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박사의 ‘중독탈출’ (50)-도박 중독[17] 강박성의 치료 과정
도박중독자들은 강박성을 갖고 있다. 앞에서 우리는 강박관념에 대하여 기술하였거니와 여기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도박중독자들은 도박을 일시적인 만족으로 여기면서 점차로 강박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재미삼아 하던 것이 나중에는 그것을 끊지 못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것이 특성적으로는 처음에는 집중력을 발휘하다가 점차로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강박성이란 무엇인가? 강박성이란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지는 현상이다. 그런 강박성이 그들을 도박으로 빠지게 만들고 있다. 강박성은 어떤 일에 규칙적으로 작용하여 특정한 일에 속박적으로 매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럽에서는 강박성 인격장애(compulsive personality)를 속박성 인격장애(anankastic personality)로 부르고 있다. 속박성은 지나치게 형식에만 치우치게 만들어 그 결과를 계산하지 못하고 일 자체에만 집착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치료자가 도박중독자들의 이런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치료는 요원하게 될 것이다. 이는 치료에서 치료자가 강박성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할 필요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1. 반복성과 도박중독
강박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강박성 인격장애를 알아야 한다. 강박성 인격장애(compulsive personality disorder)는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그 특징으로는 반응의 협소, 질서정연, 끈기, 완고성 및 우유부단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분열성 인격장애와는 비교되는 것으로 대인관계에서 따뜻한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 자기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해 나가려는 집요하고 완고한 고집이라든가, 또는 질서와 규칙 또는 사소한 측면에 지나치게 매어달리는 집착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직업적인 면에서는 가장 적응적이기에 잘못된 행동이 가장 적게 나타나는 점이 특이하다. 다만 이들에게는 환경적이라기보다는 자기적이라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강박적 특징을 치료에 적용하면 몇 가지 점에서 고려할 만한 점이 된다. 그것이 바로 반복성이라는 것으로 반복적 확인과 반복적 행동이다.
반복적 행동은 불안한 심리적 행동이다. 반복적 확인과 반복적 행동은 일상의 생활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는 반드시 필요한 행동이지만 그 정도에서 지나친 것이다. 이런 반복적 확인은 불안의 심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외출하려고 문을 잠그었는 데도 믿기지 못하여 몇 번이고 반복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런 행동을 보고 있는 증상이라면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정상적인 측면에서 반복은 한 번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것을 두 번 정도 아니, 그 이상을 할 수도 있다. 더욱이 이런 불안의 심리는 일종의 의심의 특성을 포함하고 있다.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하므로 다시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들은 실로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사람들(checker)인 것이다.
반복적인 행동은 원인적으로 보면 미래적인 염려와 관련되어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파국상황을 막기 위해 지나치게 반복해서 확인한다. 화재를 막기 위해 난로와 전기기구를 확인하거나 도둑을 막기 위해 문을 잠그고 실수나 비판을 막기 위해 자신이 했던 일을 다시 확인한다. 그래서 일단 물건을 확인하고 즉시 자신이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을 마쳤는지 아닌지 의심하고 다시 확인해야만 한다. 이런 행위는 현상적으로는 미래적이지만 그 원인적으로는 과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들의 행위는 과거에 적절히 확인하지 않음으로써 커다란 재앙을 체험했는지도 모른다. 그 재앙의 경험은 이제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것으로 생각되므로 철저히 확인해야만 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반복적 확인을 강요하게 만드는 원인은 바로 잠재적 재앙에 따른 실수인 것이다. 이는 그들이 몇 시간동안 이런 확인, 의심, 다시 확인하는 헛수고의 악순환 과정을 고집하는 이유이다. 문 잠그기를 반복하는 행동이라면 아마도 이런 수고를 덜기위해 그들이 외출한 동안 문 잠그기의 임무를 책임져줄 다른 증상이 필요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안심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들은 본인이 직접적으로 취하지 않는 행동에 대해서는 그만큼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복적 행동은 강박증의 일차적인 특성이다. 반복적인 행동은 모든 강박 증상의 공통적인 행동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반복적인 행동은 한 번 이상 행동한다는 점에서는 반복적인 확인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공통적이다. 그러나 반복확인이란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지 못해서 취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반복적 행동은 그저 단순히 반복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취한다는 점에서 약간은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물론 강박증이 그 특성상 생각이나 행동에 반복적인 측면이 있다는 측면이 바로 모든 강박성을 대변하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반복적 행동을 구분하려는 것은 특정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취하는 제한적 행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다. 이런 반복적 행동은 대개 그것이 생각하는 경향으로 현실화되지 않기 위해서 취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복적 행동은 대개 반복해서 씻거나 확인하는 증상처럼 공포스런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특별한 행동을 취한다. 그러나 반복해서 확인하거나 씻는 증상과 달리 반복해서 어떤 행동을 시도하는 강박사고와 의례적 행위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반복해서 확인하는 증상의 의례적 행위의 경우 누군가 집에 칩입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창문이나 문이 잠겼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반복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전술한 반복적 확인은 이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반복적 행동은 일정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정신분열증이나 자폐증에서 별 의미 없이 취하는 행동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반복적 행동은 분명한 의도를 갖고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변에도 그 증상이 심하지 않을 뿐 어느 정도 반복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repeater)이 있다.
도박중독은 이런 반복된 행동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반복적인 도박행위에 빠져들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반복적인 도박행동을 하게 만드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심리적 불안이나 두려움이 일차적이지 않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불안하거가나 두려운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박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불안이나 두려움과 관련된 도박행동은 역시 미래의 불안이 그 기저를 이룬다. 이는 현상적으로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증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급적이면 파국상황을 피하거나 중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반복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적 행동의 증상은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증상과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강박사고와 행동 간에 논리적인 연결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취하는 행동은 논리적으로 연결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비논리적 행동에는 예를 들면 배우자가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멈출 때까지 옷을 입고 벗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는 마술적인 힘을 믿고 행동하는 경향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반복적 행동은 논리적인 측면이 아니므로 실로 신비함을 가지는 것이다. 도박중독자들이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재미삼아서 아니면 단순히 돈을 딸 요량으로 반복적으로 도박행위에 빠져들면서 익숙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수집적인 특성과 도박중독
도박중독자들은 수집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도박에서 많은 돈을 따도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더 많은 돈을 따서 모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집적인 특성은 물건을 무조건적으로 모으는 현상인데, 이는 물건 모으기 또는 물건 수집하기는 단순한 취미의 수집광 차원과는 비교된다. 수집광은 강박증의 흥미로운 특성으로서 이들은 사소한 물건도 못 버리고 모으는 증상의 사람들(hoarder)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찮은 물건을 모으고, 그것들을 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처럼 수집하려는, 즉 모으려는 특성이 도박에서 작용된다고 볼 수 있다.
강박성에서 수집의 특성은 버리지 못하고 덮어 놓고 모으려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물건을 모으려는 특성을 보이는 강박증은 길을 가다가도 어떤 물건을 보면 나중에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모으고 집에 보관한다. 심지어 이들은 신문도 맘대로 버리지 못하고 모으게 될 것이다. 강박증의 여자라면 바자회마다 다니면서 바자회가 끝날 때 즈음에 싼 의류들을 엄청나게 싸게 사다가 집에 가득 쌓아둘 것이다. 아마도 그 물건들은 집 입구에서부터 요란하게 쌓아져 있으므로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여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런 물건 모으기의 수집적인 특성은 정리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있다. 덮어놓고 많이 모아두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것이다. 이들의 수집적인 행동은 그 원인을 생각하자면 아마도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나지 못한 것이 수집적인 특성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 물건이 귀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는 아이들일수록 물건에 집착하는 것이 그 예이다. 여자들의 경우 다른 아이들의 인형을 탐내거나 예쁜 악세사리에 관심을 보이지만 더 깊이 알고 보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수집적인 특성은 심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채워지지 않은 허전한 마음을 물건으로 가득하게 채우려는 것이다. 무언가 가져야 하고 채워야 하는 빈 마음을 물건으로나마 채우려고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할 아이들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일수록 물건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아이들은 사랑으로 채워야할 마음에 물건으로나마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수집적인 특성을 가진 강박증도 이런 현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허전하고 빈 마음을 채우려는 노력은 물건을 가질수록, 아니 모을수록 더 허탈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마음은 마음으로 채우는 것이지 물건으로 채우지는 못하는 데도 말이다.
치료자는 도박중독자들을 이런 수집적인 특성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많은 돈을 모으려 하고 어느 정도 모았다고 생각해도 그것을 중단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다른 강박증상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되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강박적으로 손을 씻거나 확인하는 증상들은 다가올 일들을 깊이 생각하면 혼란스러워 하고 그들의 강박적 행위에 대해 걱정한다. 때로 손을 씻는 증상이라도 매일 손을 씻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확인하는 증상도 난로가 꺼져있는지 확인하려고 오래 동안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 반면에 전형적인 수집광은 모아두고자 하는 마음에 저항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수집적인 특성을 버리고 싶어 하는 수집광이라면 강박적 손 씻기와 확인하려는 증상들처럼 그런 행동을 못하게 했을 때와 똑같은 불안을 느낀다. 끊임없이 모으는 일을 계속함으로써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박중독자들의 수집적인 특징은 매우 심리적인 측면이 있다. 이들의 행동은 미래의 불안과 관련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불안은 비록 모아 둔 물건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바탕하고 있다. 그 물건을 필요로 할 때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증상들이 이런 수집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축적하는데 큰 가치를 부여한다. 몇몇 개인이 필요한 특별한 기사의 경우에 몇 십 년 동안 신문을 모으기도 한다. 심한 경우에 집의 모든 곳이 수집품으로 가득차서 다른 물건을 넣어둘 공간이 없을 정도다. 이는 도박중독자들이 돈을 많이 딴다 해도 그만 두지 못하는 행동의 기초인 것이다. 그들은 많은 돈을 땄어도 더 많은 돈을 따려고 한다. 실로 그들이 도박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완전주의를 지향하는 도박중독
완전주의는 강박증의 특징이다. 완전주의 또는 완벽성은 그들로 하여금 강박관념에 의한 고통의 소리를 도처에 울려 퍼지게 한다. 그들은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 앞에서 기진맥진하게 된다. 그들은 결코 완벽하게 할 수 없는 일들은 그들을 불안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모호한 내적 의무감 때문에 항상 모든 것을 좀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어깨 너머에서 그들의 정체를 밝히고, 그들이 잘못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촉구하는 익명의 눈초리를 의식한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나 이중적인 특성에 시달리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일이 잘못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그의 관심을 의식적인 것들에 돌려놓음으로써 나중에 그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변명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억양이나 음조까지 아주 완벽하게 말을 하려고 하면서 실제로 말을 할 때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잘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박중독자들은 잘 하려는 의지를 잊어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잘못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처음에 가졌던 걱정은 그것을 지배하고 잘 하려는 의지의 원천이 된다.
이런 원리가 도박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기왕 할 바에는 잘 해야 한다는 메아리를 듣고 있다. 내면의 말을 듣는 도박중독자들은 요구하는 것이 많은 완벽주의 앞에서 변변찮은 자리로까지 떨어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현상을 정신분석에서는 이들의 억압된 리비도가 그 자신들을 과장된 이미지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데, 그 이미지는 사람들이 그들을 거룩한 형상으로 가져다 놓은 것이고, 그들을 찬양하는 이들의 눈 속에서 그들이 보려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스스로 통합된 듯이 생각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완전주의, 또는 완벽주의를 버리지 못한다. 그들은 이런 완벽주의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인정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그들은 유난히 죄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도박을 통해서 죄의식을 해소하려 들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이러한 죄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도스도예프스키의 도박행위를 분석하면서 죄의식을 모면하려는 행위로 보았고, 더 나아가서는 도박행위를 즐기는 쾌락을 그 원천인 성적인 측면의 자위행위로 보았을 것이다.
도박행위에서 죄의식을 강조하는 태도는 도박중독자들에게 한편으로는 의식적인 동기를 강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숨기면서 폭군적이고 자기애적인 완벽주의에 의식적인 동기를 덧붙여 놓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도박행위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완전주의를 생각하면 신앙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악과의 싸움은 복음서가 말하는 명령의 말씀 아래 놓인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하다.”는 말씀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말씀은 완벽성에의 요청이 얼마나 현기증이 나도록 엄격한 것인지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복음서의 맥락에서 볼 때, 완전에 대한 사상은 주체가 그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도록 한다.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라는 모델은 자비로운 용서의 주체이고, 물질적인 교환의 상호성을 뛰어넘는 너그러움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죄의식을 강조하면서 완전해야 한다는 것을 상황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명령이라고 설교하고, 완전성을 강박적인 목표로 돌려놓는다. 자신의 욕망이나 쾌락과의 내적인 투쟁을 수행하면서 완전해지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도박중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완전성의 요청 앞에서 그들은 더욱 완전성을 모색하는 완전주의자가 되어 간다. 그때 도박중독자들은 서로에게 비교의 대상이 되고, 그들이 일치되려고 하는 도박의 대가라는 존재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력 때문에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더욱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도박중독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루면서 완전을 추구하며,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불평하면서 완전에 대한 환상의 포로가 되고 만다. 이는 서로의 사이에 있는 장벽을 부숴야 하는 동기에 의해서 무의식적인 강박성을 활성화시키는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4. 완전성의 함정과 도박중독
완전성은 도박에서는 하나의 함정이다. 그 함정에 빠지면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구원해 주어야 한다. 도박중독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정신분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완전성이라는 함정 밑에 숨은 것들이 무엇이고, 사람들이 그 환상이라는 감옥을 뛰어넘으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가르쳐 준다. 사실 완벽하게 되려는 생각은 다른 사람의 욕망에 응답하고, 자기에게서 모든 결점을 없애려는 욕망 때문에 두 배로 늘어난다.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이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우위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은 서로 응답하고 유지되어 나간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결점이 없기를 바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욕망을 전가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주체되는 자신과 주체의 욕망을 구분해야 한다. 욕망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과정에서 생기는 것들 속에 겹겹으로 층위를 이루고 비교적 의식적 자아이상의 표면 아래, 무의식의 가장 깊은 표상 속에 뿌리박고 있다. 최고나 최상을 원하는 자아이상(super ego)의 형성에는 언제나 완전성에 대한 생각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과정에서 신경증적인 것은 관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이들의 삶을 역동적으로 만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도박하는 문화의 질서 속에 들어가 그들에게 가능성의 세계가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최고 최상이 되려는 이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인가 계획할 수 있고, 단순히 도박의 자리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는 존재가 되고, 자기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아이상이 정신에너지가 완전에의 이상이 되는 순간, 그들이 갖는 이상은 불행하게도 그들을 보장되는 미래로 이끄는 기둥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도박중독자들은 그들이 갖는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에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맞추려고 한다. 그들이 갖는 이상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의 돈을 따서 남들이 우러러 보는 도박의 실력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생각은 다른 사람과 잠깐 비교만 해 봐도 그런 이상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단 하나의 문장에 남는 것 하나 없이 모두 말하려는 작가의 허황된 욕망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욕망, 모든 근심을 이기려는 욕망,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욕망, 아무것도 뒤섞이지 않고 순해지려는 욕망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자기 자신과 완전히 하나가 된 충만한 상태에 대한 욕망일 뿐이다. 그때 그들은 그들 자신과 내적으로 아무 거리도 없게 되며,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근친상간에서처럼 완전히 하나가 된 모습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완벽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모든 욕망을 없애 버리려는 깊은 무의식적 욕망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욕망은 결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박중독들에게 끊임없이 결핍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본능이다. 본능은 욕망의 꺼지지 않는 원천이며, 모든 기대에 대한 신비한 내적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갖는 완전성에 대한 이상(理想)에는 때때로 이상한 느낌을 들게 하는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내면의 삶에서 벗어난 인간의 환상적인 표상이 감춰져 있다. 거기에서 도박중독자들은 신앙담론이 가진 신경증적인 본성과 신경증의 결과를 볼 수 있다. 신앙담론은 인간의 본능을 죄로 규정하고, 본능을 거부하며, 완전성과 자제를 따르는 이야기를 중요한 주제로 전해 준다.
이런 신앙담론은 사람들에게서 여간해서는 없어지지 않는 상상계적인 자기애를 활성화시키고 조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더 함정에 깊이 빠뜨린다. 결국 정신분석학의 라깡이 보여 주었듯이, 최초의 자아이상은 ‘거울 단계’ 때 형성되는데, 거울 단계란 아이들이 거울이나 그와 비슷한 이들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의 몸이 전체상(全體像)이라는 것을 깨닫고 탄성을 지르며 알게 되는 단계다. 그때 그것들은 어머니의 칭찬하는 눈초리 아래서 이루어진다. 도박중독자들은 큰 환희에 잠길 때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의 더 깊은 곳에서 항상 최초의 이 거울 단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도박중독자들은 자신들을 칭찬하는 환희가 있는 곳에 다시 가려고까지 한다. 그 옛날에 듣지 못한, 아니면 한 번이나 들었음직한 칭찬을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런 언어행위 속에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나’라는 말은 이제 그들이 스스로를 그들 자신으로 파악하는 관념 행위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의문으로 된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정체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미지에 맞는 모습을 동경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가치 있는 담화를 할 때와 모델로 제시할 때 그 이미지를 사용한다. 도박중독자들은 이렇게 그의 자아이상을 따라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데, 이 모든 것은 자기애를 구성하고 있는 요인이다. 그들의 인격의 주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그 자신들의 미래 속에서 그들 자신으로 태어난 존재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완전성이라는 이상이 자기애에 접목되면, 도박중독자들은 병적이고 환상적인 자기애 속에 갇히고 만다. 그것이 환상적인 것은 실제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고, 병적인 것은 인격의 주체를 역설적인 강압 속에 가두고,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중심으로 놓기 때문이다.
5. 도박중독의 완전주의와 신앙의 완벽주의
우리는 앞에서 도박중독이 완전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을 기술하였다. 완전주의 또는 완벽주의가 신앙에는 없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신앙은 그런 결여된 인격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앙에도 이런 완벽주의가 상당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여기에서 특이한 사실은 도박행위를 신봉하듯 받드는 도박자들이라면 그것은 그대로 신앙적인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도박행위가 때로는 신앙적인 행위로 둔갑될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강박증은 다른 장애와는 달리 병식(病識)을 갖고 있다. 병식이란 스스로 병에 걸린지를 아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강박증은 자기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기에 치료를 받고자 한다. 이런 특징은 아마도 그들의 완전성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강박증 환자 뿐 아니라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은 완전성에 결부되어 있는 영적인 함정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였다. 임상심리학 역시 그 나름대로 자기애는 종교적 자만심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완전성에 도달하려는 이상은 사람들이 정신치료 과정에서 그 실체를 깨닫는다면 당황하게 될지도 모르는 모순에 찬 강요를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 재미라고는 거의 없다고 느끼고 있으며, 또한 더 원활하게 자신의 감정표현을 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완벽을 이루지 못하는 갈등에 빠진다. 그들은 완벽주의자들이 되고자 하지만 오히려 잘못되고 불완전에 빠지는 미궁(迷宮, labyrinth)을 경험하게 된다. 조금은 먼 이야기일 수 있지만 신앙에서도 이런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리새주의’라는 또 다른 미궁이 있다는 것으로 복음서에는 그것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로 설명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런 매혹적인 메시지를 읽고 자기 정죄를 하면서도 완전해지려고 애쓰는 것은 너무 오만하게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되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바리새인보다 더 완전하게 되려는 세리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완전성에 대한 추구는 어쩌면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과제이며 동시에 모순에 가득한 과제인 듯하다. 이런 완벽주의와 관련하여 도박중독자들은 고통을 받도록 선고받은 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알게 모르게 추구하는 완벽주의는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에 괴로워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완전성을 얻지 못한 불만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강박증은 유달리 책임성이 강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거절당했을 때 자신에게 그만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책임성도 사실은 완벽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완벽성은 교회에서 신앙이 철저한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에 철저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선이 가득한 바리새인을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를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로 보면서, 그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되어 간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그들이 형식의 모순으로 가득 찬 스스로를 신앙으로만 강요하는 순환의 고리를 뛰어넘는 것밖에 없을지 모른다. 이 강요가 만일 신앙적인 명령에서 주어진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조금 벗어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클로소프스키(Klossowski)는 니체에 대해서 언급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니체가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틀림없이 니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니체의 의식에서 책임적인 자아의 정체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 사라졌다는 말인데, 그의 의식은 정체성이 사라져 혼돈 속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하려는 도박중독자들은 언제나 완전성을 추구할 때 빠지는 악순환의 덫에 걸려서 넘어진다.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거기에 빠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는 물론 하나님이 보기에도 올바른 듯한 정체성을 얻으려는 욕망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그들의 신앙은 그들을 미궁 속과 같은 질곡(桎梏)에서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모순에 가득 찬 신앙의 메시지가 종종 그들의 언어를 헤쳐 놓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반역자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 그 사실을 조용히 생각해 본다면, 그들은 그 사막을 건너갈 수 있는데 신앙은 그것이 어느 정도 건강한 정신 상태 위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병리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경증적인 죄의식의 경우와 반대 방향에서 무의식의 문제들이 의식에 옮겨져 종교적 갈등이 의식적인 수준에서 펼쳐진다면,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심리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종교적인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치료에서 도박중독자들의 완벽성과 관련하여 치료자는 그들의 감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가진 사고보다는 감정적 느낌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감정적인 점은 그들이 사고에 이끌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면에서 작용하는 감정에 휘둘리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 속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신앙적인 측면과 비교하면 신앙적 완벽주의를 들 수 있다. 신앙적 완벽주의자는 그가 본래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기희생과 ‘헌신적인’ 사랑의 이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자기애적인 행동은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염려를 많이 하면서 속죄하기도 한다. 사실 그는 신경증적인 고통을 당하면서 그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몹시 의심하고, 불안 때문에 위축되며, 다른 사람들의 지적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불완전성의 상처를 격화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완전성을 논한다면 신앙의 순결주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그것을 ‘환상적인 순결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런 순결주의에서 발견되는 해학적인 특성도 있다. 임상경험은 천사에 관한 관념이 잘 보존되면서 얼마나 깊이 완전성의 은밀한 문장(紋章)에 남아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천사는 완전성이라는 이상의 공상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기 때문인데, 이는 본능을 가진 육체와 영의 혼합이 아니기 때문에 순수하다고 볼 수 있다.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천사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그 자신만의 존재를 나타낸다. 따라서 천사는 몸을 가르는 성(性)이 없는 존재이기에 분할되지 않은 형상으로서 신화 속에 나오는 안드로진(androgyne)보다 더 전체적인 존재다.
더욱이 천사는 무의식의 비논리성 때문에 야만적인 성욕을 갖기도 하며, 바람처럼 자유롭고 격류처럼 강력하다고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다만 천사는 그 어느 장소나 그 어떤 관계에도 매어 있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천사의 상징이 가진 역설적인 의미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완전성에 대한 신앙적인 자기애의 기반을 이루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우리는 신앙적 이유에 대한 독신(瀆神), 특히 집단적 신경증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독신이 가진 모호한 특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완전성의 원리, 즉 순결주의를 도박중독자들과 연계시켜 보면 어떨까? 그러면 많은 폭소를 자아내고만 말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몸이라는 특성과 맞닿아 있는 점이 있고 그것을 계속해서 강요하는 정신적인 특성이 작용한다는 점에서다. 도박중독자들은 여기서 몸의 예속 상태로부터 주인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육체로부터 거의 자유롭고, 초인적인 통합을 이룬 듯 하고, 놀라운 능력을 부여받은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도박을 할 때는 거의 신들린 것처럼 피곤을 모르고 날밤을 세운다.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거나 쉽게 피곤을 느끼지만 도박에는 신명이 나는 신비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몸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모호한 힘도 빼앗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거세된 것이나 다름 없는 꼴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몸은 거의 완벽을 추구하는 순결한 주체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순결한지의 문제만 다를 뿐이다. 이는 치료자가 그렇게 강력한 완벽성을 추구하는 심리가 도박중독자들에게 도사리고 있는 점을 간파해야 하는 이유다.
6. 강박증의 표시와 도박행동의 이해
강박증의 전형적인 증상은 그가 보이는 두 가지 모습에서 타난다. 이는 성경에서 서로 반대되는 명령에 대한 계속적인 반추와 그것을 종교적으로 수행하면서 나타나는 경직된 태도는 그가 붕괴된 현실의 일부분을 간직한 기표(significant)를 꽉 잡으려는 방식의 하나다. 어떤 사람이 그런 경우에서의 강박관념을 ‘정신분열을 덮고 있는 이불’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진단이다. 그 증상들이 신경증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신경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그것을 신경증 치료처럼 생각하고 치료한다면, 실패하고 만다. 때때로 사람들이 강박신경증을 잘 낫지 않는 끈질긴 질병이라고 말한다면 그 때문이다. 정신치료가 증상에만 초점을 맞춰서 행해질 때, 망상은 더 심해지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을 덮고 있는 이불’은 여기에서 환자가 그 증상을 통해서 현실의 일부분을 복구하고, 현실감을 완전히 잃지 않도록 구원하려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강박관념의 기능은 신경증에서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신경증의 경우 증상은 억압된 본능을 계속해서 억누르려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강박행동은 이차적인 과정을 사용함으로써 그 충동을 통제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언어의 질서에 속해 있다. 사람들은 감정을 그것보다 덜 위험해 보이는 표상에 환유적으로 옮겨놓거나, 증상을 세세한 것들로 펼쳐 놓거나, 삶을 의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약한 강박관념의 경우 똑같은 과정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불안한 다른 위험에 대해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현실감을 상실하여 전적으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우리의 환자가 쓸데없이 같은 생각을 자꾸 했던 것도 사실은 사라져 버리려는 세계의 고삐를 다시 붙들고 지키려는 안간힘이었다. 그는 가낭, 자비, 순종이라는 서로 분리된 단어들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두 의미 있는 실존을 살게 하는 기호(signe)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에게 아무 실제적인 의미도 없는 기호였다. 그것들은 그에게 현실세계와 아무 연관도 맺지 못하는 불가능한 명령들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것들은 처음의 거부를 반복했고, 그가 참을 수 없는 공포를 느꼈던 신체적인 실재와의 간극(間隙)을 계속해서 넓혀 갔다. 그러나 그것들은 계속해서 추상적인 기호로 작용하면서 그를 그것보다 더 위협적인 불안으로부터 방어하게 하였다. 즉 그의 자아가 현실에서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슬프고 자아중심적인 종교적인 담화는 우스꽝스러운 한 편의 드라마의 모습으로 그의 존재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서 그의 종교적 실존의 의미를 건드리면서 전개되었다. 그는 절대적으로 순수해야겠다는 강박적인 생각과 외설스러운 것들이 드러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속에서 지냈던 것이다. 신경증적인 질문들은 이 틈 사이를 뚫고 들어와서 그에게 물음을 던지게 하였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는 이 질문에 올바르게 답변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부터 이 질문에 시달려서 결국 순수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기표와 저주받은 그의 육체가 날카롭게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7. 강박증과 다른 정신병적 증상의 비교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른 종(種)으로의 이행’이라는 은유로 말한 적이 있듯이, 여기에서도 다른 경우에 쓰인 말이 쓰일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전술한 것과는 다른 의미일 테지만, 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도무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무의미다. 악은 평범한 인간의 얼굴에 느닷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문에 보이는 실재의 숨겨진 얼굴처럼 나타나고, 모든 몸과 대상들 속에 들어가 이 세상의 비열한 본체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들은 은유의 능력과 가치를 잃어버린다. 몸은 해체되고, 언어는 언어 속에 처음부터 내재해 있던 충성스럽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전술한 그는 정신분열이 아니었고, 의사소통을 하는 세계와 다시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던 세계를 뒤흔들고, 그에게 자살까지 생각하게 했던 경험이 어떤 흔적을 남겨 놓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편집증적인 정신분열증의 경우, 이렇게 일찍부터 시작된 망상적인 계시는 환자들을 구체적인 현실과 의미를 가진 언어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시켜 떨어뜨려 놓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종교적인 내용을 가진 강박신경증 환자들에게 종교가 고치기 힘든 강박관념으로 변환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생긴 과정이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가 하는 종교적 담화를 들어 보면, 그에게서 종교와 강박관념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 기표들은 신체적인 현실을 의미 있는 실존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를 야단치는 저 세계의 메시지만 듣게 된다. 그 메시지들은 그런 전절 때문에 궤도에서 벗어나, 결국에는 하나의 단순한 기호로 변하여 무한하게 깜박거리기는 하지만, 그들을 현실과 아무 접촉도 하지 못하게 하고 순수함 속으로 던져 버리고 만다.
이상에서 우리는 강박증의 행동적 특징과 관련하여 도박중독의 행동을 고찰하였다. 이런 반복성은 생각과 행동을 완전히 분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생각은 행동을 유발시키고 다시 그 행동은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켜 악순환적인 반복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히 짚어내야 한다. 그것은 모든 강박사고나 행동에는 불합리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이나 행동의 반복성이 불합리하기에 더욱 불안해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어려운 점은 강박증 환자들이 이런 강박사고의 불합리성을 인식한다 해도 어떻게 처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사고의 불합리성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질없는 일이거나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 사고를 중단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문제이자 고민이라는 점이 문제로 대두된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강박증 환자들은 그들의 강박사고들이 실제적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들이 증상으로 고통을 받지 않는 동안에는, 그들은 자신이 무일푼이 되거나, 타이프에 실수한다고 상사에게서 모욕을 받거나, 손을 다섯 번 씻지 않는다고 병에 걸리지는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일단 걱정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그 가능성을 걱정하며, 그러한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불합리성은 매우 심리학적인 성격에 근거한다. 사고의 중심이 다분히 미래적인데 치중되어서 그와 관련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기(豫期)불안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도무지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지 못하는데서 일어나는 반복적인 사고이자 그 순환의 원리와도 같다. 순환의 원리란 그 특성상 돌고 도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는 강력한 힘으로만 통제될 수 있는 특성인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행동은 바로 일종의 생각의 순환이라는 틀에 지배당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순환의 원리는 성격적으로 미래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경증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 자신도 모르게 자주 생각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신경증적인 현상은 그들의 불안감, 더 나아가서는 공포감에 근거해 있다. 그런 공포감이 그들의 심리를 지배적으로 압도하여 생각의 반복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공포감은 과거의 경험과 일정 부분 관련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마음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는 식이다. 과거에 경험한 좋지 않은 일들이 뇌리에 인상적으로 각인되어 다시 그런 일을 경험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불쾌한 경험을 다시 할까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분명히 실제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에서만 존재하는데도, 그들의 공포는 실제 사실에 근거한다고 믿는 환자들도 있다. 이런 현상은 대개 병균의 오염과 관련될 때 더욱 그렇다. 이들이 백혈병 환자와 접촉한 일이 있었다면 아마도 백혈병을 그들의 가족들에게 옮기지 않을까하는 강박사고를 갖는다. 그러다가 그들은 백혈병균에 감염되었다고 믿기도 할 것이다. 이들이 치과의사에게 진료를 받는다면 치과의사에게 균을 옮겼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하여 치과의사에게 진료받는 것을 그만 두게 될 것이다. 그 치과의사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치명적인 백혈병을 옮길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하기 때문이다.
8. 결론: 강박증, 신앙의 관점에서도 생각을
오늘날 강박증 환자는 신앙인 중에 흔하다면 놀랄 것이다. 요즈음 상담치료에서는 우울증 환자보다는 강박증 환자들이 더 많이 치료받고 있다. 특이한 것은 더욱 신앙적이 되려는 사람일수록 강박증에 노출되어있다는 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신앙적인 특성에서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더욱 온전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거기에서 헤어나려고 더욱 완전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육체를 가진 욕망이 유혹의 손길로 다가와서 그나마 가졌던 신앙을 흔들어 놓는다. 이 정도면 상당히 신앙에 이르렀다고 하는 순간에 갑자기 아무런 신앙이 없는 존재로 확인되어 다시 좌절하게 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욕망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더욱 신앙으로 무장하려는 노력이 강박증으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생각하면 처음부터 결핍된 존재가 조금의 온전함을 지향하려다 오히려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좌절하는 가련한 행동을 우리는 강박신경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교인들은 갈수록 죄의 짐, 인생의 짐은 무거워져 가기에 편안하지 않고 힘들어 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목회자는 이쯤에서 양심적으로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교인들의 무거운 짐을 벗게 해주어 날아갈 듯하게 시원하게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바로 강박증을 신앙의 관점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