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2년 2월 19일
본문: 신명기 8:1~3, 14~16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
[신명기 8장 1-3, 14-16절]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낮아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우리 뒤에 무엇이 있고 앞에 무엇이 있느냐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느냐에 비하면 작은 문제이다.” 이것은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라는 물음을 가지고 살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라는 물음을 가집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삶의 이유’를 묻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의 사람이고, ‘어떻게의 방법’을 찾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의존하는 방식의 사람인 경우를 자주 봅니다.
겸손은 인간을 가장 품위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과 같으며,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독선적이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는 성품이 될 때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품의 기초로서 ‘신뢰’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자신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성품의 기초가 바로 ‘겸손’이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충청도 이발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외국인이 충청도에 가서 이발소에 들렸습니다. 이발소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는데, 충성도 이발사가 “왔씨요?”하고 인사를 합니다. 외국 사람은 이 말을 “What see you?"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보이는 것이 거울이기에 이발사가 영어를 잘 하는 줄 알고 ”mirror"라고 영어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발사는 이 말을 듣고는 외국사람 머리를 그대로 빡빡 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이를 어쩐대유”
혹시 여러분은 잘못 알아듣거나, 모르는 것임에도 아는 척하다가 낭패를 당한 경험이 없으신가요? 그런데 여러분,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교만입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도 그런 각도에서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방법을 찾다 보면 환경의 벽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삶을 결정하게 됩니다. 반면에 ‘왜’라는 물음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즉 내 속에서 솟아나는 그 무엇, 내 삶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에서 출발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내 존재를 바라보는 출발점이 절망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가운데 ‘실존(實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가운데서 실존을 발견하며, 칼 야스퍼스는 ‘난파(難破)’된 삶에서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방법도 의존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낮아져서 ‘겸손’의 성품 말고는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삶이 시작됩니다.
성경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완성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다듬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의 성품이란, 완성품으로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품 훈련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마치 칼을 쓸 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칼을 맡기는 것과 같으며, 총을 쓸 줄 모르는 아이에게 총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품은 늘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는지 않는지 알려하심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사십 년을 광야에서 걷게 하신 이유가 있구나! 우리를 낮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보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게 하셨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본성을 말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우리의 낮아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낮아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바로 겸손입니다. 40년 동안 철저하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낮추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광야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존재, 인간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겸손함은 인간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축복의 땅, 가나안을 앞에 놓고 모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이 무엇입니까? 개역 성경에서는 민수기 8장 14절이 “두렵건대”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Living Bible에서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that is the time to watch out…” 이 말씀은 신명기 8장 처음부터 시작되는 구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그 땅을 얻게 될 때, 모든 것이 풍족하게 될 때, 더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살 것 같은 세상이 될 때, 교만하여질 것을 염려하며 모세가 이 글을 기록한 것입니다.
교만의 가장 큰 위험이 무엇입니까? 본문 14절은 “여호와를 잊어버릴까”라고 기록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겸손한 때는 여호와를 기억하지만, 교만해지면 여호와를 잊어버릴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위대한 시편의 말씀은 시편 기자의 절망 가운데 피어난 아름다운 고백이었습니다. 시편 42편 1절에서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기록합니다.
여러분은 사슴의 갈급함을 아십니까? 옛날 근동지방의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날 때는 사슴을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막 한가운데서 물을 찾아 헤맬 때, 물에 주린 사슴을 풀어놓으면 물 냄새를 맡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 지경까지 이른 사슴이 사막에서 물을 찾아 달려가고 나면, 물을 먹지도 못하고 물 앞에서 폭 거꾸러져 죽습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보았던 사슴의 갈급함입니다. 이러한 갈급함 가운데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갈급하며 만들어져 가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 순간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존재,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나의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는 존재, 그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 앞에서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서 있는 겸손함, 이것이 은혜를 아는 자의 성품입니다.
성품의 훈련 장 ‘광야’
우리가 오늘 본문 가운데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훈련의 장소가 ‘광야’였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2절에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신명기 8장 15절에서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는 ‘광대하고’, ‘위험한 곳’입니다. 광대하다는 것, 사방이 다 뚫려 있는 곳, 사방이 훤하게 보이는 곳, 위험이 닥쳐 올 때에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바라볼 수 없는 곳, 그래서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곳, 그곳이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겸손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포기한 곳에서 물이 나도록 하셨으며 만나를 경험하게 하셨고, 전쟁 가운데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 가운데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광야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면, 그 시간이 겸손을 배우는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여러분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는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제가 지난 카자흐스탄 선교를 가면서 한 권사님 부부를 보면서 참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남편 권사님이 부인 권사님보다 더 열심히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유학을 가기 전 이매촌 동신 상가에서 사역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 정말 열심히 기도하던 두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동일하게 남편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나 교회에서 기도제목이던 두 남편이 부인보다 더 신실한 사람들이 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샘물을 내시는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광야의 훈련 기간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훈련의 기간을 지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여러분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프리카의 부족은 기우제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온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여러분을 붙잡아 주는 가장 강력한 끈이 무엇입니까? 소망을 잃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007년 여름 한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국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전 문화부 장관인 이어령 씨가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온누리 교회에서 일본 선교를 위해 만든 ‘러브 소나타’ 행사 중의 하나인 동경 프린스 파크 호텔에서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철갑의 논리로 무장하고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글을 써왔던 사람,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는 그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그의 삶에서 ‘광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불 뱀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딸인 장민아 변호사가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며 시력을 잃어버릴 위기에서, 그리고 자신의 손자가 자폐증에서 낫는 체험을 하며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기 파괴라는 극적인 것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죠. 이 땅에는 빛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둠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그레이 존’(회색지대인 궁창)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을 알아야 인간 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젊은 시절의 자진과 지금의 자진이 달라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는 스스로 옛날에 자신이 썼던 글과 지금 쓰는 글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제 교만한 현자에서 따뜻하고 겸손한 현자가 된 것입니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그의 시에 이 모든 것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이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 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광야’에 서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여러분의 힘이 되시고 해결자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곳 ‘광야’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겸손의 유익이 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겸손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삶이란 내가 좋고 내게 쉽고 내게 당연한 대로 사는 게 아님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성품이라는 사실. 성품은 그분을 내 형상대로 바꾸는 게 아니라 내가 그분의 형상대로 바뀌는 것이라는 사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생활 방식에 나타나는 가치관과 기준이 하나님과 다르다면 우리는 자신이 정말 어떤 신을 따르고 있는가 재고해야 한다. 하나님인가, 그냥 신인가?“
그러면 겸손의 성품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신명기 8장 16절입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겸손의 성품을 만들어 가신 이유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겸손의 성품은 사실, 우리가 가진 옛 성품을 벗어버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광야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자분 중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분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바르시나요? 먼저 이전의 자국을 지워야 합니다. 가구를 새로 칠할 때, 먼저 있던 페인트를 지워야 합니다. 자동차에 새로운 색을 입히려면 녹슨 페인트를 먼저 벗겨 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바로 우리의 옛 자아를 벗어버리는 것이기에 유익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겸손은 우리의 죄를 벗겨 내고 은혜로 덧입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1.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혹시 여러분은 ‘두더지 잡기’라는 오락을 해 보셨나요? 머리를 들이밀고 나오는 놈들을 때리는 게임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높아지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를 하나님의 손으로 높여 주십니다.
우리 사회를 흔드는 ‘학력위조’가 무엇인가요? 바로 교만 아닙니까? 자신의 능력과 실력 이상을 과장하려는 인간의 욕구 말입니다. 겸손이 은혜를 아는 자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라는 말을 합니다. 교만은 덜 익은 사람들의 자기 과시입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받고 보니까 별거 아닙니다. 목회를 하는데 필요한 것이 박사학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박사라는 것을 드러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학위를 받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지, 학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위 위조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complex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가진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낮아진 자를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높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높임입니다.
2.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잠언 11장 2절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교만은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겸손이 하나님 앞에 선 내가 부족함을 알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라면, 교만은 하나님 앞에 서보지 못한 죄인이 잘난 척하며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어떤 경제신문에 나온 자동차 판매 세일즈 왕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출근할 때, 신발 끈을 매며 자존심을 두고 간다.” 그는 세일즈를 하면서 자존심 상하는 일을 자주 경험한답니다. 자신이 준 명함을 가지고 밥을 먹고 이를 파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저건 단순히 종이에 불과하다. 나는 자동차를 팔려고 여기 온 것이지, 내 자존심을 확인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확인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내가 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나의 약함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기 위함입니다.
저는 큰 인물과 소심한 인물의 차이를 그렇게 구분합니다. 제가 만난 큰 사람은 어떤 사람과 만나도 이야기를 듣는 것에 집중합니다. 누구를 통해서도 배우려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쭙잖게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합니다. 이게 교만한 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길을 묻는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해야 할 것, 말해야 할 것, 그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겸손한 자의 특권입니다.
3.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부흥의 특권을 주십니다.
역대하 7장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부흥이 무엇입니까? 메마른 땅에서 샘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 땅의 황무함과 우상들을 부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우상에, 어떤 죄악에 빠져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들의 땅을 고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이라는 그릇 위에 소중한 축복을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다면, 겸손하게 우리에게 맡겨준 것을 잘 사용하고 나눔이 축복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삶을 회복시키시며, 부흥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무릎을 꿇는 자의 몫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의 성품을 가진 자의 특권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까?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겸손은 우리가 붙잡고 있었던 모든 것을, 내가 주인 삶은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품의 기초는 바로 신뢰와 겸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