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박사의 ‘중독탈출’ (49)-도박 중독[16] 치료와 억압, 충동
도박중독은 겉으로는 행동의 문제이지만 실제로는 심리적인 문제가 핵심이다. 물론 보이는 행동이 보이지 않는 심리에 영향을 주고, 다시 심리적인 특성이 행동에 영향을 주지만, 중심에는 심리적 성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심리적 특성이 행동을 유발하는 원천인 점을 알 수 있다.
도박중독의 경우에도 다른 중독과 약간 다르긴 해도 중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유형의 중독이든 심리적 결핍에서 비롯되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치료자는 이런 점을 고려해 치료하지 않으면 효과를 거두기 어려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중독행동을 유발하는 내면의 심리적 측면을 밝혀 대응해 나가야 한다. 이런 이유로 억압과 충동에 중점을 두고 치료를 시도하고자 한다.
1. 억압과 도박중독의 문제
억압(抑壓, repression)은 자기 뜻대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도록 정신적으로 억눌려진 상태다. 정신적 억압이 일어나면 감정의 흐름이 자유롭지 못해 정신병을 유발할 수 있다. 억압은 부정적으로 이해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억압을 잘 이해하면 치료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박중독자의 억압 해소는 치료의 일환이다.
1) 불안의 방어기제로서의 억압
억압은 정신분석에서 불안에 대한 1차 방어기제로 간주된다. 이는 개인이 외부 상황에 불안을 느낄 때 가장 많이 쓰는 방어기제가 억압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불안을 느낄 때 개인은 의식에서 용납하기 힘든 생각, 욕망, 충동들을 무의식 속으로 눌러 넣기 때문이다. 개인은 억압을 통해 위협적 충동, 감정, 소원, 상상, 기억 등이 의식되는 것을 막아준다고 생각한다. 이때 죄의식, 창피 또는 자존심의 손상을 일으키는 경험들은 고통스러운 불안을 일으키므로 특히 억압의 대상이다.
억압에는 정신 에너지가 강하게 사용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억압으로 불안을 방어하다 실패하면 투사(projection), 상징화(symbolization) 등 다른 방어기제가 동원되며, 그 결과 신경증이나 정신증세가 나타난다. 억압이 많을수록 편견이나 선입견이 많아지는 이유는 억눌린 생각들이 풀리지 못하고 억눌려 있기 때문이다. 억압이 성공적일 때는 본능적 욕구나 금지된 욕망의 노골적 표현이 방어되므로, 사회적·도덕적으로 잘 적응하는 생활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억압으로 무의식이 생기고 억압을 통과해야 치료가 일어난다. 정신분석 작업은 억압 극복 과정이므로, 억압은 정신분석 이론의 초석이다.
치료자들은 도박중독자들을 이런 억압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는 그들에게 억압된 심리적 현상을 고려하자는 것이다. 이런 억압은 때로 억누르는 행동으로 대체되기에 화날 때 분노를 억압하는 행동으로 선택된다. 그러면 이들에게 그 분노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의문이 일어난다. 엄밀히 말하면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이 느끼는 분노는 몸 안에 저장되고, 그 결과 몸은 고통받는다. 몸은 개인 안에 억압된 모든 감정을 지니고 감당해야 한다. 물론 몸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은 아니다. 몸의 고통이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다. 이는 그들에게 몸이 그런 무거운 짐을 지지 않도록 해방시키는 편이 현명한 측면에서 도박행위는 그 대응으로 일어난다.
건강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분노는 건강에 해롭다. 그것은 내면에 억압된 분노,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도박중독자들은 자신을 향한 분노를 도박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면 그들의 중독은 하나의 회피 전략이다. 내면에 억압된 고통스러운 감정을 회피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약, 알코올, 성(性), 음식 등에 중독되었든 게임에 중독되었든 밑바탕에 있는 동기는 결핍이나 아픔·분노처럼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을 회피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중독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그들은 억압된 감정의 해방을 느껴야 한다. 도박행위는 그들에게 단순한 쾌감 증진만이 아니라 억압된 감정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은 도박행위를 통해 내면에 흐르는 감정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려 시도한다. 이렇게 감정을 표현하면서 그들은 그에 따른 충분한 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2) 해소를 전제로 하는 억압
억압은 특성상 해소를 전제로 한다. 그러면 도박은 중독자들의 어떤 억압을 해소하려는 것일까? 이것이 옳다면 치료자들은 내면에 쌓여진 억압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 억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성장 과정을 중요시해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데다, 현재에도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도박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도박중독자들의 억압 문제는 도박하는 유발인자에서 나타난다.
도박중독자들에게는 15세 이전 부모의 사망, 별거, 이혼 또는 버려짐으로 인한 부모 상실 경험,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거나 변덕스러운 양육을 받았거나 가혹한 훈육 등과 같은 부모훈육의 부적절성, 청소년기에 도박행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경우, 물질이나 재물에 대한 높은 가치관을 가진 가정, 금전을 저축하고 지출계획을 세우고 가계를 꾸미는 것에 대한 가치관이 결여된 가정 등으로 꼽힌다. 이런 점들은 모두 환경적 측면이 중심이 돼 도박행위에 접근하게 된 요인들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환경의 산물인 점에서 이런 적절치 못한 환경 문제는 그들을 충분히 도박으로 몰아갈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도박중독자들의 억압은 환경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환경과 관련해 일어나는 심리적 측면도 있다. 그들의 능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은 도박으로 인해 그들의 능력을 보이려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박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존재가치를 높이려는 충동을 받는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심리적으로도 자신의 존재가치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일반적인 월급을 통해 재정을 획득하기보다 한 번의 도박으로 일시에 더 많은 효과를 얻으려는 심리가 작용해 도박에 더 빠져들 수 있다. 그래서 도박중독자들은 일상적 일보다는 한탕주의에 관심을 갖는다.
3) 치료 목표로서의 억압
앞에서 억압은 해소를 전제로 한다고 했다. 억압된 상황은 그것이 환경적이든 심리적이든 일정한 해소를 요청하는 상황이다. 이런 억압 해소가 바로 치료 목표가 된다.
억압이 해소되는 상황은 치료 결과를 산출한다. 물론 여기서는 환경적인 것도 해당하지만 그보다는 심리적 문제를 중요시해야 한다. 환경 개선은 치료자의 조언으로 갑자기 개선될 성질이 아니지만 심리적 변화는 치료자의 조언으로 얼마든 개선이 가능하다. 물론 어떤 경우 치료자의 조언으로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로 보기는 어렵다. 실제 환경이 어렵다고 모두 도박을 하지는 않는 점에서 심리적 변화의 중요성은 높다.
이런 상황은 도박중독자들이 더욱 억압에서 해방돼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억압의 해방은 그만큼 치료를 요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억압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현실에 눌리고 묶인 억압에서 해방돼야 할 과거는 넓게 생각하면 이 생애만이 아닐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땅 위에서 그들이 치료되면, 영혼이 치료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치료자는 그들의 심리적 특성에 집중해 치료를 시도할 수 있다. 여기에는 그들에게 신앙을 갖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신앙이란 정신력에서 어떤 방법보다 강력한 에너지를 갖기 때문이다.
칼 융(C. G. Jung)은 이런 신앙적인 정신력에 착안해 정신치료의 한계를 인정하고 종교의 치료 효과를 인정했다. 융은 현대의 정신치료에서 정신과 의사의 능력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종교인들의 능력이 더 강력하다고 인정했다. 이는 그들이 도박으로 인해 제한하는 믿음들을 갖게 되면, 자신을 속박하는 영혼에게서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점에서다. 게다가 그들이 신앙의 관점에서 과거에 행한 학대들을 뉘우치고 속죄하면 그 학대의 원죄적 결과는 영혼에게서 놓일 것을 상정한다.
2. 충동 억제로서의 도박행동
도박중독은 충동조절 장애에 해당한다. 도박중독자는 도박에 대한 생각이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개인이나 가정 또는 직업생활에 해를 끼치거나 파탄을 일으킬 도박행위에 만성적 또는 점점 더 사로잡힌다. 도박에 대한 집념이나 욕망 또는 도박행위의 빈도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기간 더욱 증가한다. 특히 도박행위 때문에 일어나는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하면 도박행위가 더욱 증가한다. 이를테면 도박 때문에 자주 결근하다 실직당한 경우, 빚을 갚지 못하거나 기타 경제적 책임을 이행할 수 없는 경우, 가정생활 파탄, 불법 집단에서 돈을 빌리는 경우, 문서위조, 사기, 횡령 및 탈세 등의 경우다.
1) 충동 해소로서의 도박행위
도박은 충동 해소로 이해될 수 있다. 충동(impulse)이란 대개 생리적 긴장, 결핍, 또는 허기와 갈증의 불균형 상태에 뿌리를 둔다. 충족돼야 할 절박한 기본 욕구는 대개 유기체에 행동을 강요한다. 결핍된 상태를 욕구, 그 욕구의 심리적 표현을 추동, 예를 들면 긴장이나 끊임없는 목표 지향적이라 구별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욕구와 추동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학자들도 있다. 심리학자들은 또 선천적이며 음식·공기·물 등의 기본적인 생리 욕구와 직접 관련된 추동과 약물중독 등 학습된 추동을 구별한다. 그밖에 추동 또는 욕구에는 성취, 활동, 애정, 친화, 호기심, 배설, 탐구, 조작, 모성애, 고통회피, 성애, 수면 등이 있다.
충동이 억압과 관련되는 점은 본능을 생각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본능을 억압하면 더욱 욕망을 분출하려는 충동을 느끼는 점에서다. 그러면 도박중독도 이런 충동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프로이트가 도스도예프스키에 대해 시도한 연구에서 발견된다. 프로이트는 도스도예프스키의 도박행동을 죄의식에 대한 해소로 봤지만, 자위행위(masturbation)의 대치행위라는 점도 관찰했다. 도박행동이 어떻게 자위행위라는 성적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본능적 충동을 해소하지 못한 것을 도박으로 풀고 있는 점에서 성적 행위로 간주했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옳다면 도박중독자들의 성적 충동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도박이 성적 충동을 풀어내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되는 점에서다. 특히 성적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도박이 하나의 해소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은 도박중독자들이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는 것이 상당한 치료의 일환이 됨을 시사한다.
2) 충동 해소와 본능의 상관성
도박행위는 충동의 문제와 관련해 이해할 수 있다. 충동이란 내면의 심리적인 세력이 작용해 행동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충동의 특성은 때로 심리학에서는 욕구나 본능과 동일하게 사용된다. 도박행위가 충동의 조절장애에 해당하고, 프로이트는 도스도예프스키의 도박행위를 성적인 측면의 자위행위와 연관시켰다. 충동은 인간의 성적 본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성적 활동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박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비교적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들 중 도박중독가 많은 점이 이를 방증한다. 그들은 여러 사회적 제약으로 성욕을 충분히 발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내성적인 사람들은 사회의 준엄한 성욕 불신 때문에 성적 공상을 몰아내고 육체적 충동과 야합하는 것을 죄악시한다. 이것이 신앙과 관련되면 정도가 더 심해진다. 어떤 집단에서는 성 문제에 관련해 어떤 작은 죄도 있을 수 없다는 도덕주의적 생각이 신학적 전통의 권위를 물려받아 엄격하게 적용된다. 그러니까 성에 대한 상상은 어떤 것도 죄라고 낙인찍는 것이다. 심해지면 그들은 성적 이미지에 사로잡혀 죄를 지었는지 찾아내려 양심에 고통을 준다. 이런 일은 도박과 반드시 관련은 없지만 심한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임상 경험에 의하면 어느 남자 대학생이 그랬다. 그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신이 어머니를 성적으로 해칠 것 같은 양심불안을 겪었다. 여기서 벗어나고부터는 다른 여성들을 성적으로 해칠 것 같은 괴로움에 시달린다고 했다. 물을 것 없이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너무나 착한 학생이었다. 그는 성적 상상을 모두 가학적 행동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는 양심이 바른데다 열심히 공부하는 착한 학생이었다. 그의 문제는 남자다운 용기가 없는 점이었다.
이처럼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더 많이 받는걸 보면, 기독교는 성에 대해 과도한 죄의식을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태도가 진정 신경증이 아니라면 양심에 의심과 불안을 자아내게 하는 역설적 이중구속이 된다. 두 가지 태도와 언어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있을 때, 죄책감이라는 타협의 산물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궁지에 빠지기 때문이다. 정신의 작용에서 충동의 해소가 본능과 관련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성적 충동과 강박관념의 해소
성적 충동이 도박중독자들의 내면에서 주로 작용하는 요인인가? 이는 진위여부를 넘어 매우 흥미롭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를 도박행위 유발인자로 볼 수 있다. 이런 이론이 옳다면 그들의 성적 문제, 즉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 발현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이런 특성은 무의식적이기에 당사자조차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치료자는 그들의 성적 상태에 주목해야 한다. 부부간 성적 관계가 원활한지를 살펴, 적절한 처방이나 대응을 고려해야 한다.
성적 충동의 문제에서는 그들의 성적 강박관념을 유념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그들이 지나친 강박관념을 가진 성격이 아닌지도 중요하고, 혹시 그들이 성적 충동 해소에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기독교는 유달리 성적충동의 해소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성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임을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강박관념을 갖게 된 데는 성경이 영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 구절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교회 전통과 신앙 태도도 그렇게 여기는 측면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베르고트(A. Vergote)의 이론에 기대 몇 가지만 살펴본다. 멀리는 수도원 전통을 들 수 있는데, 신앙인들에게 동정(童貞)에 대한 이상을 고취시켰고, 법률가들은 도덕에 대한 생각을 주입시키면서 엄격한 금지 규정을 만드는 데까지 나갔다. 영육이원론과 결합된 합리적 철학은 의심할 나위 없이 영(靈)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 육(肉)을 지배하고, 육을 이용하는 도구로서 육체라는 사상을 진작시켰다. 이 경우 육체는 출산을 위한 도구로서만 의미있다.
게다가 우아함을 강조하는 문화는 육체적인 것들을 멸시하고,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을 막았다. 문화 표면에 있는 이 모든 요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속을 파고들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성욕은 무의식적 기억에 흔적을 남겨놓는 갈등들과 초기의 억압들을 통해 밖에는 형성되거나 변환되지 않는다. 이는 순수한 열락의 정원(庭園)에 관해 선포하는 어떤 예언자도 인간의 성욕이 왜곡된 양심의 그림자 없이 전개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4) 충동 해소로서의 성에 대한 자유로운 인식
성 충동은 억압의 상태로만 묶여 있을 수 없다. 성 충동이나 성욕은 적절한 발현이나 해소를 목표로 해야 한다. 인간에게 성 충동의 발현은 신체 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과도 관련된다. 여기서는 히스테리를 대표적인 증상으로 들 수 있다. 그리스어의 히스테리(hysteria)는 본래 ‘자궁’을 의미하며, 성욕의 만족과 관련된다고 알려진다. 여성이 일정한 나이에 부부생활을 통해 성호르몬을 교환함으로써 신체 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을 함께 이룰 수 있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성적 불만족은 그대로 여성 특유의 정신질병인 히스테리를 유발했다.
성에 대한 문제는 여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이런 점에서 치료자는 도박중독자들의 성적 문제를 눈여겨봐야 한다. 그들이 적절한 성관계를 갖고 있는지 살피자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그들의 성적 문제와 관련해 드러나는 강박성이다. 이들의 강박성은 물론 성적인 것과 관련한 죄의식이 바탕을 이룬다. 그들이 성욕에 과도하게 죄의식을 느끼면 병리적 결과가 초래된다. 특히 성욕이 무의식적 관념들과 결부되고 반작용을 일으킬 때 더 그렇다.
더욱이 부모가 자신의 욕망과 관계된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거나, 그들의 명령과 금지가 더욱 죄의식에 관한 종교적 분위기를 부추기면 신경증을 더 잘 일으킨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성에 대해 죄의식을 강조하는 풍조는 사람들에게 감정적 삶을 불신하게 해 빈약하게 만들고, 창조력을 질식시키며, 사람들의 실존을 더 어둡게 한다. 그런 풍조는 나중에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자꾸 피하게 하는 종교적인 삶을 조장하고, 종교를 문화적인 것들과 분리시키게 한다.
이런 점에서 철학자 니체(Nietzsche)는 육체를 억압하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인 입장을 취했다. 니체는 도덕을 부정하고 삶을 긍정하라고 역설한다. 또 도덕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도덕이 삶을 죽이기 때문이다. 그를 따르자면 철학의 역사, 특히 기독교의 역사 전체는 삶과 삶의 전제, 삶의 풍부한 가치에 대한 드러나지 않은 폭행이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공간과 시간 안에 있으며, 살과 피로 이룩된 이 세상 뿐이다. 그리고 이 전체적인 실재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삶은 도덕에 반대되는 전제들에 바탕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덕은 삶을 부정하는 것이지만 삶은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이론을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해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본능의 억제를 심하게 할 경우 오히려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니체가 이렇게 반기독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지극히 신앙 위주로 정위된 영적 특성에 육체성이 억압된 데 대한 반발이 아니었나 싶다. 더욱이 그의 시각은 앞에서 지적했던 정신병리학적인 맥락과 일치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도박중독자들의 도박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 성욕을 억제하고 부인하는 태도는 부분적으로 인간의 모든 충동들을 제한해서 생각하는 성향과 결부된다. 그런 관점에서 공격성 역시 강력하게 배제되는데, 성욕을 경계하는 태도가 더 용의주도하게 이뤄지고, 그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5) 에디푸스의 갈등의 요인으로서의 충동의 문제
정신분석이 도박중독을 모두 성적 측면과 관련시켜 이해하지는 않는다.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이 그렇게 보지도 않는다. 실제로 동일한 정신분석학자인 그린슨(Greenson)은 도박중독을 에디푸스 갈등과의 투쟁이라 설명한다. 도박자가 아버지와의 갈등을 도박으로 풀어낸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린슨의 이론은 다음 5가지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도박행동이 부성상(父性像, father figure)에 의해 받아들여지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도박자가 아버지를 이기느냐 아니면 지느냐, 다시 말하면 거절당하느냐 지느냐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 그리고 우월성을 쟁취하기 위한 전투장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 극단적인 굴종성의 표현이라는 점, 그리고 도박으로 얻은 물질을 제공받아 금지된 쾌락을 즐겨보려는 시도의 의미를 지니는 점, 아버지의 사랑을 구하려는 의도적 의미를 가진다는 점 등이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도박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시각은 도박중독자들이 승리를 기대하면서도 쾌락을 노린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다. 그들은 도박을 통해 이제까지 자신의 인정받지 못한 삶을 한꺼번에 인정받으려 한다. 그러면 이런 에디푸스와의 갈등도 고려할 수 있다.
저자가 상담하던 어느 도박중독자가 그랬다. 30대 초반인 그는 인터넷 게임으로 도박에 빠진 경우였다. 아버지는 식당을 경영하시는데, 그의 도박으로 가족은 몸살을 앓았다. 집을 팔아야 했고, 전세에서 월세로 전전해야 했다. 이에 지친 부모들은 아들에게 “제발 살려달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상담하면서 아들은 아버지와 내심 겨루고 있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 도박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체구가 큰 편이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강하지 못했고 중심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따라 아들이 무시하는 정도이기도 했다. 그의 무모한 생각은 불행하게도 가족의 가산을 탕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유달리 아버지에게 감정이 많은 아들은 상담 순간에도 아버지와 다퉜다. 그는 어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미안하지 않다고 했다. 몇번 상담을 했지만 도저히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을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 성장기에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던 원망감이 아버지와 대적하는 결과로 나타나 씁쓸했다.
3. 성욕과 공격성에 대한 죄의식
도박중독자들은 쾌락중추에 불이 켜지는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에 쾌락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가장 본능적인 발현의 결과다. 그들은 도박을 통해 성적 쾌락이 대치되는 효과를 상정하고 있다. 성적 쾌락은 순간이지만 가장 본질적인 점에서 도박에서 얻는 쾌감과 일치한다. 그러면 성적 쾌락의 이해가 그대로 치료의 일환이 된다.
1) 본래적 실존으로서 성욕에 대한 이해
성욕과 공격성에 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본능적이다. 집단적 신경증의 경우 본능은 조금 의심스럽다. 어떤 것을 봤을 때 즉시 야만적이고 모호하며 위험하게 느껴지면 사람들은 그 앞에서 긴장하고 바로잡으려 한다. 슈레버(Schreber) 판사의 아버지는 슈레버가 그의 몸을 경계하게 했는데, 그것은 나중에 그를 자신의 몸과 완전히 분리되게 하였고, 수많은 상상의 조각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죄의식에 대한 강조는 폭력성과 본능적 쾌락의 둘레에 그것들을 억제하는 도덕의 울타리를 만들지, 결코 그것들이 문화적 작업을 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사람들이 성욕을 그렇게 의심스레 여기는 것은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예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인 리비도로서 성욕은 그 자신의 본래적 실존을 주장하려 한다. 죄의식에 대한 강조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율성에 대한 열망을 억압하는데, 죄의식이 특히 억압하는 것은 성욕, 공격성, 사상의 자유에 대한 자율적 열망이다.
그러므로 성욕과 폭력성의 억압은 한 군데로 모인다. 더욱이 성욕이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더욱 내면화시키는 것은 성욕이 위반될 때 공격성도 같이 위반되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본래 외부로 나갔던 공격성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사랑과 우정의 관계가 깨진 것으로 경험될 때 생긴다. 그래서 성욕과 공격성을 이중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매우 해롭다. 그것은 정신 안에서 본능적인 삶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본능은 베르고트(A. Vergote)에 의하면 무규범적 측면이 있다. 그래서 본능은 때로 공동생활을 하는데 잘 맞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프로이트는 이를 ‘문화를 위한 거부’로 표현했다. 문화와 본능 사이의 긴장이 작용한 것이다. 인간의 열정에는 이성(理性)에 용기를 북돋워 주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면 리비도 뿐만 아니라 자제하려는 본능 역시 인간의 정신을 이어주는 생명력이며, 인간의 내면에 있는 호전적인 힘을 극복하고 문화적으로 창조적인 것들을 살려내게 한다. 그래서 충동은 사랑이나 문화가 이룩해 놓은 것들과 반대된다. 이런 본능은 신앙적 측면에서 문화에 대한 강력한 거부이기에 죄의식과 결부시켜 이해하면, 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인간을 위축시키고 생명의 가치를 저하시킨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면서 문명의 목적을 실현시킨다고 본다. 그들은 본능을 변화시키면서 행복을 찾았기 때문이다. 쾌락 원리와 종교는 사람들이 자아와 대상들 및 대상과 다른 대상들 사이를 제대로 분화시키지 못하는 먼 영역에서 잘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종교 속에서 사람들이 생명의 힘에 참여하는 것을 인정했지만, 종교적 승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적대적 사랑이라는 복음의 계명은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 한계였다.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할 만하지 못해서 그 계명은 모순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은 프로이트가 사람 속에 있는 죽음의 본능이 다른 사람에 대해 늑대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계명이 종교가 처음 지키고 확산시키는 듯 보였던 삶의 본능을 부식시킨다는 점에서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가 종교의 승화와 가치의 문화를 위한 거부를 주장하거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본능을 주장하는 데 따라서 종교에 대해 긍정적이었다가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심리적인 마찰로서 성욕의 이해
인간 본능의 발현은 심리 및 정신의 작용을 원활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정상적으로 발현되는 성욕이란 그만큼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특성에도 불구하고 성욕은 순순히 발현되기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지 성욕의 발현에 대한 마찰이나 장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본능의 삶에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양가성이 지배하고 있는 점이다. 본능적 생명은 그 힘의 발현을 자극하는 원천이 된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본능적인 삶이란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의 창조와 종교의 원천이고, 생명력과 관계를 맺는 동력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악의 힘이 된다. 그러면서도 이런 정신적인 체계를 존속시키는 데 필요한 본능의 변환은 언제나 모호하고 위험에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생명을 약화시킨다는 점이 지적된다. 죽음의 본능은 때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고, 복음서의 지혜는 정신병리학의 지혜와 일치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장에 가려낼 수 없을 만큼 뒤섞인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종교적인 청교도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삶과 종교적 업무에 선과 악이 모호하게 혼합된 점을 존중하라고 가르쳤는지 모를 일이다.
본능의 발현이 반드시 죄인가의 문제는 깊은 신학적 논의를 거쳐야 하겠지만, 어쩌면 신학적인 논의로도 그 정체성이 가려지지 않을지 모른다. 신학은 워낙 영혼을 강조하고 육체를 관심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도에서는 본능에 대한 죄의식의 강조로 관련성을 가려내어야 한다. 본능에 대한 죄의식의 강조는 복종이나 체념, 그리고 겸손 같은 수동적인 덕성을 찬양하게 하는데, 이는 모두 매우 모호한 개념들이다.
장인(匠人)이나 예술가, 과학자들 역시 자연의 법칙과 언어의 법칙에 복종하고, 교만은 보편적으로 고약하게 생각되지만 순종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면 주도적인 정신을 죽이게 되고, 체념을 이상화시켜서 기쁨을 찾는 마음을 고갈시키고 약화시킨다. 여기에 겸손만 강조하거나 칭송한다면 창조력을 마비시키게 되기에 그러한 집단 신경증은 도덕적 전도(顚倒)의 원인이 열정에 있다고 하며, 열정이 신앙과 반대되는 것이라 비난하면서 열정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막아버린다. 불의한 청지기(마13:24-30)의 가라지 비유야말로 우울하고 치명적인 색조를 지닌 죄의식에 정반대가 되는데, 이 비유는 유머러스하게 적극성이 지닌 덕목을 칭송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미래를 예비하는 지혜가 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다른 죄를 덮어두고 칭찬하고 있다.
3) 성에 대한 신앙적 관점의 개선
성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여기는 개신교나 가톨릭이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 정도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본능과 신앙의 관계를 논해도 될 것이다. 말할 것 없이 개신교는 인간의 본능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여기에 비하면 가톨릭은 약간 긍정적이지만, 신앙생활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했는가에 대해서는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베르고트에 의하면 인간 본성이 근본적으로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가톨릭교회의 생각이 때로 사람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동안, 개신교회의 태도는 사람들에게 기업가적 열심을 더 내게 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교회를 매우 엄격한 정신의 틀 속에 집어넣고, 탐구하려는 대담한 정신이나 위험을 무릅쓰는 주도성보다는 가치 보존을 더 장려했던 로마의 유산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막스 베버(Max Weber)처럼 신학적 운명론은 그 반대편에 정복적인 기업가 정신을 자극하지 않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가톨릭 정신은 모든 종류의 인간적인 동경(憧憬)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여왔고, 민중의 종교적인 예배는 물론 신비적 추구도 동시에 해 왔다. 인간의 본능에 대한 불신은 아마 개신교회나 가톨릭 교회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한 것 같다.
나아가 베르고트는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발전시킨다. 가톨릭교회는 사랑의 시(詩)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적도 있었고, 때때로 그것들을 엄격하게 심사하기도 한 데 비해, 종교적으로 더 비관적이었던 개신교회는 사람들에게 주도성과 정복욕을 고취시키면서 본능을 영적으로 승화시키려 했는데, 그것은 옹색한 작업으로 평가됐다. 그 결과 기독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잘못이 있다고 증언하며, 회심(悔心, conversion)이라 부르면서 인간의 삶에 믿을 수 없고 억제해야 하는 죄의식을 짊어지게 했다고 말한다. 이런 것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본능을 대하는 태도이면서 삶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4. 결론: 억압된 본능 발현할 기회를
지금까지 우리는 도박중독의 치료에서 억압과 충동의 문제를 다뤘다. 도박중독자들이 도박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이유에 본능을 고려하자는 것이다. 이런 본능에서는 성적 욕망이 강조됐다. 그들이 이런 성적 욕망을 억압하거나 억제하는 형태가 도박중독으로 이행되는 점을 치료에서 고려해 적용하자는 말이다. 도박중독자들 내면에서 작용하는 본능이라는 충동 문제를 도외시하고 진정한 치료는 요원하다.
충동 문제를 다루면서 프로이트의 성적 원리에 기대 기술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를 반드시 성적인 담론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본능이라는 측면에서 성적 특성을 다뤘지만, 내면에는 그들의 도박행동을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이와 무관치 않은 점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것을 굳이 구분하자면 이는 반드시 육체적인 것만 아니라 상당히 영혼의 문제와 연결돼 있다. 실제 본능이라는 심리적 특성과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측면은 모두 영혼이라는 실제를 입증한다.
이런 점은 칼 융의 심리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융 심리학에서는 영혼이 확고한 실체다. 영혼을 회복시키는 작업에는 육체적인 것과 내면적인 삶이 겹쳐지는 지점이 된다고 믿는다. 이 두 영역은 공통적으로 영혼을 통해서만 자아를 초월해 피상적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시각을 극복하는 내면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도박중독자들의 심리적 결핍의 정체가 상당히 밝혀졌다. 그리고 그들의 심리적 결핍을 충족하는 다른 방법도 가능해졌다. 본능의 결핍을 부르는 것이 도박이라면, 본능에 충실해 사는 것도 충족의 일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치료자가 그들의 본능적 생활의 충실을 도와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기대 치료한다면 도박중독자들이 정상적인 정신의 생활을 유지하거나 지속하게 되면 그들이 일시적으로 추구하려는 충족의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단순히 도박으로만 결핍된 내면의 심리를 충족하려는 것과는 달리 충족의 방법이 다양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도박중독자들의 치료에서 그들의 행동을 억제하려고만 하는 소극적인 방법보다는 그들의 본능의 발현을 도와서 도박의 중단을 시도하는 것이 더 적극적인 방법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