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설교] 항상 기뻐하라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서론>
“항상 기뻐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라면 충분히 영양분도 섭취하거니와 운동을 하라고 합니다. 저는 건강진단을 가면 의사 선생님이 꼭 하루에 만보씩 걸으라고 당부당부를 합니다. 그런데 안걸어도 걸은 것 만큼 효과를 발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플러스인생 2월호에 웃음의 효과에 대해서 말한 것을 읽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웃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건강에도 좋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650여 개의 근육이 있는데, 얼굴에만 약 80여 개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웃을 때는 몸 근육 231개, 얼굴 근육 15개 이상이 움직입니다. 15초만 웃어도 12칼로리가 소모되고, 수명은 2일 연장되며, 윗몸 일으키기를 25번 한 것과 똑같은 운동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웃으면 윗몸 일으키기 운동 25번 한 것과 똑같다. 15초만 웃어도 수명이 2일 연장이 된다. 하하하하…. 벌써 수명이 많이 연장이 되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웃음치료사들은 “웃음은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실제 운동이다. 전문가들은 웃을 때 세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크게 웃어라. 피시시 웃지 말고… 둘째, 숨을 내쉬는 날숨으로 10초 이상 웃어라. 셋째, 배가 아프도록 숨이 끊어질 듯 박장대소하라. 하하하하…. 성경에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며 웃을 때, 몸과 마음의 건강 뿐만 아니라 생활에 즐거움이 넘쳐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할렐루야~ 하하하하... 아주 좋습니다. 한번 해볼까요? 제가 할테니까. 하나님~ 할렐루야~ 하하하…. 하나님 감사합니다.

2008년 5월 24일 원광대 김종인 교수의 장수비결 논문에 100세 이상 장수하는 노인들은 80대 노인보다 10배 가량, 60대 환갑인 보다 12배 정도 더 많이 웃는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고 발표했습니다. 100세인들의 근심걱정은 팔순인과 비교해서 1/6, 환갑인에 비해 1/12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100세 장수하는 노인은 그만큼 근심 걱정이 적고 스트레스도 적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항상 기뻐해야만 심신에 건강과 생활의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은 기쁨의 근본이시다

첫째로, 하나님은 기쁨의 근본이 되시는 것입니다. 기쁨이 다른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쁨의 근본, 샘인 것입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치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가도 기쁨이 충만하고 주님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치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은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하면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함으로 삶에 기쁨이 충만하여 외삼촌 라반을 7년 동안 머슴으로 섬기고 살아도 그것이 하루같이 보내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천국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조지 피터 교수는 언제나 밝고 즐겁게 생활했습니다. 하루는 학생 중 한 명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늘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주를 사랑하니 기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언제나 예수 사랑으로 충만해 있으니 기쁨의 깃발이 휘날리는 것이라네.” 사랑한다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사랑의 속성은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옛말에 친구는 오래된 친구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오래된 친구가 좋고, 술은 오래된 술이 맛이 있고, 마누라는 오래된 마누라가 좋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아하고 사랑하면 마음에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늘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어디를 가든지 늘 기쁨의 강물이 마음속에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움의 속성은 슬픔인 것입니다. 미움은 굉장한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데 남을 미워하면 그 상대방이 손상을 입을 뿐 아니라 미워하는 자기 속에 굉장한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원한을 갖고 용서하지 않으면 슬픔과 우울과 절망과 불행의 어두움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마음에 슬퍼지고 우울해지고 절망적이 되면은 모든 것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어찌하든지 허물을 덮어 버리더라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이 나도 좋고 이웃도 좋은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11절로 13절에 “야훼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야훼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 중에 큰 축복이 기쁨인 것입니다. 미움과 원한은 슬픔과 좌절과 절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덕목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어 인생을 신바람나게 살며 생명이 충만한 꿈과 희망의 날개를 펴고 살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도 가장의 가장 큰 의무는 가정에 아내와 자식들이 마음에 감격을 갖고 감동을 갖고 기쁨을 갖고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게 남편의 책임이요, 의무인 것입니다. 또 아내도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면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즐거움을 얻도록 해주는 것이 큰 의무와 책임인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이끌어가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격을 줘야 되고 가슴 뿌듯하게 만들어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정치가도 올바른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고 회사의 사장도 사원들에게 기쁨을 줘야 되고 교회 목사도 성도들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과 감동을 주는 주의 종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슬픔과 고통과 절망을 가져오면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사랑하면 기쁨이 솟아나잖아요. 사랑하는 남녀, 서로 굉장히 기뻐하는 것입니다. 첫 연애를 걸어본 사람들은 연애시절에 있던 마음에 기쁨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음성조차도 반갑고... 살다가 보면은 어떻게 저 사람의 음성을 내가 그렇게 즐거워했을까? 참 내가 돌아도 보통 돌지 않았지. 그러나 그때는 음성조차도 반갑고 모자란 인격조차도 곱게 보이고 못난 것도 잘나 보이고 사랑은 그렇게 사람을 기쁘게 만들고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사랑하면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사랑하면 부모를 만나면 굉장히 기뻐하지요. 부모가 자식들 있으면 너무 기뻐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이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좋은 친구 참 좋지요. 좋은 친구는 음성을 들어도 좋고 서로 만나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대화를 하면 정말 부담이 되지 않고 즐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된 친구가 좋다는 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오랜 친구,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끌어주는 친구,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바울선생은 교회 성도들을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20절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다. 이 사도바울 선생의 심정을 저는 요사이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나이를 점점 먹게 되고 또 힘이 없어지면 강단에 서지 못할지도 모르는 게 내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은 우리 성도들만 생각하면 마음이 기뻐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어요. 젊은 목사할 때는 철이 없어서 성도들 머리수만 헤아렸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 성도들 보면 그렇게 사랑스럽고 측은하다고 왜 그런지.. 잘 사는 성도들을 봐도 측은하고 못사는 성도들 봐도 측은하고 안아주고 싶고 두들겨 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철이 들어가는가 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을 보면 기쁘고 행복하고 성도들과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사랑은 이와 같은 신비한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위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그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기에 그 아들 예수님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 때문에 엄청나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못되게 구는 인생들을 그렇게 오래참고 견디고 그리고 우리 못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희생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엄청나게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7장 38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주를 믿는 사람은 주의 사랑이 생수의 강이 되어서 마음에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박국 3장 17절로 18절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우리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신앙고백을 하라는 것은 나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쁘고 즐겁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평안하고 건강합니다. 예수님이 같이 계시면 기쁨의 샘물을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판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가운데 있으니 기쁨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이 여러분 보고 너무 기뻐서 감당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에이~ 과장이겠지. 과장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여러분이 기뻐 안하시면 여러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님을 내어줄 턱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보고 너무 기뻐하여 기쁨을 감당하지 못하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 야~ 참 내 아들, 딸들 좋다. 얼씨구나 좋다~ 보기 좋구나. 하나님은 참 감격적인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을 때도 빛을 지으시고 보기에 좋다~ 야~ 좋구나. 주님께서 여섯 번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보기에 좋았더라 뭐~ 그러나 야~ 좋네~ 정말 아름답다~ 좋다~ 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대화에 감격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야~ 당신 정말 아름답구나. 정말 이쁘네. 옷이 참 몸에 좋다. 당신 곁에 있으면 즐겁다. 이 말이 얼마나 큰 사랑을 표시하고 용기와 힘을 주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런 감격 속에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모든 부정적인 세력을 멸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슬픔을 갖다주는 죄도 허물도 질병도 저주와 낭패와 실망과 고통도 죽음도 멸망도 십자가에서 다 몸찢고 피흘려 청산하고 내가 다 이루었다. 갚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기쁨을 위하여 여러분과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온갖 십자가의 모욕을 참고 견뎌서 다 이루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겨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은 기쁨의 영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마음이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령받은 사람은 성령이 말씀하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잖아요. 방언은 기쁨의 펌프인 것입니다. 물이 필요할 때 옛날에는 펌프를 해서 물이 콸콸 나오는 것처럼 성령이 충만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기쁨을 펌프질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28장 9절로 12절에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이것은 형식적이고 일반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교인을 갖다 놓고 늘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교훈을 더하니까 교인들이 교회와서 위로를 받지 못해요. 교회 와서 늘 얻어 맞고 꾸중을 듣고 기가 다 죽어서 시들어진 나무 잎사귀같이 어깨가 늘어져 가지고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주여~ 나는 어찌할까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와서 기쁨이 넘치고 즐거움이 넘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를 고함치고 박수를 치고 희망차게 예배를 드리고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받고 방언으로 기도하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다.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때 방언기도 하라. 슬픔 있을 때 방언으로 기도하라. 그러면 안식이 오고 상쾌함이 온다. 저는 슬플 때 방언으로 기도를 많이 합니다. 마음이 슬퍼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답답할 때 주님 앞에 주여~ 하고 난 다음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무슨 말로 기도한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알아서 기도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기도하면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즐거움이 없이 마음이 답답할 때도 방언으로 기도하고 나면 답답함이 사라지고 상쾌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 왜 하냐? 알지도 못하는 방언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시기 위한 펌프로써 방언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많이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평안해지고 기쁨의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교훈을 듣지 않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답답하기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기쁘고 즐거움을 가지고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0절로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슬퍼하고 탄식하고 금식하라고 했는데요? 그것은 특별할 때 우리가 살면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서 내가 일반적인 기도를 할 때는 마음이 시원하지 않고 답답하므로 기도원에 들어가서 그때는 금식합니다. 그리고 탄식하고 부르짖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그것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도때도 없이 금식하라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금욕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즐거움의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하기를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우리는 기뻐하기 위해서 태어난 우리들인 것입니다.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들은 위선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와~ 우리는 금식하는데.. 하고 얼굴을 슬프게 하고 장엄하게 해서 예수 제자들 보고 너희들은 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먹고 놀고 야단이냐. 그러나 그들의 금식은 뭡니까? 저녁때가 될 때까지 하루가 끝나기 때문에 저녁 때까지만 금식하고 밤새도록 밥먹고 아침부터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이 되면 또 잘 먹고.. 금식이 아닌 것입니다. 금식을 할 때는 진실로 24시간 금식하며 얼굴을 장엄하게 하지 말고 사람보게 하는 금식은 효과가 없습니다. 사람이 보아서 모르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면 저 사람 얼굴이 번질번질 하고 화장도 잘하고 깨끗하고 좋게 보이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사람보라고 하면 그 다음 효과가 없습니다. 사람이 안되었다. 금식하네. 배고프겠다. 슬프네. 그러면 나를 알아주는구나. 인정해주는구나. 마음에 위로를 느끼면 그로써 끝장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탄식하고 부르짖고 사람 앞에서는 동정을 받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3. 기쁨이 충만한 삶을 위하여
섯쩨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어떻게 하면 나는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근본을 찾아가면 기쁨이 충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면 기쁘겠지. 돈을 많이 모아 놓으면 돈은 퇴비와 같이 썩어져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퇴비는 흩어서 밭에 비료를 만들면 좋습니다. 돈이 많으면 흩어서 주면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많이 쌓아 놓는다고 기쁨이 오지 않습니다. 권력은 항상 또 다른 권력의 도전을 받기 때문에 늘 부딪히고 긴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기쁨은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참 기쁨인 것입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읽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야훼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저가 너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쁘고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만 생각하고 할렐루야하고 그 다음 하하 웃는 것입니다. 웃으면 행복해지고 웃으면 기뻐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하하하… 하나님 참 좋다. 할렐루야~ 하나님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혼자서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집에서 좌우를 살펴보고 우리 집사람도 없고 애들 없을 때 하하하하… 빨리 웃습니다. 혹시 또 아버지 미쳤다고 할까 싶어서... 아직까지 체면을 차린다고 도둑 웃음을 웃지만은 웃고 나면 마음이 시원하고 상쾌하고 정말 즐거운 것입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에 “만군의 하나님 야훼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읽고 묵상하면 말씀이 속에 들어가서 마치 발효하여 술이 되는 것처럼 기쁨을 발효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시편 32편 11절에 “너희 의인들아 야훼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의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살아야지 슬퍼하고 탄식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기뻐해야 돼요. 기뻐하라는 것은 기분 좋을 때만 기뻐하라 말 안했습니다. 기뻐하라는 것은 명령인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명령인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가 기쁨을 늘 강제로라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복음 전도를 하면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하고 남에게 하늘나라를 전하면 마음에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일하면 큰 기쁨이 오는 것은 사도행전 8장 5절로 8절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빌립은 교회 평범한 평신도요, 집사였습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복음증거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큰 기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 기쁨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란 복음의 향기인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기쁨의 향기가 나야되는 것은 꽃이 있어도 진짜 꽃은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가짜 꽃은 향기가 나지 않지 않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할 때 빌립보 간수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4절에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나는 예수 믿었는데도 덤덤하게 믿었는지 안믿었는지 기쁜 것 없던데요? 병들었습니다.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인 것입니다. 성품인 것입니다. 꽃을 가지고 있으면 향기가 나야 되는 것입니다. 향기가 안나면 종이꽃인 것입니다. 종이신앙을 가지면 기쁨이 없어요. 하나님도 기쁨이시고 예수님도 기쁨이시고 성령도 기쁨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기쁨이신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하나님이 같이 하시고 기쁨과 즐거움이 없으면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멀어지느냐. 기도와 찬송과 성경읽기와 예배를 등한이 한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사랑과 희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며 믿는 자에게 고난과 시련을 기쁨으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쁨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라 이것이 너희 힘이다. 울고 탄식하면 힘이 쫙 빠집니다. 그러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고난당해도 기뻐하고 영광이 나타날 때도 기뻐하라.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기쁨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업에 실패하고 자살하겠다는 사람을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 좌절하여 그저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성령님을 체험하고 크게 회개하고 자복하고 통곡했습니다. 그 후,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얼마나 기뻐하는지 저에게 와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하늘이 이토록 아름다우며 정원에 있는 나무들이 이렇게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전에는 몰랐습니다. 길가의 돌멩이도 모두 기뻐서 고함치는 것 같습니다. 손을 펴면 제 손이 웃는 것 같고, 이렇게 행복하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왜 진작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큰 슬픔을 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들어오니까 큰 기쁨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사업에 실패해서 죽고 싶다더니, 그 생각은 어디 갔습니까?”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인생은 굽이굽이 열두 굽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지금 실패했지만 제 마음이 기쁘고 힘이 생겼으니 다시 제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 할 수 있다는 힘을 주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기쁨을 가지면 어떤 어려운 역경에도 극복하고 나라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만 국민들이 마음에 좌절하고 슬픔이 꽉 들어차면 나라가 망합니다. 나라와 지도자가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기쁨을 줘야 되는 것입니다. 용기와 희망과 기쁨을 잃어버리면 그 나라는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생활이 고난스러우면 국민들이 낙심하거든.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렇게 되면 맥이 빠지고 아무 일도 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이 어떠한 역경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환경을 이길 수가 있는데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꺼리가 없습니다. 어디에 오직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꺼리가 있느냐. 예수 믿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주 안에서 소망을 갖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희망과 꿈을 갖고 일어나면 어떠한 환경도 정복할 수가 있고 나라와 민족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기쁨의 영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성령님이 오시면 그 어떤 환난과 고통에 처해 있을지라도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귀영화 공명이 있어도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그것은 쓴약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비록 초가삼간에 살지라도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요 기쁘고 행복한 곳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라서 우리의 기쁨과 행복은 바깥에서 찾지 않고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속에서 단물이 솟아 넘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기쁨의 샘물이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속에 예수님 모시고 속에 성령님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뻐하면 속에서 즐거움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에 사랑과 행복을 나눠주면 기뻐지는 것입니다. 남을 기쁘게 하면 나도 기뻐지는 것입니다. 남을 기쁘게 한다고 애를 쓰는데 내가 뭘 기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남을 도와줘서 남이 행복하고 기뻐지면 나도 기뻐지는 것입니다.

가정도 한가지입니다. 남편이 부인과 자식들을 기쁘게 해주면 자기가 기뻐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허물이 있는데 허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덮고 용서하고 사랑을 하면 사랑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되는 것이니 빨리 거둘 수도 있고 늦게 거둘 수도 있지만은 심으면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아내도 남편과 자녀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쓰면 처음에는 나 혼자만 애를 쓰는 것 같지만 그 기쁨이 세월이 흘러가면 자기에게 돌아와서 자기가 기뻐지는 것입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자기가 기뻐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몹시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봉사는 그 동등 혹은 그 이상의 기쁨을 자기에게 갖다 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고 나누어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가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에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기쁘고 즐겁게 해주면 내가 기쁘고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고 우리가 될 수만 있으면 많이 웃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세수하고 난 다음 거울을 쳐다볼 때 찡그리고 그대로 보지 마시고 한번 입꼬리를 위로 치켜 들고 한번 웃어 보십시오. 그것이 자기 마음에 굉장한 위로 가 되는 것입니다. 긴장을 풀어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웃는 것이 좋습니다. 옛말에도 웃는 얼굴에 뭐 한다구요? 침 못 뱉는다. 웃어요. 미워하는 사람 앞에서 하하하하.. 오래간만입니다. (찡긋) 이러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잘 웃는 사람이 환영을 받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처럼 “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 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요한복음 15장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냥 기쁨이 아니라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원래 인간은 기쁨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기뻐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때문에 기뻐하시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곁에 있으니까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놈의 마귀가 들어와서 타락을 시키므로 미움을 가져와서 슬픔이 꽉 들어차게 되고 만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고 마귀의 종이 되자 기쁨은 사라지고 슬픔과 우울과 절망과 암흑의 노예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면 삶에 힘이 생깁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에 “야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야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은 즉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기뻐 소리치고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데 우리는 기뻐하지 않고 긴 얼굴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 와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힘을 얻어 나가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2012. 2. 12. 주일설교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

에디터 추천기사

10월 3일 오전 은혜와진리교회 대성전(담임 조용목 목사)에서 ‘제2회 한국교회 기도의 날’이 개최됐다.

“남북 자유민주 통일하고, 악법·부정선거 근절되길”

성경과 하나님의 역사하심 절대 믿음 고백 대한민국 교회의 시대적 책임 다할 것 다짐 자유시장경제·한미동맹 지지, 다원주의 배격 세계대전 촉발을 우려케 하는 국제 정세, 동성애 합법화를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 마약 확산과 중독자 증가, 정치와 선거…

한국교회총연합 장종현 대표회장(왼쪽)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재명 대표 만난 한교총 장종현 대표 “며느리가 남자라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장종현 대표회장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만나 포괄적 차별금지법, 저출산, 의료사태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번 만남은 이재명 대표가 2일 오후 2시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 한교총 사무실을 방문해 이뤄졌다. 이 자리에는 같…

 2024 목회전략 콘퍼런스

레너드 스위트 “AI에 영혼 부여하려 말고, ‘예수 이야기’로 승부를”

AI가 인간 변화시키는 것 우려되는 시대 비인간화 위협에 맞서 ‘서사’로 무장해야 세계적으로 저명한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위트(Leonard Sweet)가 “인공지능(AI)에 인간의 영혼을 부여하려는 잘못된 시도는 잊고, 비인간화 인공지능에 맞서 서사를 강화하라.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이시바 총리 “하나님 안 계신다는 무서운 생각 한 적 없어”

야스쿠니 신사 참배하지 않아 교회 부속 유치원 다닌 적도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마음에 이시바 시게루(石破 茂·67) 전 간사장이 일본 자민당 총재에 취임한 후 1일 임시국회에서 102대 총리에 정식 취임한 가운데, 그의 기독교 신앙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

북한 억류 선교사

통일부 “北, 구금 10년째 김국기 선교사 즉각 무조건 석방하라”

북한 주민 돕다 불법 체포당해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아 김 선교사 칠순, 아내 계속 기도 통일부에서 구금 10년째를 맞이한 김국기 선교사에 대해 즉각 무조건 석방하라는 대변인 명의 성명을 발표했다. 통일부는 “오는 10월은 우리 국민 김국기 선교사…

포럼 빛 충현교회 축소 사회 교회론

“탈기독교 시대 교회, 떠난 성도들 돌아오게 하려면”

‘축소 사회에서 교회론을 다시 말하다’는 주제로 ‘포럼(Forum) 빛’이 9월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충현교회(담임 한규삼 목사)에서 개최됐다. 경제사회학 용어에서 유래한 ‘축소 사회(縮小 社會, a shrinking society)’란, 저성장 기조가 지속되면서 정치·경제·환경…

이 기사는 논쟁중

인물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