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박사의 ‘중독탈출’ (57)-도박 중독[24] 신앙적 치료
도박중독은 최후 방법으로 신앙적으로 치료를 시도할 수 있다. 신앙적 치료는 과학적 방법은 아니지만 인간의 본성에서 신앙을 추구하는 특성 때문에 오래도록 자리해 왔다. 이런 신앙의 위력은 과학이 발달한 오늘에서도 여전히 실효성이 있다. 실제로 신앙적 방법은 도박중독만 아니라 치료의 한계를 드러내는 곳마다 적용됐을 뿐 아니라, 각종 신앙 단체들이 치료와 계도에 참여하고 있다.
1. 도박중독과 신앙치료의 필요성
신앙은 인간의 심리를 동기화하고 조절하는데 특이한 힘을 갖는다. 자신이 가늠할 수 없는 심리를 신앙으로 제압하거나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앙적 방법은 과학을 추구하는 정신치료에서도 인정된다. 칼 융(C. G. Jung)도 정신치료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종교적 방법, 즉 신앙치료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융은 자신을 ‘영혼의 의사’로 자처하며 병든 사람을 고치는 긴급하고 실제적인 필요에 따라 신앙의 중요성을 인식, 그 현상을 관찰하고 그들을 고치는 신앙적 태도를 살폈다. 이에 앞서 신앙적 방법이 도박중독 치료에 적용되려면 특이성이나 적절성이 정리돼야 한다.
첫번째로 신앙의 뿌리깊은 역사다. 도박중독자 치료에는 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점을 치료자가 중독자에게 이해시키려면 여러 요인들이 필요하다. 단도박 모임의 12단계 접근법 전통을 보면 뿌리에 신앙이 있으며, 신앙은 단도박 모임(GA)을 비롯하여 다른 중독장애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치료자의 관점에서 신앙은 자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의 언어적 체계(language system)와 교류를 원활하게 만든다. 신앙은 중독자의 세계관을 서로 관계 맺게하는 수단이자, 치유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다. 신앙은 어떤 말을 바뀐 의미로 사용해 그것의 상징 의미나 특징과 매우 유사한 개념의 내용을 명확히 하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만일 신앙이라는 체계를 무시한다면 중독자의 의미 세계에 접근하기 어려우며, 나아가 그 강력한 수단을 치료에 활용하지 못하고 공감적인 이해도 어렵게 된다.
두번째로 신앙의 역할이다. 최근 임상 현장에서는 치료에서 지켜야 할 요구사항과 지침들이 증가하면서 치료의 다양성(diversity)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는 치료자가 중독자의 다양성이 치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염두에 둬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신앙은 특성상 민족이나 문화에 따라 각기 다양성이 존재하므로 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기 쉽지 않다. 신앙은 종교의 특성에 따라, 민족의 역사와 다문화적인 주제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정신장애 진단요람도 다양성에 대해 여러 관점을 제시하고, 특히 1994년 이후에는 질병을 진단할 때 다양성이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진단의 다양성에는 특정 문화집단 내 여러 장애군의 유병률과 증상, 중독자와 치료자 간의 이해 차이가 정확한 증상의 이해와 진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문화적 차이가 얼마만큼이나 치료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등이 중요시된다. 정신장애 진단요람은 임상 전문가가 평가할 때 이러한 유의사항에 주목하고 조심하며 잠재적 영향력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치료자의 윤리규범과 아울러 정신장애 진단요람에서 신앙적 다양성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치료자는 중독자의 신앙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주목하고 기록하지 못하면 지켜야 할 기준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로 신앙의 자기조절과 안녕감(well-beling)과의 연관성이다. 신앙은 정신에서 자기조절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개인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통제하는 자기조절은 심리적 기능에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자기조절은 학업 및 직업 성취도, 부부관계의 안정성, 수명, 안녕감, 그리고 신체적 건강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모두 중독으로부터 회복되고 있거나 회복됐다는 중요한 지표들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정서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비록 신앙이 성격적 문제나 도덕적 문제를 다루는 데 필수적이진 않더라도, 이 두 가지는 통합적으로 관련됐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이나 선행을 향한 동기를 이끌어낼 때 다른 무엇보다 우선할 수 있는 도덕적 행동을 획득하도록 촉진하는 신앙적 관점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신앙적인 방법은 치료에서 효용성이 입증되고 있음에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치료 형편상 중독자의 종교나 신앙을 파악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러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표상과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치료자는 중독자와 종교가 같을 수도 있고, 종교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을 수도 있다. 물론 치료자들도 서로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이들의 신앙적 관점이 일정한 치료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치료자는 일반 사람보다는 자신을 불가지론자, 무신론자, 혹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중독자 가족들이 믿던 종교를 치료자 자신은 믿지 않는 경향이 일반인들보다 강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로 베르긴(Bergin)은 치료자가 중독자에게 공감이나 수용을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어느 심리학자가 이름 붙인 것처럼, 중독자와 치료자 간 ‘신앙심의 간격’이 생겨나기도 한다고 했다.
넷째로 신앙이 제기하는 약속이나 희망의 필요성이다. 신앙은 치료에서 중독자에게 희망을 제시한다. 신앙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새롭게 변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잘못된 신앙으로 빠질 수 있는 함정이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약속이나, 희망을 향해 나갈 적절한 방향에 대한 지침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만큼 신앙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전세계에서 미국만 유일하게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 1,730개의 ‘종교단체' 목록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종교단체란 종파, 교회 혹은 분파를 말하지만 여기에도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와 같은 다른 나라의 다른 종교나 미국 이외의 소수 뉴에이지 집단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만큼 모든 종파의 다문화적 쟁점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치료에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주제를 피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논쟁에 의하면 치료자는 교회 목사나 정신적 지도자, 종교적 조언자 역할을 하도록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적 직업윤리에 의해 치료자는 ‘해로운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교적 혹은 신앙적 중재를 훈련받지 않은 치료자에게 받으면 탈이 날 수도 있다. 치료자가 이러한 실수를 저질러 월권의 오류를 범하기보다, 애초부터 개입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알콜중독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임상전문가 바바라 맥크래디(Barbara McCrady)는 이에 관한 설득력 있는 사례를 들고 있다. 그는 치료자가 중독자의 심리 구조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를 논의한 바 있다. 중독자에게 어떤 신앙이 적합한지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앙이 필요하지 않다거나 무용성을 지적한 것은 아니다. 중독자와 치료자의 신앙인가, 아니면 제3의 ‘좀 더 적응적인’ 신앙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다만 그녀는 치료에서 성급한 신앙적 개입은 침묵보다 더 큰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2. 도박중독과 신앙의 능력
도박중독에서 신앙의 능력은 위력을 발휘한다. 각종 중독에서 신앙적 방법으로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신앙의 능력은 신앙이 갖는 힘이다. 그렇다면 먼저 신앙의 장점과 특성을 알아야 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간단하게는 신념과 실제(practices)라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궁극적 실재를 경외하는 조직화된 구조로 볼 수 있다. 자신을 약한 존재로 인식하고 강한 존재를 의지하려는 특성이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동인이다. 그리고 이런 신앙에서는 궁극적 실재가 또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고 보는 반면, 공산주의와 그 밖의 어떤 ‘-주의’에서는 궁극적 실재가 이 세계, 즉 현세에 존재한다고 보는 차이가 있다.
신앙은 개인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다. 밀러와 트레슨(Miller & Thoresen)이 말한 것처럼 신앙은 개인에게 일정한 행동을 유발하는 성격과도 같다. 지금까지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결성된 자조(self-helf) 모임이나 그 외 여러 분야의 유명한 대중적 저술가들이 신앙에서 종교를 분리하기 위해 많이 노력해 왔다. 이를 강조하게 된 전문가들의 동기는 진지하고 심각했다. 특히 이들은 많은 중독자들이 종교를 ‘해로운(toxic) 신념’으로 여기는 가정(家庭)에서 성장했음을 알아냈다. 그래서 어떤 중독자들은 신앙에 대한 말을 꺼내기만 해도 거부감을 일으키며 도망치기 때문에,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때로 위험을 두 배로 증가시켰다고 술회한다. 경험적·종교적 전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밑바닥부터 신앙적 탐구를 시작해야 하는 불필요한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종교가 신앙적 경험을 사유화하는데, 이는 신앙 공동체의 사회적 유대로부터 얻는 장점들을 놓치게 만들 수도 있는 점이다. 이는 신앙과 종교에 대해서 보다 통합적인 접근을 시도해야 하는 이유다.
엄밀히 말하면 종교와 신앙은 다르다. 만약 궁극적 실재가 또다른 세계를 가정(假定)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종교적 단체의 전통을 따른다면 그들의 신앙은 종교적이다. 난관은 이 세계, 현세를 어떤 체계로 나타내 신앙이라 불러야 하는지의 문제다. 이는 그 체계를 나타내기가 애매한 점 때문인데, 어떤 사람은 이런 체계를 신앙이라 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임상전문가 입장에서 신앙이 중독자에게 어떻게 기능하는지 확인이 필요할 뿐이다. 신앙이 과연 성장을 위한 힘이 되는가?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충동을 초월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가? 여기에 긍정적이라면 신앙에는 잠재력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신앙은 궁극적 실재를 이해하고 관계 맺기 위한 다차원적 인지, 정서, 경험, 동기, 그리고 행동의 집합체다. 그리고 궁극적 실재에는 현세라는 ‘이 세계’뿐 아니라 ‘다른 세계’가 포함돼 있다. 신앙은 조직화된 종교의 맥락 안에 존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조직화된 종교에 의탁한 사람은 어느 정도 신앙적 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심리학에서 신앙 및 종교와 관련된 개념은 영적 초월성(spiritual transcendence)이다. 피드몬트(Piedmont)는 영적 초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적 초월성이란 더 크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기 위해 지금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재 감각을 벗어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일컫는다. 이러한 초월적 시각은 한 인간이 다양한 형상과 욕망의 이면에 있는 기본적인 통일성을 보는 것이며 그 무엇으로도, 심지어 죽음으로도 갈라낼 수 없는 타인과의 유대를 발견하는 것이다.” 피드몬트는 자신이 개발한 영적 초월성 척도에 세 가지 구성개념을 포함시켰는데, 이 세 가지는 바로 보편성(univerality), 기도자의 의무 이행(prayer fulfillment), 그리고 유대감(connectedness)이다. 영적 초월성 개념은 임상적 타당성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 안에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행동하려는 동기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도박 모임의 12단계 프로그램이 바로 중독에서 회복되는 데 중요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자신을 뛰어넘는 용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그러면 영적 체계는 즉각적 욕구의 갈망과 만족을 뛰어넘어 사람들로 하여금 궁극적 실재를 지향하게 하며, 이를 통해 충동성을 감소시킴을 알 수 있다.
3. 도박중독과 신앙치료의 적합성
종교심리학은 종교와 신앙을 추구하는 보편적 인간 심성을 이해하기 위해 경험적 방법을 개발하고 진전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종교에 대한 통일된 정의는 없으며 합의된 모델 역시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종교와 신앙이 인지적, 정서적, 실험적, 동기적, 행동적 특성을 포함하는 다차원적 구성 개념이라는 데는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는 특히 종교와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현상학적 모델을 참조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또는 “나타난 그대로”를 중요시하는 현상학적 모델은 특정 종교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치료의 다양성이 요구되는 치료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현상학적 모델에서는 모든 종교와 신앙이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인 신성(神性)에 대한 관점을 갖고 있다고 전제한다. 궁극적 실재는 의미(meaning)의 문제 혹은 악(evil)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적 전통에서 성장하고 발전했다. 의미는 그 존재가 부재할 때만 문제가 되지만 궁극적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종교마다 약간씩 다른 방법을 취한다. 현상학적 모델에서는 모든 종교의 궁극적 실재가 동일하거나 모든 종교에 공통된 탐구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의 길이 다를지라도 그것들은 서로 연관돼 있으며, 때로는 신성을 추구하는 각자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치료자에게 현상학적 모델을 일상적으로 탐색하고 활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에 앞서 종교와 신앙을 정의하는 것이 요구되는 이유다. 여기서는 신앙적 존재가 되는 6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1) 신성한 의식(예배)
의식(儀式, ritual)은 종교에서 가장 일차적인 특성이다.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의식이나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과 같다. 의식이나 예식은 신(神)에게 드리는 경건한 태도이자 경배의 행동이다. 이런 의식에 참여하는 한 가지만으로도 매우 신앙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종교에서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의미한다. 종교에서는 궁극적 실재를 지향하기 위해 의례화된 여러 상징체계를 사용한다. 이에 대하여 캐논(Cann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종교적 의식에는 종교가 추구하는 또 다른 세계(other world),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발견되는 실재(reality)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재와 접촉하고 인식하며, 상호 작용하고 참여하는 길이 표상돼 있다.” 이러한 상징체계에는 예술, 신성한 예배의식, 건축물, 의상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의식에서는 이러한 상징체계를 활용하여 신과의 교통(交通)을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2) 올바른 행위의 규범
‘종교는 인생의 마지막 관문’이라는 말이 있다. 종교(宗敎)는 가장 높은 최고의 가르침을 의미하므로 모든 면에서 가장 바림직한 행위나 규범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종교에는 대개 전형적인 행위 규범이 포함된다. 그러나 다른 세계를 지향할 때 신성한 의식처럼 지켜야 할 행위와는 달리, 올바른 행위의 규범은 근본적 존재의 요구에 따라 이 세계, 즉 현세에 맞춰져 있다. 예를 들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아니면 반대쪽 뺨까지 때리도록 대 주어야 할까? 이혼이나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가 혹은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모든 종교에서는 각기 최선의 행위 규범이 있다는 점에서 캐논은 “사물이 궁극적으로 나아가고 그렇게 되어야 할 바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종교나 신앙은 일상적인 것도 무관하지는 않지만 보다 높은 곳에 의미를 두고 있다. 이런 태도는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할 때는 사회질서를 지키거나 가정의 평온을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라 존재의 궁극적 원리에 따라 자신을 순응시켜 나가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3) 헌신(봉헌)
신앙적인 사람이 되고 나면 자신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이는 신에게 은혜를 입은 자로 그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을 가장 지극한 형태로 나타내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귀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다 신앙을 갖게 되면서 신의 은총으로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은 결과로 상응하는 보답을 하려는 마음의 발로다. 헌신이나 봉헌은 정서적 요소가 강조된다. 헌신(獻身)이나 봉헌(奉獻)은 캐논에 의하면 궁극적 실재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종교학자 오토(Otto)는 인간은 궁극적 실재에 경외심을 느낄 수도, 의지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헌신과 봉헌을 통해 인간은 궁극적 실재에 대해 신뢰와 항복의 경험을 열망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신에게 낮춰 자신을 드리려는 태도는 순수한 마음을 넘어 통제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실재적 목적 때문에 올바른 행위의 신앙심은 치료적 맥랙 속에 신앙을 자리매김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본다.
4) 초월적 체험
초월적 체험이란 종교에서 체험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이는 신의 존재를 체험하고 신에 관한 어떤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특성이다. 이런 특성은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것이 바탕이 된다. 그런 점에서 초자연적 구도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궁극적 실재를 무의식보다 직접적 의식을 통해 경험하고자 한다. 궁극적 실재를 직접 경험하거나 하나가 되려는 사람들은 특별한 방법과 명상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신과 대화하는 형태의 기도가 중요시된다. 기도는 신과의 대화이자 영혼의 호흡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세상의 욕심을 제어하기 위한 금욕 생활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물질과 자기중심적 욕망에 대한 애착이 신과의 합일을 방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경험한 사람들이 괄목할 만한 자기조절 전략을 생생한 역사적 기록으로 남겼으며, 이러한 전략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하지만 이는 단계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도박중독자가 회복 초기 단계에서 이러한 신앙적 차원에 관심을 갖고 적용하는 데 상당한 노력이 요구되는 이유다.
5) 주술적 중재
주술적 중재는 신과 교통하는데 매개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신과 인간 사이에 매개하는 사람이 있어 이를 연결해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신교의 목사나 가톨릭의 사제도 해당하지만, 대표적으로 샤먼을 들 수 있다. 샤먼적 중재에서는 인간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다른 세계의 독특한 힘과 접촉하고자 한다. 이런 중재는 서구 문화의 시각에서 볼 때 종교적 체험 중 매우 특이한 것이다. 주술은 인간이 살면서 겪게 되는 병환, 빈곤, 심각한 외상이나 상실 등 극심한 어려움에 압도당할 때 사용되는 편이다. 이때 종교가는 신앙이 약한 신도들에게 종교적 행위를 통해 신앙심을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 심령적 위안을 이룩할 수 있다. 한국의 문화 속에 존재하는 두 가지 친숙한 실례에서는 종교적 치유나 무속의 굿판을 들 수 있다. 이때 치료자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신체적, 정서적 고통을 없애기 위해 궁극적 실재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 이와 유사한 일이 고등 종교로 인정되는 기독교나 불교 외에도 하등 종교로 인정되는 굿판의 경우에도 일어난다. 무당이 고통의 원인에 의인화된 귀신이나 악마 등의 악한 존재가 있다고 믿으며, 이를 떨쳐내기 위해 궁극적 실재의 힘을 빌리는 형태를 취한다. 귀신의 힘을 입은 사람이 귀신의 존재를 쫓아낸다는 것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더 큰 귀신의 힘을 빌어서 가능하다는 점에서 옳고 그름을 넘어 중재의 중요성을 말한다.
6) 이성적 탐구
종교는 특성상 자연적인 측면도 있지만 때로는 인위적인 측면도 있다. 자신이 신을 믿고자 하지 않아도 어떤 순간에 저절로 믿게 된 경우도 있고, 스스로 무던히 노력해 신의 존재를 체험해 믿는 경우도 있다. 이는 초월적 존재를 체험하는 종교의 방법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모든 종교나 신앙적 체계에서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생각하며, 여기에 이르는 전술한 다섯 가지 방법을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적 노력이 요구된다. 종교에 대해 신에 해당하는 교육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이성적인 탐구라 말한다. 이성적 탐구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궁극적 실재의 존재와 본성, 형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인지적 방법을 사용한다. 종교학에서는 이러한 인지적 방법을 신학(theology)이나 다른 체계적 형태의 이성으로 분류했다. 이보다 덜 형식적인 신앙적 체계에서도 존재의 궁극적 본성을 이해하거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지적 능력을 사용하거나 논증적 추론을 활용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완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은밀한 신앙에서도 어느 정도는 추론적 탐구 과정이 필요하며, 여기에 참여할 수 있다.
신앙의 핵심적인 요체를 정리했다. 현상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다. 현상학적 모델에서는 특성상 이상 6가지 방법이 서로 연관돼 있다. 어떤 종교는 이 6가지를 모두 포함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포함되기도 한다. 궁극적 실재의 본성에 대한 것이면 탐구를, 이와 연관된 것을 갈망할 수 있다면 신앙심을, 그 에너지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주술적 중재를 활용하는 측면이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체계가 경우에 따라서는 폄훼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조지 폭스(George Fox)가 창시한 개신교의 하나인 프렌드회(Society of Friends)의 절대 평화주의자인 퀘이커 교도들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의 기도모임은 동방 정교회의 부활절(Eastern Orthodox Easter) 예배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성스러운 공감을 의미하는 성소(聖所)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한다. 이는 개인적 성향에 따라 추구하는 종교성이나 신앙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은 감리교나 루터교와 비교해 강박적인 성격 지표 비율이 높았던 반면, 신교 성직자들은 연극적인 성격 지표 비율이 더 높았던 점을 들 수 있다.
4. 도박중독에서 신앙적 치료방법
도박중독에서 신앙적 치료방법은 궁극적 실재에 이르는 방법이다. 신앙을 가져 세상에만 매여 있던 시야를 저 높은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높은 곳을 향하면 낮은 곳에만 마음을 두던 생각을 떨칠 수 있고, 자신을 통제하는 힘이 배양된다.
1) 신앙적 경험의 활용
신앙적 치료는 중독자의 신앙적 경험을 활용한다. 신앙적 경험은 중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가치관을 갖게 만든다. 지금까지 의미있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전혀 다르게 바뀔 수 있는 점에서 ‘있는 그대로’를 중요시하는 현상학적 모델을 종교적, 신앙적 경험으로 이해하는 데 활용하면 치료가 가능해진다. 신앙적 치료에서는 물론 중독자의 신성한 예식이나 주술적 중재를 실행하는 방법도 평가돼야 하기에 이러한 경험들을 실제로 그들이 얼마나 선호하고 깊이 관여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신성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중독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사회적 집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집단이 심리적 증상에 대항하는 지지대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잠재력을 지닐 수도 있다. 우울하고 외로운 사람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접촉을 시도할 때 기분이 나아지는 반면, 이러한 집단이 ‘종교적 혹은 신앙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갈등이나 고통의 주요 원인이 된다면 보다 정확하고 자세한 평가가 필요하다.
2) 신앙적 활동의 평가
신앙적 경험의 평가에 이어 치료자는 중독자가 참여하는 신앙 활동의 의미를 중독자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신앙적 치료에서 중요한 갈등이 존재할 때는 신앙적 활동이 중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여러 치료법과 더불어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치료자는 중독자의 관점에 반대해 갈등을 일으키기보다 그를 존중하면서, 행동 실험 및 이러한 행동 실험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결과들을 평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독자가 종교 집단에 참여할 것인지, 참여한다면 어떤 집단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집단에 참여할 것인지, 참여하면서 처음 집단에 대한 관점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집단의 관점을 유지할 것인지 등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매우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민감한 주제인데, 이는 정치나 성(性), 이혼과 같이 다른 많은 가치가 개입된 주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3) 신앙적 의미의 평가
신앙적 치료에서 치료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주술적 중재인데, 이는 문화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가가 필요하다. 어떤 암 환자는 고통스러운 화학요법보다는 뉴에이지(new age) 계통의 신비로운 치료를 받는 것을 더 선호할 수 있고, 이와 유사하게 6살짜리 자녀의 못된 행동을 무당과 상의하는 부모도 있다. 이런 문제를 치료자가 판단하거나 중독자에게 권유하는 것 자체가 치료자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지만, 중독자의 정서적 안녕을 위해 그 의미를 탐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
4) 신비주의의 위험성
신앙은 그 특성상 신비성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비성에 치우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이는 신앙적 치료에서 치료자가 중독자의 신앙심(devotion)과 더불어 신비주의(mysticism)도 잘 살펴야 하는 이유다. 조직화된 종교, 이를테면 교회에 참여하는 도박중독자라면 일반적인 신앙적 의식을 행하게 된다. 교파에 따라 신앙적인 의식이나 관례가 다른 경우도 있지만, 개인에 따라 각기 신앙적 의식이 다를 수 있다. 이런 습관적인 의식과 관례가 심리적 스트레스와 고통을 겪는 동안 경험하는 불안이나 우울을 경감시킨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신빙성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도박중독에 국한한다면 신비주의적 믿음은 그리 일반적 현상이 아니다. 도박 문제를 다루는 성직자 중에 간혹 신비주의에 열중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회복기에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다뤄진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신비주의적 의식과 관례 역시 신앙심과 유사한 방식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5) 신앙의 강박성 경계
신앙에서는 규칙적으로 행동하는 특성 때문에 일정한 정도의 강박성이 일어난다. 그러나 치료자는 이런 강박성을 경계해야 한다. 신앙적 치료에서 이성적인 이해나 탐구를 통해 궁극적 존재에 이르는 방법은 성스러운 의식, 신앙심 혹은 품행보다 훨씬 적게 다루어지는 주제다. 한 사람의 철학적 혹은 신학적 견해를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인지적, 정서적, 행동적, 혹은 동기적 손상과 관련되어 있을 때만 타당하다. 돈을 훔친 사실을 누군가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믿는 도박자는 자기 자신에게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으므로, 이런 사람에게는 규범의 정신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명예롭게 여길 수 있는 대안적인 선택을 하게 이끌어야 한다. 신앙적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이런 사람들이 종종 종교 집단의 신학적 규범을 오역하고, 이로 인해 상당한 고통을 초래하는 경우를 본다. 자신의 중독자가 바로 이런 경우라고 생각되면 중독자가 속한 교파의 종교 지도자에게 자문을 구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앙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비윤리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하다. 대부분의 정신건강 전문가의 능력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이며, 중독자의 종교나 신념을 침해하는 것일 수 있다. 여기에는 행동실험 전략을 취해보는 것이 적절하고 덜 침해적으로, 이렇게 중독자가 대안적인 신념-관점을 취하도록 할 수 있다.
6) 도덕성의 회복
신앙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올바른 행위를 통해 궁극적 존재에 이르는 방법이다.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동기강화 치료에 중독자의 가치가 통합되듯 가치는 덕(德, virtue)이나 도덕적 선행 등을 포함하는 행위를 다룰 수 있다. 신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든 없든 상관없이 인간은 도덕성을 인식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신을 믿는다. 하지만 노예제도는 비도덕적이므로 비난한다”와 같다. 도박중독은 종종 인간으로 하여금 그 사회의 기준에 의해 정의된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르게 만든다. 이때 회복은 비도덕성을 벗어나는 것으로 선행의 땅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신앙적 전통에서는 지속적인 거짓말을 하는 등의 특정한 도덕적 기준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보이는 등 다른 영역의 선한 행위를 부패시킨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했듯 만일 도덕이나 선행이 일종의 숙련이며 그 안에 통일성이 존재한다면 도박중독은 당연히 악행을 부추기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능력도 악화시킨다. 이런 이유로 도덕적 행위를 복구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자기조절을 이루기 위한, 그리고 사회적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초석이며 지향해야 할 마땅한 치료목표가 된다. 이는 공식적인 종교 전통에서 유래했든 아니든 간에 이와 별개로 궁극적 존재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개인적인 기도를 신앙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 부르는 이유다.
5. 결론: 도박중독, ‘감사’로 이겨내자
지금까지 도박중독을 신앙적으로 치료하는 것에 대해 다뤘다.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학자들의 견해에 기대어 기술하면서 적절한 변화를 추가했다. 이런 시도를 통해 인간이 신앙인으로 변화될 때 자신을 통제하기 힘든 점을 중독자가 신앙적인 사람이 돼 힘들고도 어려운 중독에서 탈피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신앙적 시도가 아직은 정상 치료법으로 자리잡지 못한 것이 현실이며 그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이런 점을 고려해 저자는 신앙적 치료에서 경험적으로 가장 핵심이 되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감사하자!”는 것이다.
감사(感謝)는 고마움을 나타내는 긍정성의 표시다. 신앙에서 감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건이라는 점에서 보면 신앙적인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도박중독이 심리적 결핍에서 비롯됐음을 알고 있다. 그 결핍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감사라고 볼 수 있다. 감사는 모든 면에서 조건과 여건을 뛰어넘어 긍정성을 유발하는 놀라운 힘을 갖는다. 도박중독자가 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지만, 애정과 사랑의 결핍을 경험한 것도 감사하면 그 존재의 결핍을 해소할 수 있다.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것도 감사하면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사랑의 빈 잔(盞)을 채울 수 있다.
생활 환경에서 부족을 느끼는 것도, 조건에 부합되지 못한 아쉬움도, 관계에서 오는 친밀감 결여도, 일정한 정도에 이르지 못한 한(恨)스러움도, 자신의 능력이 형편없다고 느끼는 열등감도, 마음에 차지 못해 갖게 되는 세상에 대한 원망도, 지난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의 불안도 감사하면 긍정적이 돼 상황이나 상태가 달라진다. 감사는 정신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산출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태도로 작용하며,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도박중독자가 자신이 가진 여건을 그대로 감사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면 기필코 괴로운 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 확실하다. 감사하는 자세야말로 그들의 삶을 새롭게, 그리고 놀랍게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중독의 특성을 심리적 결핍으로 요약한다면, 그 결핍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마도 감사하지 못한 결과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모든 것에, 아니 범사(凡事)에 즉 실패할 때나 성공할 때도, 일이 잘 됐을 때나 생각한 대로 잘 되지 않았을 때도, 그리고 넘칠 때나 부족할 때나 감사하면 상황이 역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어도 부정적으로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다. 도박중독 치료가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수정하자는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심리적 결핍을 치유해 행동을 개선하는 데 있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심리적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바꿔 삶의 태도와 행동을 수정하자는 데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감사는 전천후의 긍정성을 발생하는 발전기임이 틀림없다. 이제 도박중독자는 긍정성을 산출하기 위해 감사의 발전기를 열심히 돌려야 한다. 이는 물론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도박중독자들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을 힘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부단히 돌려야 한다. 도박중독을 신앙적으로 치료하는 것은 물론,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가 성도들이 불행한 중독의 늪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감사하는 태도를 더욱 기술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