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3년 1월 13일
본문: 시편 128:1~6
설교: 김동호 목사
제목: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작년 말 막내 아들이 둘째를 낳았습니다. 우리 국희에게 남동생이 생겼습니다. 이름은 진욱이라고 지었습니다.
요즘 그래서 막내네 가정이 저희 집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국희를 매일 집에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은 국희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볼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저희 집에서 그다지 말지 않은 곳에서 살기 때문에 쉽게 오갈 수 있어서였습니다.
어쩌다 국희 집에 가면 국희가 펄쩍 펄쩍 뛰며 좋아했습니다. 할아버지 인기 아주 좋았습니다. 아이가 펄쩍 펄쩍 뛰며 좋아해 줄 때 얼마나 행복한지 이루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 인기가 만힝 떨어졌습니다.
매일 집에서 보니까 할아버지 주가가 떨어졌습니다. 집에 들어가도 펄쩍 펄쩍 뛰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는 만져도 안 되고 말을 걸어도 안 됩니다. 한번 안아 보려면 공을 제법 많이 들여야 됩니다.
동생이 생긴 후 엄마에 대한 집착이 커졌습니다. 늘 엄마가 제 곁에 있을 때는 엄마가 좋아 하부지가 좋아 하면 어쩌다가도 하부지가 좋아 소리를 들었었는데 이젠 어림도 없습니다. 동생에게 엄마를 뺏긴다는 생각이 아마 드는 모양입니다. 하여튼 할아버지 주가가 요즘 폭락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 제법 엄했습니다. 잘못하면 야단도 치고, 자주 들지는 않았지만 매도 들었습니다. 당연히 아이들이 저를 조금은 무서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손녀들에게는 되지 않습니다. 야단은 고사하고 ‘안 돼’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합니다. 매?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우리 국회는 자기 할아버지가 제법 유명한 목사(?)라는 거 잘 모릅니다. 남산에라도 운동을 가면 사람들이 알아보고 한 시간 정도 걷는 동안에도 몇 번 정도는 인사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거 모릅니다.
올해 약속은 벌써 꽤 많이 잡혔고 올해 약속을 잡을 수 없어 벌써 내년 약속까지 하고 있다는 것과 자기 할아버지가 비록 60이 넘었지만 페이스 북 팔로워가 6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도 전혀 모릅니다. 우리 손녀 딸 국희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만만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어쩌다 가끔 앉아 있는 저에게 슬슬 다가와 궁둥이 디밀며 와서 안기면 할아버지가 황홀해지고 행복해집니다.
그렇게 조금은 처량한 신세(?)된 요즘 저는 엉뚱하게 우리 하나님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꼭 나 같으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좋으셔서 큰 소리도 함부로 치지 못하시고 슬슬 우리 눈치만 보고 계시는 만만한 할아버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를 손주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하고, 반가워하고, 아주 가끔이라도 가서 안기면 어쩔 줄 몰라 황홀해 하시고 행복해 하시는 만만한 할아버지가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좀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만히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예 나님을 무시하는 깔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거의 하나님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 년 가까이 안식년을 볼낼 때 가장 신경을 쓰고 살았던 사람 중에 하나는 미국 경찰이었습니다. 겨우 밥 찾아 먹는 수준의 영어를 하는 내가 교통 위반이라도 해서 경찰에 걸리게 되면 난감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뭐 밥 찾아 먹고 공항 출입국 인터뷰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 수습이야 하겠지만, 그래도 아직도 지나치게 내성적인 저에게 경찰과 그 실갱이를 한다는 자체가 너무 신경 쓰이고 싫었습니다.
그래서 일 년 동안 미국에서 운전을 하며 늘 경찰을 살폈습니다. 아니 경찰 만나는게 싫어서 아주 모범 운전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일 년 동안 딱지 한 번 안 끊었습니다. 그만큼 경찰이 무서웠습니다. 저에게 미국 경찰은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만만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국 경찰만큼은 무서운 존재가 아닙니다. 저는 미국 경찰이 두렵고 무서워서 교통 신호 하나 어기지 않고 살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무섭지 않고 만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해 주신 원칙과 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어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죄는 우리들에게 정말로 치명적입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우리의 기회와 자리를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명예를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구원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기쁨과 평안과 자유를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죄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장관과 같은 고위직에 오르게 되려면 그 전에 국회 청문회를 거칩니다. 청문회에서 질문을 하는 국회위원들은 대개 그 후보자의 과거를 샅샅이 뒤지고 찾아 그것을 가지고 공격성 질문을 합니다.
꽤 많은 후보들이 진땀을 흘리며 망신을 당합니다. 그리고 꽤 많은 후보들이 망신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은 그 후보 자리를 사퇴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어쩌다 방송으로 보면서 다시 한 번 ‘죄의 삯은 사망’ 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죄를 짓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고 유익하다고 속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미끼입니다. 많은 것은 얻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엄청난 손해입니다.
우리는 가끔 주차위반을 합니다. 가까운 곳에 유료주차장이 없어서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잠깐 주차하는데 내는 주차비가 아까워서입니다. 그래서 자주 주차위반을 합니다. 그런데 매력적인 것은 주차위반을 할 때마다 걸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주차위반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날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주차위반이 옳고 그른 것은 둘째 치고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 번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표현대로 재수 없으면 걸립니다. 그래서 내는 벌금이 잠깐 주차에 내는 주차비의 열배 스무 배 정도 됩니다. 그런데 확률적으로 주차위반에서 걸릴 확률이 5%에서 10% 가까이 되거나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차위반은 생각 밖에 우리에게 큰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주차위반을 하고 딱지를 땔까봐 조마조마하면 편히 일도 보지 못하는 것까지 계산한다면 별것 아닌 주차위반도 우리에게 절대로 이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죄는 제일 싼 게 그 정도입니다. 주차위반 보다 조금만 더 넘어가도 그 댓가지불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의 명예와 자리 정도는 우습지 않게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죄는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 갑니다.
주일학교 전도사였을 때 아이들에게 죄를 지으면 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지를 가르쳐 주고 싶어서 이야기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들어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 동안 문화가 생활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당시는 이 이야기를 해 주면 아이들이 죄를 짓고는 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지를 이해하였습니다.
어느 날 어느 아빠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기 아들에게 저녁 시간에 내일 아침 아빠하고 어딜 가자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이가 얼굴이 하얘졌습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자지 못한 채 자기 방에서 초조해 하다가 밤 한 시 쯤 온 식구들이 잠든 틈에 화장실에 가서 발을 씻었습니다.
아빠가 어딜 가자고 한 것이었을까요? 네 그것은 목욕탕이었습니다. 요즘은 집에 언제나 더운 물이 나와서 일 년 내내 목욕탕 안가도 되지만 그 때는 목욕을 목욕탕엘 가야만 할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씻는 것이 불편한 참에 씻기를 게을리하기 쉬운 초등학교 아이들 중에는 까마귀 발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당당했던 까닭은 양말 때문이었습니다. 양말을 신고 다니니 까마귀 발인지 백조 발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목욕탕에는 양말을 신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아빠가 아침에 목욕탕엘 가자고 하니 기겁을 할 수 바께 없지 않겠습니까? 까마귀 발을 하고는 목욕탕에 못갑니다. 당시 그것을 모르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까마귀 발을 하고는 목욕탕에 못 가듯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아이들은 쉽게 이해해 주었습니다.
사탄은 우리들에게 쥐도 새도 모른다며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만 죄는 쥐와 새만 모르는 겁니다. 죄는 절대로 없어지지도 않고 숨겨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인터넷 상에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글을 올리면 사람들이 모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인터넷과 컴퓨터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글을 하나 올리는 순간 그것은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집니다. 자기는 지웠다고 해도 그 자료가 다른 사람의 컴퓨터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만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들을 쉽게 사냥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무도 모를 줄 알고 익명으로 함부로 막 쓴 글이 공개되어 그 망신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방송을 보면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신판 날에 나의 모든 죄가 다 백일하에 드러나 만인 앞에서 나를 공격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죄는 안 짓는 게 이익입니다. 죄 지으면 반드시 망합니다. 죽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의 삯은 사망이다.’ 라는 말로 말씀합니다. 맞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 맞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죄를 무서워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경찰을 무서워했더니 운전할 때 일 년 동안 사소한 신호 하나 어기지 않았습니다. 신호 하나 어기는 것이 그렇게 무서웠습니다. 우리가 제가 미국 경찰을 무서워했듯이 우리 하나님을 무서워하며 산다면 우리는 모두 당연히 죄를 무서워하게 될 것이고 당연히 죄를 멀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잠언 9장 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