의 죄수가 함께 저었다고 한다.

▲18세기 어느 가정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공간.

▲18세기 어느 가정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공간.

다른 한쪽에는 18세기 세벤느 지역에서 있었을 법한 어느 가정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공간이 있다. 가해질 형벌이 매우 가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밤중 두 딸이 주변을 감시하는 동안 노인과 가족들은 성경을 읽고 있다. 이곳에 있는 당시의 가구와 의상들은 1세기 동안 억압받던 교회의 저항 비결인 가정예배를 감동적인 방법으로 되살려 준다.

전시실 맨 끝쪽의 죄수들에 관한 자료실에는, 아를(Arles)에서 가까운 에그 모르뜨의 꽁스땅스 탑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19세의 나이로 1730년에 투옥된 마리 뒤랑(Marie Durand)은 38년간 이곳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위그노 여자 죄수들은 그들을 금방이라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끝까지 거부했으며, 그들이 새긴 ‘RESISTER(저항하다)’라는 단어는 굽힐 줄 모르는 그들의 믿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광야 박물관 전체를 요약해 준다.

▲박물관 앞의 숲은 매년 9월 첫째 주일에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박물관 앞의 숲은 매년 9월 첫째 주일에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면 앞쪽에 낮은 언덕으로 된 숲이 있다. 이곳은 옛날의 ‘광야 교회’를 기념하여 해마다 9월 첫째 주일에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주로 프랑스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개혁교회 출신 성도들이 참석하지만, 스위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멀리 미국에서까지 오는 사람들로 인해 일 년에 한번씩은 이 작은 산골 마을이 장사진을 이룬다. 오전에는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주제에 따른 강연과 세미나가 이어지는데, 참고로 금년 주제는 칼뱅이며 10시 30분에 예배가 있고, 오후 2시 30분에 기념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100여년 동안 지속된 혹독한 박해는 프랑스 개신교회에게 큰 아픔과 상처였지만, 그 시련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보여준 위그노들의 용기와 믿음은 현대 프랑스 개신교 성도들에게 자랑스런 유산이 되었다. 또한 그들의 저항과 고통 가운데 뿌려진 피는 오늘날 프랑스 교회의 씨앗이 되어 현대 위그노 후예들의 가슴 속에 자라고 있다. 광야 박물관은 이런 그들의 역사와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다. <끝>

이태식 목사(엑상 프로방스 개혁주의 신학대학교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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