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설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강단에서 눈물을 닦고 있는 조용기 목사. ⓒfgtv.com

▲강단에서 눈물을 닦고 있는 조용기 목사. ⓒfgtv.com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형벌을 명하셨습니다. 그 벌로써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너희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며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벌써 그 말씀 가운데 우리가 늘 흘리는 땀이 저주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죽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알 수가 있습니다. 그 형벌 자체가 벌써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어 있습니다. 땅에 곡의 울음 소리를 내고 태어난 어린 아이 때부터 시작해서 벌써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운명적으로 걸머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지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앉아계시지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착각이라는 짐을 더 짊어지고 있습니다.

<본론>

1. 모든 사람이 짊어진 짐

모든 사람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소위 철학자들이 말하는 삶의 실존적인 짐인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자기의식이 살아나자마자 죄책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 때부터 시작해서 벌써 아버지, 어머니를 속이고 형제들을 속인 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죄를 감추고 얼굴을 붉히던 일들이 기억이 납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벌써 어머니가 잉태했을 때 벌써 죄 중에서 잉태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상태로써 잉태되고 태어나서 어머니 젖꼭지를 물 때부터 벌써 죄중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시편 38편 4절에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우리는 죄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가 나보다 깨끗하다. 내가 너보다 깨끗하다. 이것은 인간적인 대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거기에다가 또 한가지 더 보태어서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알뜰살뜰 정말 가치있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다 헛되고 헛된 것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살아온 옛날을 뒤돌아 보는데 그때 대단히 중요한 것인줄 알았던 것이 지금 돌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용기도 자기의 일생을 뒤돌아 보니 헛되고 헛된 것밖에는 안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뭐 알차고 큰일을 한 것이 하나도 눈에 안보이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2절로 3절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그저 태어났으니 사는 것뿐이지 위대한 일을 했다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거운 짐은 죽음의 짐입니다. 다 죽어야 해요. 안죽을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옛날에 젊을 때는 죽는 것이 겁이 났어요. 그런데 70이 넘고 보니 진짜로 거짓말 안보태 죽는 것 하나도 겁 안나요. 아픈 것이 겁이 나요. 안아프고 죽어야지. 제가 목사로써 많은 성도들을 돌보는데 정말로 고통을 당하고 죽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안아프고 죽는 것이 우리가 마음에 늘 소원해야 될 것입니다. 죽는 것은 원래 죽게 되어 있는데 좀 빨리 죽으나 좀 늦게 죽으나 차이는 있지만 더구나 70까지 살았으면 잘 살았지 않습니까? 죽는 것은 걱정이 안되는데 아픈 것이 걱정이에요.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은 안아프고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라마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하냐면 일본의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유명한 소설“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문학계의 거장입니다. 그런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지 4년 만에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했습니다. 그는 청년시절에“자살은 깨달음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평소 자살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가 노년이 다가오자 삶의 허무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살했습니다. 그는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고 돈도 있고 다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안 보이는 가슴 속에 허무와 공허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그 가슴 속에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시기 전에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슴 속에 채우지 못한 그 공허 속에 방황하다가 견디지 못해서 자살했습니다. 그 자살한 것도 똑똑하기 때문에 자살하지 바보는 자살도 안합니다. 똑똑했기 때문에 가슴 속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얼마나 공허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954년에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문호 헤밍웨이도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 그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습니다. 그 유명한 세계적인 문학가들이 왜 자살을 합니까? 그 역시 삶의 무거운 짐을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인생을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아담의 타락 이후 삶 자체가 짐입니다. 아무리 유능하고 재능이 많아도, 유복하고 명예를 얻어도 인간은 누구나 삶의 짐에 눌려서 몸부림을 칩니다. 죄책과 정죄, 허무와 무의미, 죽음과 무의 고통 속에 다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윌리엄 맥도날드가 쓴 “잊혀진 명령, ‘거룩하라’”는 책에는 한 의사가 정신병원에 있는 환자들에 대해 설명한 글이 있습니다. 어느 작가가 정신병원을 방문했는데, 그가 가서 정신병 환자들 하고 이야기를 해보니까 말갛거든요. 판단력도 뚜렷하고 자기 의견을 진술한 것도 허튼 소리 안하고 바른 소리하고 하나도 정신병자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그러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분별력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자세히 들어보면 모두 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안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얼마나 정신병에 가까운 것을 알려면 내가 말할 때 무엇에 대해서 중점으로 말하는가를 살펴봐야 돼요. 자기 일만 자꾸 이야기하고 남의 일은 관심을 안가지고 남의 말은 듣지도 아니하면 벌써 정신병은 들었습니다. 정신병자와 건강한 사람하고 별로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정신이 온전한 것 같고 분별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자신의 욕구로만 가득차서 자신만의 성을 허공에 쌓고 현실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신병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는데 따르는 짐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육신의 정욕 그 다음에는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 같은 자신의 욕구인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도 자기 욕심, 안목의 정욕도 자기 욕심, 이생의 자랑도 자기 욕심 이게 자기 욕심에 잡혀서 그것만 바라보고 그 말만 하고 그것만 생각하면은 사람은 온전한 정신을 가질 수 없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가는데 인간은 피할 수 없이 육신의 정욕, 식욕과 성욕이 따릅니다. 안먹고는 못살잖아요. 또 결혼하고 자녀를 기르는 이 일을 외면하고도 못살잖아요. 식욕과 성욕은 인간이 반드시 해결해야 될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만 이것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부딪히고 싸우고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명예욕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명예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마귀는 예수에게 와서 높은 첨탑에 올라가서 뛰어 내려서 않다치므로 사람들이 박수를 치도록 명예를 얻으라고 꾀었습니다. 요술을 부리더라도 명예욕을 충족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명예욕 있어요. 모두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는 칭찬 못받고 이웃이 칭찬 받으면 마음 속에 시기와 질투와 분노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이 생깁니다. 이생의 자랑은 부귀, 영화, 권세인 것입니다.

중간 선거가 다가오고 명년 대선이 다가오면 서로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려고 맹렬히 선거운동하지 않습니까? 살아가는데 반드시 있어야 될 일이지만 그것 짐이 아닙니까? 정말로 국회의원 당선시키고 대통령 당선 시키려면 피가 마릅니다. 그것 어떻게 아느냐? 옛날에 우리 아버님이 국회의원 출마를 하셨거든요. 선거일까지 우리 가족 전체가 피가 말랐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에 살면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얽히고 설킨 무거운 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교회와 계신 여러분이나 교회 안온 세상 사람들이나 다 무거운 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2. 짐에 눌린 사람

짐에 눌린 사람들이 왜 불안과 공포를 가지느냐면 그 짐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파탄에 이를까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염려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인생의 요구가 있는데 이것을 못채울까 싶어 마음에 불안과 초조가 있는 것입니다.

욥기 5장 7절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불꽃이 하늘로 오름같이 사람은 벌써 태어날 때부터 고생하게끔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욥기 3장 25절로 26절에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우리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 두려움이 무서움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둥지를 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분위기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도 강하고 담대하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도 강하고 담대하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보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 것은 두려움이나 불안은 마귀가 와서 둥지를 틀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있는데 무서워하는 것과 내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와서 둥지를 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좋은 일이 생겨난다. 이렇게 하면 그런 좋은 일이 다가올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둥지를 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요. 깡패들이 모이는 것은 깡패들이 모일 수 있는 분위기가 되고 환경이 되니까 깡패들이 모이지요.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좋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어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살면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탄식하기를 내 무서워 하던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 두려워하던 그것이 내게 미쳤구나. 그러므로 항상 여러분, 여러분 앞에 좋은 일이 다가올 것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그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그 좋은 일을 만드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힘들지요. 내가 고통스럽고 괴롭고 시련에 처했을 때 생각을 평안하게 꿈을 희망차게 긍정적인 믿음, 적극적인 말을 한다는 것은 힘듭니다.

그때는 누구 도움이 필요하냐. 목사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와야 돼요. 설교를 들으면 달라진다고... 말씀을 들으면 내 마음 속에 청소가 되고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그런 마음에 고통이 오면 어떻게 하느냐. 목사도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이 올 때가 많습니다. 그때는 교회 진실한 장로님이나 권사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목사라고 해서 평신도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저는 장로님들이 많이 도와 주십니다. 또 권사님들의 도움도 많이 받습니다. 와서 격려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면 마음이 청소가 되는데요. 달라지는데요. 내 힘으로 못짊어지던 짐을 짊어질 수 있게 되고 마음의 분위기가 새로워지니까 기도도 나오고 찬송도 나오고 하나님께 감사도 나오고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과 이웃에 대한 원망, 미움, 좌절, 절망 이런 것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굉장히 마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9장 3절에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야훼를 원망하느니라”

자기가 스스로 잘못해놓고 원망은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로 27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이것도 역시 분위기입니다. 마귀에게 틈탈 분위기를 주지 말라. 언제 마귀가 틈 타느냐. 마음에 분을 품고 있으면 그 분을 따라서 그 분위기를 따라서 마귀가 틈을 타서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라. 분이 안생길수가 없어요. 사람이니까 억울하고 답답하면 분이 생기는데 해가 지면 분도 치우라는 것입니다. 해가 질때까지 분을 품고 있으면 틀림없이 마귀가 들어와서 둥지를 치는 것입니다.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해야 우리가 무서운 파괴를 가져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과 기쁨, 평안,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해야지 이것을 잃어버리면 안돼요.

성경에는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했는데 잠언 15장 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우리 사람 얼굴보면 알잖아요. 근심이 없는 사람은 얼굴이 환하고 빛나고 좋은데 근심이 있는 사람은 벌써 눈에 빛이 사라지고 얼굴에 광채가 사라지고 고통이 역력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2장 22절로 23절에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 전도서 읽으면 완전히 절망적인 사람의 탄식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그 속에 전부 참말을 하고 있으니까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고... 정말 그럴까요? 일평생을 살면서 기쁨은 별로 없고 슬픔과 근심밖에 없다는 것 참말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전문가들에게 들어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데이비드 핑크(David H. Pink) 박사는 만 명을 상대로 신경과민과 불안증에 대해 연구했는데 우선, 신경과민과 불안증으로 고생하는 부류는 그렇지 않은 부류로 나누어서 조사했는데,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신경과민과 불안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중요한 특징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늘 안 좋은 부정적인 것만 보고 듣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신경과민과 불안증이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보는 것과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이 모두다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안 좋은 것만 찾아다니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환경에 대해 언제나 불평을 말하고 불만하고 탄식하고 불만족을 말하는 것이 정신과민과 불안증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신경과민과 불안증이 없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짐에 눌린 사람들은 늘 불안과 공포 가운데 생활합니다. 그들은 자신과 주변 환경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늘 미움, 원망, 탄식, 불평만 합니다. 저도 신앙상담을 많이 하는데 언제 제일 신앙상담 하고 난 다음 마음이 힘들고 고통스러우냐 하면은 앉자마자 불평을 말하는 분입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 남편에 대한 원망, 자식에 대한 원망, 사회에 대한, 자기에 대한 원망. 불평 전문가는 잘합니다. 엄청나게 말을 잘해요. 그러면 내가 신앙상담 한다고 앉아있는 나의 책임은 들어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잘했다 못했다 보태면 절단납니다. 왜냐하면 하루 종일 그분과 같이 앉아 있어야 돼요. 내가 들어줘야 돼요. 그러면 다 듣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너무나 괴롭기 때문에 제가 그것을 듣고 있다가 밖에 나가서 골프치는 것을 생각도 하고 놀러다니는 생각도 하고 그러면서도 들어줘야 되는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나면 그날 신앙상담하고 난 다음에 너무 지쳐서 드러누워야 됩니다. 그만큼 원망과 불평과 탄식은 우리에게 심신에 스트레스를 가져오고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건강의 적이 바로 스트레스인데 스트레스는 부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행동을 할 때 스트레스에 걸리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좋게 보고 건강하게 보고 행복하게 보면 스트레스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여러분 늘 그렇게 말하라고 내가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기쁘다. 나는 즐겁다. 나는 평안하다. 나는 형통하다. 저도 그런 말을 하면서 한머리에 마음 속에 진짜냐? 진짜냐? 그런 질문이 와요. 그러면 내가 내 스스로 보고 잔소리마라! 나는 행복하다! 기쁘다! 즐겁다! 형통하다!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사로잡힌다고... 여러분의 말로 여러분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이 건강해지면 몸이 건강해지고 생활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입술의 말로써 우리 삶을 잘 다스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초청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놀라운 일 아닙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날 떠나가라 해야 될 것인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 그리스도의 복음이 종교 이상인 것은 예수님은 우리 현실 생활에 들어와서 우리 도움이 되어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슨 앉아서 도덕이나 윤리나 강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현실 생활 속에 역사 속에 직접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짐을 짊어지고 우리 생활에 참여하고 우리를 도와주고 살리려고 하는 일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오늘 이 자리에 성령을 통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시면서 우리에게 교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말 살리기 위해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와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우리가 나갈 수 있는 자격이 뭐냐. 내가 인간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내 무능력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이 필요 없잖아요. 우리가 많은 시련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도 시련과 환난에 부딪혀서 내가 얼마나 무능하고 무능력한 사람인 것을 깨닫기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굉장히 당당하던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절름발이가 되고 병신이 되고 난 다음에 굉장히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가 잘났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우리 문제를 해결해야 돼요. 우리가 못났다고 생각할 때는 도와줄 자가 필요해요. 사람이 도와주는 것도 중요한데 하나님이 도와주지 아니하시면 인간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 1절로 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로다”

산이 얼마나 큽니까? 태산 크지요? 산 만한 돈을 가진 사람, 산 만한 권력을 가진 사람, 산 만한 육체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태산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려주신 이를 못 믿으면 누구를 믿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좋은 것을 주셨으므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자기 목숨을 우리에게 내준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켜 세워 주는 것입니다. 택도 없는 것을 믿으라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해 주었으니 그 다음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감하게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력을 깨닫거든 내게로 오라. 네가 스스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당당히 믿는 사람은 내게 올 필요없다. 무능력하다고 느낄 때 내게로 오라.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셔라. 목이 안마른 사람은 내게 오라고 말 안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1절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우리 찬송가 있지 않습니까? 목 마른 자들아 이리로 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우리 한번 불러볼까요?
♬ 목 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
이 샘에 먹는 물 강 같이 흘러 온 천하 만국에 다 통하네
빈부나 귀천에 분별이 없이 다 와서 쉬고 또 마시겠네 ♬

자 이 얼마나 좋은 초청입니까? 예수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 빈부귀천 구별없이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여러분 이 시간에 여러분 주의 샘물을 마신다는 것은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린다. 그러므로 목마른 너희들은 와서 주께 부르짖으면 주께서 목을 축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인 셰익스피어는“근심은 생명의 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근심이 생명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22절에“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처럼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송하면 보약 먹는 것과 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있으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내고 신경질 내잖아요. 남편이 염려 근심있거나 아내가 염려 근심 있으면 그날 대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신경질내고 고함치고 불평하고 모든 분위기가 살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카고 러쉬대학교의 메디컬 센터에서는 65세 이상의 노인 1천 64명을 대상으로 걱정과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3년부터 6년이 지난 다음에 그 사람들 중에서 누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느냐. 알츠하이머는 노망에 걸리는 사람이 누가 걸리느냐 조사해 보니까 걱정과 스트레스에 고통을 많이 당하는 사람이 노망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평소 걱정이 많고 스트레스에 민감한 사람들일수록 노년기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위험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두 배 이상 높다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요사이는 뭐 기다릴 필요 없어요. 병원에 가면 특별한 기계가 발명되어서 찍으면 노망 걸릴까 안걸릴까 환하게 알아요.

저도 얼마 전에 찍었어요. 의사선생님이 하는 말이 조목사는 노망 걸릴 생각 절대 하지 말라고 걱정할 것 없다. 그것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설교를 자꾸 하니까 노망걸릴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말을 하고 찬송 많이 부르고 기쁘게 있으면 노망도 안걸려요. 짐으로 인생이 파탄에 이를까 염려하는 불안과 공포는 마음의 기쁨과 행복과 평안을 빼앗고 육신의 질병 뿐 아니라 인생을 고통 가운데로 몰아 넣어 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것 얼마나 든든한 빽입니까? 하나님 믿고 나도 믿으라. 내가 염려하고 수고한 짐을 맡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졌지 않습니까? 십자가만 바라보면 눈물이 나요. 아무 죄도 없는 그분이 육신을 쓰고 이 세상에 오셔서 너의 죄, 나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6시간 고통을 당해서 몸이 찢기고 피와 물을 다 쏟았다. 생각만해도 기가 막히게 감사하고 무슨 일로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53장 4절로 6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 우리라고 하니까 실감이 그렇게 많이 안오는데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내가 나음을 얻었다. 그렇게 하면 마음에 실감이 옵니다. 예수님을 쳐다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통을 다 짊어지고 청산했으므로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믿습니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막연하게 말하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께서 우리 위해서 고난당한 것을 생각하여 마음에 깨닫고 그것을 꿈꿔보고 그것을 믿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갖고 산다고 입술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몸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몸에 나타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우리가 마음 속에 짊어지면 부활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활은 생명의 역사가 우리 속에 실제로 나타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로 20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지금 예수님은 저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 왜 함께 계십니까? 내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 함께 있다. 이렇게 큰 백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신 그 예수님은 이제는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함께 계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러므로 답답할 때 주님께 나가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뢰고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것은 큰 행복의 근원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란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예수 없이는 참 기쁨을 가질 수가 없어요. 예수 없이는 참 만족을 가질 수가 없어요. 우리가 끝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실존적 짐을 주시고 우리를 쉬게 한다.

시편 68편 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라고 했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로 33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올바른 선택과 올바른 방향만 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선택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하는데 세상을 따라 갈 것이냐 주님을 따라 갈 것이냐. 예수님을 따라 가기로 선택하면 방향입니다. 무슨 방향이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방향만 청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와 하늘 의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하늘나라와 하늘 의를 따라 가는데 당장 그 사람이 천사가 되고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비뚫거려도 일어나서 방향을 바로잡고 가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방향은 하늘나라를 향해서 간다. 나는 주님의 의를 위해서 간다. 넘어져도 일어나고 엇길로 가다가 돌아와도 그 방향으로 간다. 그 올바른 방향을 잡고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기도를 들어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 언제나 선택과 방향을 올바르게 잡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저주를 받고 이마에 땀을 흘려 살게 되었는데 이 저주를 주님이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왜 못믿습니까? 주님이 부요하신 자 아닙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영광을 다 가지신 그 분이 그것다 버리고 이 땅에 온 것은 너희 가난을 대신 짊어지고 너로 부요케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실력이 없는 분이 그런 말 하면 대포 놓는다고 하지만 실력이 계신 분이 그렇게 말하는데요. 하늘과 땅을 다 쥐고 계신 그분이 그것 내놓고 우리에게 온 것은 우리로 하여금 부요하게 만들기 위해서 영도 마음도 몸도 부요하게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했는데

저주는 아담이 받고 율법에는 말하기를 저주 받은 사람은 십자가에 매달라고 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다.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려 처형을 당했으니 왜 그랬느냐. 여러분과 나의 저주를 대신 짊어졌다. 그러니 보세요. 여러분과 나는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고 더러움에서 해방되고 병에서 해방되고 저주에서 해방되고 지옥에서 해방되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놀라운 자아를 얻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마음 속에 늘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로 놀라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이 진리를 통해서 평안이 올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우리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같은 기도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해도 좋습니다. 주님이여 내 짐을 맡아 주소서. 맡아 주소서. 맡아 주소서. 주여 내 짐을 맡아 주소서. 맡아 주소서. 아주 웅변을 해야 기도가 되는 것 아닙니다. 한가지 말을 자주자주 해도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불광동에서 아주 감탄을 한 장로교 장로님이 계신데 시내교회 장로님인데 아침 새벽기도는 불광동에 사니까 우리 천막교회 왔어요. 기도를 굉장히 오래해요. 그래서 내가 호기심이 생겨서 가만히 들어봤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때 전도사였는데 불구하고 얼마 안하면 할 말이 없어요. 기도해도... 할말이 없어서 하나님께 죄송하고 한데 이 나이먹은 장로님은 그렇게 오래하기에 옆에 가만히 와서 가만히 들어보니까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노. 장로님, 그저그저 감사하다가 뭡니까? 기도가 뭐 그런 기도를 합니까? 내 말을 듣더니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교훈을 해도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꾸짖어도 그저그저 감사하고 그런데 그 영감님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데 사업을 꽤 잘해요. 잘 살아요.

그래서 내가 그 영감님 기도가 내 마음에 잊어지지 않아서 그 다음 이후로는 제가 기도할 때 할 말이 없으면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말하는데 그저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과 시간을 많이 보내면 되는 거에요. 웅변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웅변하려고 하면 그것 생각한다고 기도에 집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 잘하는 사람 말 듣는 것 아닙니다. 진정의 마음을 보시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한가지 기도를 반복 반복해도 좋습니다.

주여 평안을 주옵소서. 주여 평안을 주옵소서. 평안을 주옵소서. 주여 평안을 주옵소서. 평안을 주옵소서. 그냥 기도하기가 힘들면 곡조를 넣어서 평안을 주옵소서. 평안을 주옵소서. 평안을 주옵소서. 그렇게 하더라도 기도하면은 성령이 역사하셔서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나의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염려도 말고 근심도 말라고 마음에 평안이 오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레미야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부르짖으라. 그냥 외마디 소리로 부르짖어도 좋아요. 통곡을 하고 부르짖는 기도가 굉장히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이 여러분 행복을 갖다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서기 9세기 경에 사라센 제국을 49년간이나 통치했던 압둘라만 3세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인을 3천 321명이나 거느렸습니다. 자식을 616명을 낳았습니다. 그는 부귀와 영화, 권력과 쾌락을 또 건강을 끝까지 가졌습니다. 세상에 그사람 만큼 이 세상에 행복하고 잘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에 유언을 말했는데 나는 한평생을 살면서 행복을 누린 날은 14일 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도 14일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그 사람 식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1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세상 부귀영화를 가지고 이 세상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는 없잖아요.

전도서 5장 10절에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파스칼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고 나를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고 사랑하시고 끝까지 붙들어 주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행복은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데 있다.” 하나님과 하나되면 행복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은 결코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시편 144편 15절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되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복이 따른다. 우리는 복받은 사람이라고 늘 생각하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사회 개혁가이며 설교가였던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는 인간이 이룬 업적과 예수님의 영향력을 이렇게 비교하여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고대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40년 간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의 제자 플라톤은 50년 간 그리고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40년 간 그들의 사상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단지 3년 동안 하늘나라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친 총 130년의 영향력보다 3년 간 가르친 예수님의 영향이 오늘날까지 온 세계에 더 큰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미술가인 라파엘, 미켈란젤로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위대한 그림들은 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감 받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은 시를 한 줄도 적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위대한 시를 썼습니다. 예수님은 작곡 한줄 한적이 없어요. 그러나 하이든, 헨델, 베토벤 등 위대한 작곡가들은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해 작곡한 곡으로 완성된 곡을 지어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지요. 이처럼 예수님에 의해 더욱 큰 능력과 영감을 받으며 역사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은 인생들이 이룬 그 어떤 위대한 일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어 몸 찢고 피 흘리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철학자에게도 가지 말고 음악가에 시인에게 가서 위로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부귀, 영화, 공명을 찾아서 쉼을 얻으려고 생각하지 말라. 나를 찾으라. 빈부귀천 누구나 예수님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결론>

짐을 지고 자기가 깨어져 순종하고 낮아진 사람은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하다가는 것은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짐승 보십시오. 소와 말이나 개, 온유한 짐승들은 주인을 따르지요. 사나운 짐승, 범이나 표범이나 사자나 이런 것은 사람을 따르지 않지만 온유한 짐승은 사람을 따르는 것처럼 온유하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따르는 것은 우리가 깨어지면 마음이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깨어지고 완악해지면 자기 중심으로 서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깨어진다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깨어지면 정말 좋고 스스로 깨달아서 깨어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진 남편 만난 자매님 남편만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깨어지라고 모진 남편 만난 것입니다. 잔소리 많은 아내 만난 사람 귀찮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편 깨어지라고 잔소리 많은 아내를 택한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면 남편도 변화되고 아내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나로부터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험이 다가오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나를 깨어지게 하는 데는 큰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하면 괴롭고 괴로움은 깨어지는 것입니다. 괴로운데 안깨어지는 사람 그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다 깨어져서 주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2011. 4. 17. 종려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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