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석 목사 “엑스플로74 비록 비판했지만…”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추도사] 항상 꿈을 꾸시며 청년으로 사신 목사님의 소천을 애도하며

▲ 서경석 목사(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

▲ 서경석 목사(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

목사님 가신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섭섭합니다. 결국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천국으로 가신 것을 슬퍼만 할 수 없지만 목사님이 떠나신 빈 자리가 너무 커서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김준곤 목사님의 제자지만 그렇다고 정통파 제자群에 속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CCC를 다녔지만 오래 다니지도 못했고 진보적인 기독학생운동인 KSCF에 속해서 Explo74 행사를 비판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랜 신앙적인 방황을 거쳐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는 다시 복음주의자가 되었고 경실련 사무총장 시절 목사님을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반갑게 맞아 주셔서 목사님과의 만남이 다시 이어졌지요. 지금도 정동 CCC채플에서 신앙 간증을 하던 기억, CCC 하기수련회에서 간증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년 가까이 목사님과 깊은 친분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저를 특별히 사랑해 주시고 항상 지지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오해하는 많은 분들에게 저를 변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請을 들어주셔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상임대표도 되셨고, 나눔과기쁨, 기독교사회책임에도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제 주위에서 제가 김준곤 목사님과 가깝게 지내는 것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간 길과 목사님이 간 길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목사님은 그랬기 때문에 저를 특별히 돕고 싶어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를 돕는 것을 통해 지난 날을 보상하고자 하셨습니다.

CCC 젖염소목장, 원수를 사랑으로 품은 결과

김준곤 목사님께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를 하시면서 황해도 봉산군에 CCC 젖염소목장을 만드신 것은 감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젖염소는 풀을 먹기 때문에 사람과 먹이 경쟁을 하지 않지요. 그러고도 염소젖은 우유와는 달리 사람이 완전히 소화를 하지요.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너무 좋은 식품이지요. 그렇지만 북한의 재래종 염소는 젖이 잘 나오지 않아 뉴질란드의 자넨종을 북에 보내어 종축개량을 하는 것이 꼭 필요했는데 김준곤 목사님이 결심하셔서 봉산군에 대규모 목장이 건립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제게 젖염소 목장의 아이디어를 준 것이 너무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아내와 아버지가 공산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당신 자신도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셨는데 이러한 공산군의 악행을 북한 주민에 대한 사랑으로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과 함께 봉산군 CCC 목장을 함께 걸으면서 목사님이 지난날의 감회를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글썽거리시던 모습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또 목사님은 제가 나라 걱정을 하면서 사회원로 성명을 조직할 때마다 항상 서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바른 말을 하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사람들은 민족 복음화의 역군으로만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 구원 뿐 아니라 사회 구원 문제에서도 똑같은 관심을 가지고 애써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목사님을 CCC 실무자들이 때로는 따라가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김 목사님이 바로 그렇게 비전을 꿈꾸고 비전을 실현하려고 애쓰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오늘의 CCC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 위해 결정적인 순간 사용할 ‘식량은행’ 다시 시작해야

또 참으로 아쉬운 때도 있었지요. 한번은 목사님께서 식량은행(Food Bank)을 시작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지요. 각 교회가 전부 통장을 만들어 저축을 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북한을 위해 쓰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뜻을 따라 이 일을 시작했는데 마침 같은 시기에 비슷한 단체가 생기는 바람에 그 운동과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 목사님께서 할 수 없이 이 생각을 접으실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고집을 부려서라도 그 일을 했으면 지금쯤 식량은행은 엄청나게 켜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소천하신 지금 목사님의 유지를 받들어 다시 식량은행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의 앞날이 극히 불투명한 지금, 김준곤 목사님이 꾸셨던 꿈이 기필코 실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일년에 몇 번씩 목사님을 만나 뵐 때마다 목사님은 적어도 30분 동안은 제게 한국교회가 큰 위기에 처해 있다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큰 교회들이 물질주의, 상업주의에 빠져 참된 복음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하셨습니다. 미자립교회는 매년 3천 교회씩 문을 닫는데 교인들의 수평이동으로 커진 대형교회들은 개교회주의에 빠져 있다며 크게 개탄해 하셨습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와의 갈등의 문제를 김준곤 목사님처럼 개탄해 하신 교회 지도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김 목사님께서 그토록 안타깝게 문제시하는 데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왜 기독당 만들었는지 속마음을 바라봐야…

목사님께서 작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셨기 때문에 제가 ‘나눔과기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작은 교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운동을 시작할 때에도 기꺼운 마음으로 오셔서 설교하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해주신 문준경 전도사님의 대신 거지 이야기와 119아줌마 이야기는 ‘나눔과기쁨’의 작은 교회 목사님들에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씀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나라를 걱정하시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그런 모습에서 항상 자극과 격려를 받은 사람입니다. 목사님이 나라를 걱정하신 나머지 기독당을 만드는 일도 하셨지요. 저는 기독당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목사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목사님은 전략가나 정치가가 아니시지요. 그래서 우리가 목사님을 이해할 때에는 전략적 판단의 옳고 그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속 마음을 보아야지요. 목사님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세상 속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면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나서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열심히 나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난주에 목사님께 병문안을 갔을 때 목사님께서 주신 마지막 말씀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출세할 생각 말고 겸손하게 나라와 교회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사회책임’이 교회의 희망이라며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제시대 국적도 없이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들을 생각하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 힘이 드신데도 힘들여 말씀해 주신 그 말씀들 고히 간직하며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처럼 꿈을 꾸고 그 꿈을 실천하며 사는 비전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이가 70, 80이 되어도 청년처럼 꿈꾸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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