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의 사사기 4] 진정한 부흥의 전조란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1.
6절부터가 사사기의 본론의 시작이다. 우선 그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해산식을 갖고 각기 자신들에게 할당된 기업의 땅으로 돌아갔다(6절). 그때만 해도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좋았다. 여기서부터는 여호수아의 죽음과 그 후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의 변모에 대하여 기술한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 그리고 죽은 후 그 역사의 현장을 보았던 장로들의 생존까지는 여호와를 섬겼지만, 그 세대 사람들이 다 죽은 후 다음 세대가 일어나자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여호수아는 110세를 향수하였으며 그를 장사지낸 곳은 그의 기업의 경내인 딤낫 헤레스였다. 여호수아 24장 30절에는 딤낫 세라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사사기의 기록은 딤낫 헤레스로 되어 있다. 딤낫 세라는 풍성한 기업이라는 뜻이고 딤낫 헤레스는 한 줌의 흙이라는 뜻이다. 영적으로 상승되었을 때 그들에게 여호수아의 위치는 풍성한 유산이고 보배이었지만 하락의 일로에 있을 때 그의 무덤은 한 줌 흙에 불과했다. 우리 개인에게도, 교회에게도 앞선 훌륭한 종들의 유산이 우리가 좋을 때는 풍성한 유산이지만, 하락할 때 그들의 유산은 한 줌의 흙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구절들이 영적 지도자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영적 지도자가 성도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그러므로 대다수 부흥 운동에서 영적 지도자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후의 차이는 큰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 이 땅에서 모든 부흥의 역사의 패러다임은 거의 예외 없이 1대는 부흥, 2대는 유지, 3대는 타락이었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살아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견상으로라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간접적으로 말씀을 받은 후예들은 첫 세대 사람들과 그 마음이 달랐다. 후의 사람들은 첫 세대가 가졌던 절실한 마음과 진리를 위해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부분 다음 세대 사람들은 첫 세대의 진리를 다만 머리에서 머리로 전수받는다. 거기에는 전 시대가 지불한 것과 같은 진리를 위한 고난과 희생이 없다. 다만 지식으로 훌륭한 영적 조상들이 남긴 유산을 이어받는 것이다.
여호수아 시대 사람들은 여리고 성 전투와 아이 성 전투, 실패와 성공, 길갈로 돌아감, 아얄론 골짜기의 전투와 대승 등의 많은 체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장로들의 생존시만 해도 그들은 생생한 증인들에 의하여 그들의 믿음이 붙잡아졌다. 그러나 이제는 요단을 건넌 체험이나 길갈의 체험, 여리고와 아이 성 전투와 아얄론 대접전, 심지어 보김의 통한의 눈물도 몇 권의 책 속에 넣어졌고 후의 사람들은 그것을 다만 읽고 누리기만 하면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이젠 지식으로 머릿속에 간직하기만 하면 다 되었던 것이다. 이럴 때 그들의 전 시대의 훌륭한 지도자 여호수아의 업적은 ‘풍성한 유산’에서 ‘한 줌의 흙’이 되어버린 것이다.
2.
11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악은 그들을 인도해내신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을 섬긴 것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하나님을 버렸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한다면 그들의 신관(神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여기서 ‘바알’이란 이름은 오늘날 성서적으로 매우 악한 우상의 이름이지만, 당시 용어를 연구해보면 다만 소유주(所有主) 또는 주인(lord)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오늘날 신자들에게 바알을 섬기려느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성서를 통해서 바알이나 아스다롯 등은 이미 기성화되고 알려진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우상의 위험성이 없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5장 21절에서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명한다. 당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우상의 위험성은 분명 바알신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요한은 성도들에게 여전히 우상의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우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치하는 모든 종류의 신들(lords)이다. 우리는 살아계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고 뭔가 믿음이 없이도 가까이하고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바꿀 때 그것이 우상임을 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 것이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 금송아지를 뭐라 불렀는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lord)이로다”(4절)고 했다. 보이는 하나님을 그들이 스스로 개발한 것이다. 게다가 백성들의 대세에 눌린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말을 했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5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인식한 다음 그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았다. 밖으로 볼 때 그들의 종교행위는 과거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며 섬기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섬기는 대상은 분명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금송아지로, 바알로 바뀐 것이다.
금송아지나 바알은 우상이며, 우상의 특징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금하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유일하신 하나님께 굴복하는 신앙을 싫어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풍족하고 안락한 삶에 안주하며 더 이상 전진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자신들의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행하며 살고 싶었다. 다른 것은 다 간섭이요 통제이며 불필요하게 자신들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명목상 조상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의 후손이라는 명분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에게 잘잘못을 말해주거나 행동을 하나하나 규제하는 살아계신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의 삶과 행동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받들 수 있는 신인 바알을 택하게 된 것이다.
요한일서의 배경에는 영지주의가 있었다. 그들은 지식을 최고로 숭상하는 이단이었다. 그들은 사람에게 아무런 제재나 통제를 가하지 않고 다만 머릿 속으로 심오한 학문을 연구하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 지식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치했다. 그것이 당시의 우상이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머릿속에 들어있는 죽은 지식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치했던 것이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머릿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도들이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좌절시키는 데에 사용되는 사탄의 전술이요 도구이다.
신관(神觀)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하겠다. 바르지 않은 신관을 갖는 것이야말로 우상 숭배의 지름길이다.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선한 속성들(attributes)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전능하시고 모든 선한 속성들을 가지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고 오히려 그의 편의에 따라 다른 어떤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바꿀 때 그것이 우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부요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속성을 갖고 계신다(골 2:3). 그러나 믿음 생활에서 더 이상 대가를 지불하고 싶지 않고 희생이나 고난의 삶을 살기 원치 않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속성은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과 긍휼히 여기심과 죄인을 위해 자신을 다 주시는 사랑의 속성은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라는 우상으로 사신 하나님을 대치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분이 복 주시는 분임을 믿고 좋아하지만 그분의 성결하시고 의로우신 속성은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삶에 풍족함과 기쁨을 주시는 분으로는 믿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속된 것과 일반적인 것에서 분별된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육체와 세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거룩한 하나님과 일치된 삶을 살아야 하는 방면에 대해서는 번거로운 일로 여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으므로 부지불식간에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 가장자리에는 자기 사랑과 육신적인 삶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있다.
3.
11절부터 3장 6절까지의 내용은 사사기의 서론과도 같다. 그 중점은 ‘4S 사이클’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범죄함(Sin)이고, 둘째로 이방 민족의 노예가 됨(Slavery)이며, 셋째로 간구함(Supplication)이고, 마지막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으로 사사를 일으켜 구원하심(Salvation)이다. 사사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4S’를 되풀이하면서 점점 타락해 가고 있었다.
많은 성경 독자들은 구약에서 사사기 때보다 이스라엘이 더 타락한 때가 없었다고 알기 때문에 사사기에 나온 이스라엘의 정치형태, 즉 하나님 다스리심의 방식이 낮으며 부적절하다고 여기는 잘못에 빠진다. 실상 사사기의 이스라엘은 정치 형태에 있어서는 최상이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떠나고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더 이상 특출한 리더를 세우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실 일을 다 하셨다. 법도를 주시고 그들을 목적지까지 이끄셨다. 그들은 이제 그 훌륭한 종들을 통해 주신 명령과 법도에 따라 그곳에서 살면 축복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후 사무엘 때 이스라엘은 왕을 세우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한다. 그것은 이방의 풍속이지 하나님의 정치 스타일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게 돼 있는 신정(神政) 국가이다.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그분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고 살면 된다. 그러한 정치 형태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우대하심이요, 그들의 가능성을 인정하심이요, 심지어 인격을 존중하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포기하고 차라리 이방 열국처럼 사람의 통치 아래 들어가겠다고 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스라엘은 가장 좋은 여건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가장 타락하게 된 셈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 이와 동일하다. 교회 역사가 200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가히 열리지 않은 진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못 지킨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길을 몰라서 가지 못한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 최고 수준의 문화와 문명의 발전은 당시 이스라엘의 가나안 생활과 흡사하다. 당시 평지와 골짜기의 비옥한 삶을 영위하던 가나안 부족들의 삶은 매우 안락하고 풍요로웠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가나안 부족들이 최고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굉장한 기둥들이 30여 개나 발견되고 큰 제방을 쌓은 것도 발견되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신세대들은 광야와 가나안 전쟁만을 보고 자라다가 그러한 문화와 풍부함을 보고 마음이 빼앗겼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젊은이들이 찬양이나 율동하는 것을 보면 완전히 가나안의 음악과 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가나안 문화의 침투라고 할 수 있다. 교회들 가운데의 강력한 리더십과 조직, 치리 형태도 이방 풍습에서 따온 것이다. 사사기 역사는 이러한 가운데 이스라엘이 점점 더 타락해 갔다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께서 때마다 그들의 간구와 탄원을 들으시고 사사들을 일으켜 한 차례 한 차례 부흥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으며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의 처방이었을 뿐이다. 근본적인 치료는 그리스도에 의한 것으로서 빌라델비아 같은 교회의 부흥, 곧 모든 지체들이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일어나는 생명의 부흥에 있다. 우리는 사사기에 이어 나오는 룻기에서 조용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생명의 맥을 이어가는 부흥의 예시(例示)를 대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하시려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부흥의 전조(前兆)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