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설교] 마음이 낙심될 때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야훼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야훼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열왕기상 19장 1~8)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마음이 낙심될 때”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음이 낙심되면 삶은 꿈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고삐를 놓아버려 방종하게 됩니다. 마음의 낙심이 악화하면 좌절하고 파괴적인 충동이 일어나 자살하거나 사건, 사고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방울뱀에게 계속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면, 뱀이 나중에는 화가 나서 못 견뎌 자기를 물고 찢습니다. 방울뱀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화를 낼 때 입에서 나오는 공기를 수집하여 액체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실험용 쥐에게 주사해 보니까 쥐가 즉사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화를 낼 때 우리 속에서 얼마나 무서운 독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고 화를 내면 긴장하여 혈압이 높아지고 맥박 수가 높아져 심리적으로 불안해집니다. 그럴 때 우리 몸의 면역 기능은 급격히 떨어지고 온갖 병에 걸리게 되고 걸려온 병은 몸을 잠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낙심되면 이처럼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몸에서 독성이 나와 건강을 해칩니다. 나아가 방황하고 방종하며 파괴적인 충동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자살하는 등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낙심하는 것입니까? 낙심 안 할 수 없겠지만 모두 다 낙심은 크고 적게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낙심하는 이유

과로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할 때 외부의 조그마한 스트레스를 가하면 낙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사람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야처럼 위대한 선지자가 좀처럼 나지 않았습니다.

그 엘리야도 낙심한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대결을 했습니다. 어느 신이 참 신이냐. 참 신을 우리 이스라엘이 경배하자. 그 신을 분별하는데 불로써 응답하는 신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우리 민족이 되어야 되겠다고 그렇게 선언하고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은 오전 내내 재단을 쌓고 짐승을 얹어 놓고 바알이여 바알이여 불을 주소서. 불을 주소서 고함을 쳤으나 불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저녁 소제드릴 때 엘리야는 자기 식대로 짐승을 각을 떠서 얹어 놓고 물을 몇 번이나 부어서 물이 철철 지나 흐르게 만들고 난 다음에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여 불로 응답하소서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38절로 40절에 “이에 야훼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야훼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야훼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이방인 선지자 450명을 칼로 죽이자니 얼마나 엄청난 긴장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야는 아주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바알신의 선지자들과 경쟁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리게 할 때 얼마나 애타는 기도를 했겠습니까? 불이 안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바알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데 어찌하든지 불이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심신을 다해서 기도하고 부르짖고 불이 내려오고 난 다음에도 이방선지자들을 다 데려다가 붙잡아서 시냇가에서 목을 쳤습니다.

다음에는 우상숭배의 형벌로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와서 이스라엘 온 전토가 불탈 때 그는 그 갈멜산에서 비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었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간절히 했던지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애타는 기도를 통해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하늘에서 손바닥만한 구름이 나타나더니만 엄청난 비가 퍼부어졌습니다. 그런 큰 역사를 하고 난 다음에 시내로 들어온 엘리야가 자기 방에 들어가서 좀 쉬려고 하는데 이세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왕의 이방인인 것입니다. 너가 내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50명을 칼로 죽였으니 내가 이맘때 반드시 너에게 보복하겠다.

엘리야쯤 되면 그런 말은 문제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에 불을 내리게 하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오던 땅에 기도를 해서 비를 내리는 그런 기도의 용사가 그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협박에 넘어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넘어갔습니다. 왜냐, 지치고 피곤해서 극도의 고난이 처했을 때 조금 스트레스가 가하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그 스트레스에 걸려서 무너지고 말았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절로 2절에 보면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 최후의 한마디 타격에 엘리야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장기간 시련과 고난을 받아 마음의 저항력이 약해졌을 때 그때 일탈을 가하면 맘이 무너지고 절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치고 피곤하고 고달플 때 와서 잔소리 하면 낙심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잔소리가 아니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독일의 세계적인 신학자인 몰트만 박사의 이야기를 제가 들어보았습니다. 그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의 포로로 잡혀가서 포로수용소에서 종살이를 하는데 이미 심신이 지치고 피곤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으니까 자기 고향땅 함부르크가 폭격을 받아서 다 불타고 자기 사랑하는 애인이 폭탄에 맞아 폭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일탈을 가했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완전히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자살하려고 하는데 포로수용소 원목이 성경 한권을 주어서 성경을 펼쳐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처참하게 죽었으나 사흘만에 부활한 사건을 보고 갑자기 마음속에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부활의 생명이 넘쳐나고 소망이 일어나서 그는 절망을 이기고 소망의 신학자가 되어서 오늘날 세계적인 신학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꿈과 소망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는 마음이 낙심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무너질 때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3절로 4절에 보면 엘리야가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야훼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기도한 적이 더러 있지요? 하나님 이제 데려가 주십시오.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더 살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여러분 스스로 마음속에 내가 요것밖에 못되었느냐. 여태까지 예수 믿고 주여 주여 부르던 내가 이 꼬락서니 밖에 안 되느냐. 탄식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약해지면 누구든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종도 낙심하니까 로뎀나무 밑에 앉아가지고서 내가 이제 충분히 들어가서 하나님 내 목숨 거둬 주시옵소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못한 졸자입니다. 그렇게 탄식을 했습니다. 아~ 그렇게 위대한 종이 낙심할 수가 있느냐. 참 창피하다.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엘리야만 낙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종 모세도 낙심한 적이 있습니다.

민수기 11장 11절로 15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망과 탄식을 듣고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을 다해서 그만 낙심되었습니다. “모세가 야훼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같이 위대한 종이 이스라엘 3백만 백성을 홍해수를 갈라서 인도하던 그가 하도 백성이 원망을 하고 욕을 하니까 견디지 못해서 낙심했습니다. 낙심하니까 주님 앞에 죽여 달라고 당장 죽여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사람이란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심히 오랫동안 시련을 당하고 스트레스를 겪으면 낙심해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을 보고 우리는 손가락질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마음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문제는 그렇게 낙심하고 고통스러울 때 마음을 소생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를 소생하든지 안그러면 남의 도움을 받아서 마음이 다시 살아나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는 동안에 이런 시련을 겪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으면 자기가 자기를 소생시킬 수 있는 수속을 밟아야 되는 것입니다. 감기가 들리면 자기 스스로 이길 수 없으면 약이라도 먹어서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소생시키는 것입니까? 어렵고 고난당했었을 때 제일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으로 결코 하나님은 그 시련 속에 우리를 내던져 놓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깨달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상한 갈대라고 꺾어서 발길로 차버리고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훅 불어서 꺼버리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상한 갈대가 못났지 않습니까? 못나서 바람이 날리면서 꼭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더라도 주님은 그것을 지켜서 끊어지지 않게 하고 꺼져가는 심지도 꺼지 않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로 8절에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고 결코 떠나지 아니하겠다 하셨으니 우리가 그것을 담대하게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했을 때 입을 꾹 다물고 원망하고 불평만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자이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입술로 스스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을 때 자기가 자기를 위로해야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하나님 말씀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낙심되고 답답하고 희망이 사라질 때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붙잡아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을 거듭거듭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입에 말해서 그것이 내 귀에 들려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의 샘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굉장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들어서 낙심되고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을 때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나니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나니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나니 수백 번, 수천 번이라도 자꾸 자기에게 들려주십시오. 오늘날 이 바쁜 시절에 다른 사람이 와서 들려주는 일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로하지 아니하면 누가 위로하겠습니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했으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된다. 주님의 말씀을 내가 대신 반복해서 말하면 주님께서 직접 말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굉장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깨달음을 마음속에 가져야 소생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과 기도와 성령님의 위로를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용하게 앉아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마음에 평안을 달라고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폭풍우가 휘말리는 것처럼 겉잡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그냥 아주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와 같이 낙심과 좌절, 절망하고 살 용기와 희망이 없어질 때 누가 도와주는 것입니까? 우리는 외마디 소리를 외치면서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여 주의 성령이여 마음에 평안을 주시옵소서.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내 마음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외마디 소리로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 구속의 은혜는 반드시 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로 8절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가 있고 선한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가 있지만 나 같은 죄인,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찌질이도 못난 나를 위해서 죽으셨으니 나를 얼마나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처참한 지경인데 나를 구원하사 그래도 예수 믿게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성령님께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옛날 보다는 좋아졌지 않습니까? 옛날에 죄악 투성이일 때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하나님이 지금 버릴 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이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 자격이 있을 때 사랑해 주는 것은 자격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겠지만 무자격할 때 빈손들 때, 벌거벗었을 때, 맨발 벗었을 때 우리를 사랑해주셨으니 그것은 진실한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나를 진실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해서 나도 나를 인정하지 않고 버릴 지경에 있는 처지에 있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끌어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시고 성령으로 구원을 받게 해주셨으니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봐라! 내가 내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고 죽게까지 하면서 너가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해 주었으니 내 사랑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나를 인정하고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면 자기를 비난합니다. 나는 너무나 못났다. 나는 처절한 절망이다. 자기를 비하하는 것입니다.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대량 생산되지 않았고, 일괄 조립된 상품도 아니다. 요사이는 무엇이든지 한꺼번에 대량 생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괄로 조립된 상품이 나오는데 그중에 하나로 내가 나온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당신은 창조주에 의해 신중하게 계획되었고, 특별한 재능을 받았으며, 사랑을 받으며 세상에 태어났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대량생산되지 않았고 일괄 조립된 상품도 아니다. 나는 창조주에 의해 신중하게 계획되었고 특별한 재능을 받았으며 사랑을 받고 세상에 나왔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은 특별한 사람인 것입니다. 똑같은 두 사람 중의 하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이 세상에 여러분 같은 사람은 하나밖에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우리 중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기에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한 거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고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까? 죄인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오시는 것입니까? 병든 자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습니다. 병든 자가 의원이 쓸데 있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주님이 필요 없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이 용서해주는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죄 있을 때 같이 와 계시고 연약할 때 와서 계시고 병들었을 때 와 계시고 무능력할 때 와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기시므로 내 스스로도 귀하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므로 무너진 마음을 소생시키고 승리할 수 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무너지고 괴로울 때 꿈과 희망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지 말아야 돼요. 더 이상 문제를 바라보지 말아야 돼요. 낙심하지 말아야 돼요.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산을 보면 도움이 없습니다. 태산 같은 실망을 바라보면 어디에서 도움 오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께 로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지 다른데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회개하고 눈물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면 반드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희망이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체험 안 해본 사람 모릅니다. 얼마나 이 은혜가 달콤한지 말로 다할 수 없어요. 염려와 근심, 불안, 초조, 절망으로 가슴이 무너지고 살 희망조차 잊어버리고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이 갑자기 성령으로 임하셔서 마음의 염려와 근심이 안개와 구름처럼 싹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을 점령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마음을 점령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같이 계심을 알게 될 때 마음이 소생되고 새로운 힘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고 언제나 긍정적인 말과 찬송과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생각이 여러분과 나를 건설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 마음속에 안개와 구름처럼 임하여서 마음을 점령해 주는 것입니다. 말을 긍정적으로 하고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16살까지 자신에 관해 17만 3천 개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반면, 긍정적인 메시지는 1만 6천 개에 불과합니다. 하루 평균 약 30개의 부정적인 메시지와 2.7개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는 셈인 것입니다. 사람은 그대로 놓아두면 긍정적인 말을 하기보다는 부정적인 말을 하기 쉽고, 이에 따라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성품이 되어 낙심하고 비관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다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자꾸 듣게 되면 마음이 부정적이 되고 생각이 부정적이 되고 행동이 부정적이 되고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부정적으로 하지 말아야 되고 생각을 부정적으로 하지 말아야 상처 입은 상황에서 마음이 무너졌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벨기에 앤트워프대학의 요한 데놀레트 박사는 미국의 심장학회(AHA) 학술지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무려 4배나 높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기 위해서 시몬 베드로를 만났었을 때 시몬이라는 이름을 떼셨습니다. 왜냐하면 시몬이 뭐냐 바람에 나는 갈대입니다. 바람에 나는 갈대는 여러분 의지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이름이 바람에 나는 갈대인 시몬이었습니다. 온 갈릴리 동네에서 시몬만 보면 바람에 나는 갈대 그런데 그 성경도 그와 같이 바람이 나는 갈대로 오늘 이러했다가 내일 지나면 변함없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하나님께서 베드로라고 바꾸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바람에 나는 갈대가 어떻게 베드로가 되느냐. 베드로는 뭐냐. 반석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바람에 나는 갈대인 시몬을 보고 너는 베드로라. 너는 반석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는 이름을 바꿔서 시몬이라고 부르지 않고 베드로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그 인생이 점점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 두 제자 중에 수제자가 되었고 기독교의 기초가 된 것이니 바로 베드로인 것입니다. 반석이 되었습니다. 그가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동안에는 언제나 바람에 나는 갈대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라는 이름을 바꾸어서 반석으로 바꾸었을 때 그는 반석이 된 것입니다. 생각이 반석이 되고 감정이 반석이 되고 행동이 반석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한가지 아닙니까? 그가 아브람으로 있을 때는 믿음이 흔들흔들 했습니다. 믿음이 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을 때 그는 믿음이 강력하게 되어서 끝까지 주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믿음도 우리가 온전하기 위해서는 이름도 좀 강한 믿음을 갖다주는 이름으로 갖는 것이 좋습니다. 김반석 얼마나 좋은 이름인 것입니까? 그러나 김화산 그런 사람은 화산 같은 성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에 지진이 났었을 때 일본에 패스포트가 안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방지진. 출입국 관리국에서 당장 돌아가라고 허락을 안해 주었습니다. 방지진... 그 이름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지요.

그와 같이 여러분, 여러분 이름도 강력한 것이 좋습니다. 나는 우리 아버님께 늘 감사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가난하셔서 돈 한 푼 제가 물려주지 않았고 교육도 못시켜 주었지만 좋은 것 하나 있었어요. 조용기. 용기를 내어라. 그 이름처럼 저는 하나님이 용기를 주셔서 어려운 역경을 물리칠 수가 있었던 것이 많습니다. 긍정적인 말은 위대한 꿈과 소망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며 창조적인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말과 찬송은 우리 마음을 소생시키고 새 힘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그 사람에 대해서 긍정적인 말을 해주면 그 말이 마음속에 깊이 박힙니다. 마음에 터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힘과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은 할 수만 있는 대로 하지 마십시오. 긍정적인 말을 해서 용기와 희망을 주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다시 살린 것은 하나님이 먹고 마시고 쉬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마음이 무너졌을 때는 먹고 마시고 쉬어야 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상 19장 5절로 8절에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야훼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휴식할 뿐 아니라 잠을 자므로 육체도 휴식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너무 일찍 깨고 늦게 자고 해서 잠이 모자라면 몸에 힘이 없어지고 조그마한 일에 낙심하기 쉬운 것입니다.

3. 밖의 성공과 축복을 안에서 찾아라
우리는 마음 밖의 성공과 축복을 마음 안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성공하면 그 성공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실패하면 바깥에 실패하는 것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다스려야 돼요. 여러분 생각이 항상 성공과 축복의 생각으로 가득차야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성공과 축복의 생각이 마음을 점령해야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의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으로 마음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을 바꾸어야 우리가 새사람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우리의 허물을 담당하셨으니 거룩하게 되었고 우리의 병을 담당하셨으니 치료하고 건강하게 되었고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셨으니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과 축복을 받게 되었고 우리 죽음을 담당하셨으니 부활, 영생, 천국을 얻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피 주고 사주신 그 은혜를 우리가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성공과 축복으로 꽉 들어차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마음을 지켜야 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했는데 우리는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바라봄의 법칙을 통한 믿음을 사용하는 것이 참으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 몸이 약한 사람은 건강한 자기 모습을 항상 앞에 갖다 놓고 바라보는 것, 실패한 사람은 성공한 자기 모습을 그려놓고 바라보는 것, 낙심한 사람은 축복받아 기뻐 즐거워하는 자기 모습을 그려 놓고 바라보는 것, 바라봄의 법칙을 여러분 사용하여 주십시오.

사람은 마음에 두 가지, 세 가지 것을 한꺼번에 바라보지 못합니다. 한 가지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언제나 승리를, 축복을, 건강을, 생명을 바라보십시오. 저는 항상 시간만 있으면 좋은 것을 마음속에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음은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때 그냥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라고 한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내 눈에 보이는 그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하리라. 항상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마음에 큰 성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바라보는 데가 하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땅만 바라보지만 우리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데 우리의 하늘은 어떤 하늘이냐. 성경이 바로 우리 하늘인 것입니다. 별들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별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아브라함이 별들을 헤아리라고 한 것처럼 성경을 바라보고 그 안에 별들인 약속을 헤아리면 그 약속의 말씀을 믿게 되고 믿음이 우리의 꿈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여러분은 성경을 펼쳐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과 나의 하늘은 성경에 내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 내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곳에 별들을 헤아리고 그 별들인 약속의 말씀이 마음속에 믿음을 갖다 주고 믿음은 하나님의 기적을 여러분에게 갖다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13장 14절로 15절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오늘날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구라파에 경제적인 폭풍이 불어오고 그 경제적인 어려움이 우리 한국에도 다가와서 집값이 반으로 떨어지고 사업이 안 되고 장사가 안 됩니다. 그러므로 안 되는 것만 자꾸 바라보고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하면은 점점 더 안 되게 되는 것은 마음속에 안 될찌어다. 안 되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안 되는 것도 믿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럴수록 여러분 하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캄캄하고 어둡고 의지할 데가 없어도 십자가의 보혈의 진리는 영원한 진리인 것입니다.

아무리 어둡고 캄캄하고 절망이라도 보혈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보혈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허락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 십자가를 통하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할 것을 믿는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말만 듣고 귀를 기울이고 그것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강하고 담대하고 용기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믿음을 얻고 현실을 이겨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은 다 다가오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변화 없이 항상 붙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의 지팡이는 십자가요, 주의 막대기도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아무리 캄캄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나와 같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여러분 그 믿음을 얻어서 흑암을 이겨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내 도움이 어디서 올꼬. 세상의 모든 낭패와 실망은 산입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야훼께 로다. 우리 천지를 지으신 야훼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매일매일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 모든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능력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흑암이 광명으로 무질서가 질서로 죽음이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이 십자가에서 넘쳐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살아서 여러분과 나를 위해 오늘날도 역사하신다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마음속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휴 요사이 생활형편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다.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맞았어요. 환경이 너무나 거세고 어려우니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집안 살림도 엉망인데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믿느냐고..

그러나 성경 말씀에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에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면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말한 것입니다. 한번 같이 읽어 보십시다.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주님이 거짓말 했겠습니까? 과장했겠습니까? 아니지요?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라 하는 것보니까 태산 같은 어려움을 명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 실패야 물러가라! 너희 가난아 물러가라! 너희 낙심아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라! 그러면 명령에 순종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옮겨질 것이요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 겨자씨는 씨앗 중에 가장 적은 것이 겨자씨인 것입니다. 100%의 씨앗 중에 1%인 겨자씨. 가장 적은 것이 겨자씨인데 여러분 우리가 마음속의 생각 중에 99%가 불신앙이라도 1% 믿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99%가 안 믿더라도 1%만 믿으면 충분합니다. 1%의 믿음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충분히 예수 이름으로 운명과 환경을 정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러가라고 원수를 물리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으로 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이 생겨납니다. 생겨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께서 명령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99%의 불신앙과 1%의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다고 할지라도 1%의 믿음만 가지고서 좋은 일을 믿고 좋은 일이 있으라고 명령하면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술의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 사람이 마음에 있는 것 말하고 나면은 말이 입 밖에 나가서 사라지고 만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에요. 마음에 있는 말이 말을 하면은 밖에 나가면 밖에 나가서 실제로 활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입 밖에 나간 말은 비로소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공과 축복과 은혜의 말을 하면 밖에 나가서 그것이 물줄기가 되어서 우리에게 물을 주고 그와 같은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우리가 말을 하면 말이 밖에 나가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고 난 다음 나가서 사라질 것이 말 아니냐. 천만에요. 나가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나쁜 말은 나쁜 열매를 맺고 좋은 말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늘 아프다고 말하면 병을 가져오는 열매를 맺습니다. 나는 건강하다고 말하면 치료의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하면 좋은 열매가 맺어지고 나쁜 일이 생긴다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입 밖에 나가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속에 있을 때는 가능성만 있지 아직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밖에 나가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하게 우리가 좋은 말을 입으로 시인하면 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결론>
마음의 실망은 인생의 밤입니다. 마음에 실망이 다가오면 인생이 캄캄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신자에게는 실망의 밤은 삶의 동굴로 나갈 곳이 없으나 신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실망의 밤은 그리스도가 우리가 나갈 수 있는 터널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므로 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터널은 나갈 곳이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동굴로 들어가면 다시 못나옵니다. 동굴에서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캄캄한 동굴로 들어가도 예수님이 같이 계시면 터널로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동굴 저 바깥에 환한 빛이 비치고 그 빛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하면 반드시 승리의 처소로 우리는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낙심하고 넘어짐으로 목사님 설교 아무리 해봤자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 와서 들을 때는 그럴싸하게 들리는데 집에 들어가면 옛날로 도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리고 낙심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특별히 짐승의 새끼는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네발로 걸어 다닙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어린 아이가 걸어다니는 것 보았어요? 동물은 사람보다 그 점에서 우수합니다. 나오자마자 기어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 것이니까.

그러나 어린 아기는 태어나서 12달이 되어야 비로소 일어났다가 자빠지고 일어났다가 자빠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빠지는지 압니까? 그가 서서 바로 걷기 위해서는 2천번을 자빠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옛날에 2천번씩 넘어져서 오늘날 걷고 다니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2천번입니다. 몸은 2천번 넘어져서 일어나서 걸어도 용하다고 박수를 치고 이리와 이리와 하는데 왜 생활에 실패를 20번만 하면 버림받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적어도 2천 번 넘어지고 난 다음에 성공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평균 2천 번을 넘어져야 비로소 걷는 법을 배우는 것같이 여러분 2천 번을 넘어져야 성공하는 것을 배운다고 생각하면 오늘날 이 세상에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넘어지고 일어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안 넘어지는 사람 없어요.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원래 넘어졌다가 일어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면 넘어지는 것 정상적인 것입니다. 넘어졌을 때마다 하나님이여 나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한두 번이 아니라 2천 번까지 일으켜 주시고 2천 번째 못 일어나거든 불구자로 여겨 주시옵소서. 어린 아이도 2천 번 넘어지고도 못 걸으면 그는 불구자인 것입니다. 좀처럼 2천 번 넘어진 사람 없어요. 결심만 하면 2백만 넘어지면 그 다음은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넘어졌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1%의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어도 무슨 일이든 해낼 수가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 어떤 해도 두려워하지 못하고 터널에 대해서 건너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찬 생각을 하며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고 말하며 기쁘고 즐겁게, 담대히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낙심하고 마음이 무너져서 어려움을 당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낙심하고 어려움에 넘어진 엘리야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잠을 재우고 물을 마시고 떡을 먹여서라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반드시 시험을 당하고 낙심하고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넘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결코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육신의 어린 아기도 2천 번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붙들어서 기어코 걷게 만들어 주는데 영적으로 넘어진다고 해서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일어납니다. 좋은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1%의 믿음이 있습니다. 입으로 시인하므로 여러분 신앙생활에 물을 주고 신앙의 집을 짓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다.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1%의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나는 입술로 고백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여 넘어지지 않고 일어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 2012. 7. 22.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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