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의 창조신학
‘칼빈주의적인 이외’라는 의미를 가진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자께서 성육신하신 후에도 인간 본성과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루었으나 육체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교리를 말한다. 라틴어 식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밖에”(etiam extra carnem) 계신다. 즉 성육신하신 이후에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육체 안에 포함되지 않고 성부와 함께 다스리신 분이다.
본래 이 말은 칼빈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넘어서도 존재하는 성자의 존재가 ‘속성의 교통’(communicatio idiomatum) 교리를 믿는 루터파 신학자들 때문에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소리를 듣고 루터파 신학자들이 개혁파의 교리에 대해 별명을 붙여준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윌리스(Willis, 1966)는 이 이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데오도르 툼(Theodore Thumm)이라 했다. 기독교 강요(Inst. 2. 13.4)에 보면 칼빈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을 떠나지 않고 하늘에서부터 내려왔으며, 놀랍게도 기꺼이 동정녀의 태에서 태어났으며, 지상에서 살았으며, 십자가에 달렸다. 하지만 그는 태초부터 행하던 대로 항상 세계를 채우셨다”고 말한다. 루터파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저 칼빈주의적인 이외”(illud extra Calvinisticum)라는 용어를 만들어 비판한 것이다.
이 논쟁은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조직신학자들은 칼빈 기독론의 독특한 특징인 이 ‘엑스트라 칼빈니스티쿰’이 칼빈 신학에 있어 중요하냐 그렇지 아니하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유명한 칼빈 신학자 니젤은 이것을 과소평가하고 반대로 오베르만(Heiko A. Obermann)은 칼빈 신학에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논쟁이 중요하고 심각한 이유는 단순히 성육신의 논쟁 때문만은 아니다. 성육신 논쟁은 성찬 시 그리스도의 임재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하다. 성찬에 있어서의 창조와 구속 논쟁에 있어 루터가 쯔빙글리를 향해 “당신은 (나와) 다른 영을 받았다”(Ihr habt einen andern Geist)고 한 것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나타내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는 로마 카톨릭과 루터교와 칼빈주의 뿐 아니라 모든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지속적인 논쟁의 소용돌이를 일으킬 재료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 한국 교회도 기독론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심각한 이단 시비 논쟁이 벌어져 있는데 성경이 말하는 곳까지만 말하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어야지 특별히 기독론에 있어 쓸데없는 사족(蛇足)을 붙이다가는 큰 논쟁으로 발전할 수 있으므로 전문가가 아니라면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인정하는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한국교회가 인정하는 건전교단의 교리를 이탈하는 언급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기독론에 있어 우리 개신교회는 전통적으로 (1) 그리스도는 참(완전한) 하나님이다(vere Deus) (2) 그리스도는 참(완전한) 인간이다(vere Homo) (3) 그리스도는 한 위격 안에서 두 본성(신성과 인성)으로 계신다 (4) 그리스도는 한 위격 안에서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혼합없이, 변화없이, 분열없이, 분리없이)구별되었다. 이 네 가지를 믿는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잘 신학적으로 표현하느냐가 중요하다. 이 4가지를 부인하면 이단이 된다. 그러나 이 4가지를 조화 있게 신학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내재적 존재(인간)가 초월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사실을 더 잘 설명하려다가 그만 덫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초월하신 그리스도를 내재(內在)의 언어로, 그것도 하등학문에 불과한 세상 과학으로 표현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구원은 단순, 명료하나 그 구원의 교리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단순하고 용이하게(brevitas et facilitas)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여기에 신앙과 신학의 묘미가 있다. 이 절묘한 하나님의 깊은 섭리의 광맥를 발굴해내는 것이 바로 신앙이요 신학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식으로 신앙을 너무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복음은 단순하나 복음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성도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늘 겸손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늘 미숙한 존재일 뿐이다.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이나 어거스틴이나 마르틴 루터는 모두 문제 많은 이단들이었다. 이들을 빼고 과연 기독교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누가 과연 사도 바울에게 신학적 정죄의 칼을 함부로 휘두를 것인가? 자신이 사도 바울보다 탁월한 신학자라고 할 사람이 과연 있는가? 인간은 함부로 심판장이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불분명한 것들은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살리는 성도, 살리는 목회, 살리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구원의 삶도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이 점을 명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앞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주님을 닮아가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