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 목사 설교] 최고이신 그분을 사랑하기에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날짜: 2013년 1월 13일
본문: 마가복음 14:3~6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최고이신 그분을 사랑하기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마가복음 14장 3-6절]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 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우리는 첫 시간 최고이신 그분을 예배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두 번째 시간에는 그분을 사랑하기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최고이신 그분을 사랑하기에 우리 삶에 달라지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땅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습니다. 사실 구원 받는 것보다 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구원의 조건으로 어떤 훈련도 내걸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최고이신 그분을 선택하는 순간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단순히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데이비드 플랫의 [래디컬 투게더]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그 책이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시작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좋은 일을 하면서 본질을 잃어 간다고.”
문제는 ‘좋은 일’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좋은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택하게 된 이유는 딱 한 구절 때문입니다. 6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오늘날 교회는 경쟁적으로 좋은 일을 합니다.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좋은 일들이 이 교회를 세우신 주님께 좋은 일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4-5절에 보니까,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 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이 여인의 마음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마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이 여인의 행동이 “허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참 신기한 것은 왜 화를 내는가? 라는 것이죠.
저는 목회를 하면서 종종 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헌신이 누군가를 화나게 합니다. 대개 누군가의 헌신 때문에 자신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을 못 견뎌 하죠.


사랑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드러내고 싶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3-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글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직후에 우리의 주된 간증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면 그러한 간증은 사라지고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을 증거 하는 초보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분의 증인이” 됩니다. 이후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을, 영광이든 비난이든 핍박이든 칭찬이든 예수님께 친히 발생하는 일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 사람이 드러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 소홀할 수 있게 되겠죠.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요? 영적으로 충만할 때,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받는 능욕을 능히 감당하리라! 그래서 은혜가 충만하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지요.
결국은 우리의 삶에 주인이 되시는 그분을 최고로 생각할 때, 나는 최고가 아니어도 좋다는 말이 되겠지요?
오늘 본문 말씀을 좀 상상하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이 잔치 자리에 왔을 때, 주변 사람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로지 주님에게만 집중합니다. 향유 옥합을 깨는 것도, 그것을 붓는 것도, 전혀 주변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얼마나 비난받을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면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친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 때문에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때에 그런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냉랭하게 식은 심령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뜨겁게 연애하던 때를 생각해 보세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하지 않았나요?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목회자로서 목회자를 보는 것과 교인들이 목회자를 보는 것이 참 다를 때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제가 목회자로서 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라는 말이 최고이신 하나님이 드러날 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설교하는 목회자가 드러나고 그 말에 감동을 했기 때문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 속에도 끊임없이 제가 드러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최고이신 그분이 가려진다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요즘은 SNS를 통해 비난하는 글들이 난무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돋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참 좋은 말을 하는 것 같아도 자신이 드러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 뜻이 좋아도 방법이 좋지 않으면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죠.
조성민 씨의 자살을 보면서 이전에 먼저 목숨을 끊은 최진실, 최진영 자매를 생각합니다. 누군가 쉽게 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비수가 되고 영혼을 쇠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늘 고민했던 것 중의 하나가 그가 하나님께 불림을 받고 나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 내가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는가?”를 놓고 고민했다는 것이죠.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말씀을 보세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사랑하면 의식하게 되겠죠?
사랑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상대방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아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일부러 불순종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순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께 신경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듣지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실제로는 그분을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 상상의 날개를 펴고 출애굽기 20장 19절 말씀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종의 음성은 듣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거부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간증을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것은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왜 그토록 두려워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크 베일리의 [당신의 삶의 세워주는 제자도의 7가지 핵심]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성경 말씀에서 사랑은 어떤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 어떤 한 사람을 버리고 다른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계가 최상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마태복음 6장 24절을 통해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똑같이 섬길 수 없다. 때때로 돈에 그저 ‘익숙해지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굉장히 좋아할 따름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그 두 가지 우선순위를 모두 가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돈, 그 둘은 상반된 충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의 관심은 오직 그분에게만 집중되어야 한다.
이런 중국 속담이 있다. “어떤 집도 두 여인이 같이 살 만큼 큰 집은 없다.”
같은 이치로 어떤 크리스천의 삶도 두 연인을 둘 만큼 크지 못하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방법으로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우리 삶의 전면 중심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이상을 해야 한다. 그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당신은 그렇게 하는가?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영적 삶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분과 하나가 되어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그런 일을 경험합니다.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경우, 아니 그 반대도 있지요. 어떤 때입니까? 그 사람과 함께 있으나 다른 일에 분주하거나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있으면 음성을 잘 듣지 못합니다. 즉,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의도적으로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무엘 상 3장 10절에 보면 그가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실 그 전에 몇 번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지만,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특별한 때만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때는 다른 것에 마음이 팔려 있겠지요.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자녀로 사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죠.

그런데 우리가 “의식한다!”라는 것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부분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한다고 하면 어떤 위대한 순간에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진정한 의식이란, 가장 평범한 일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이르기 전 과정이 쌓여서 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 매일 부딪치며 살아가는데 일상적인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또한, 일상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행동에 마음이 상하기도 하죠.
어떤 글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더군요.
“우울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장 평범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고,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일을 하게 된다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을 의식한다는 것은 가장 평범한 일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평범한 일을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 가운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는 이렇게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에 대한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죠. 단지 지겹고 하찮게 여길 때가 많다는 것이죠.
오스왈드 챔버스가 이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보잘것없고 지겨운 일을 하면 신기하게도 그 일들이 거룩해집니다. 가장 진부하고 평범한 일이었는데, 그들이 하면 뭔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셔서 그 몸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즉, 모든 믿는 자의 몸을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는 성스럽고 놀라운 일들이 아니라 가장 일상적이고 단순한 일에서 증명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훌륭하고 유능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드려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중한 존재로 사용하실지를 생각해 보셨나요?


사랑하면 설레임과 떨림이 있겠죠?
요한복음 14장 23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진정한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인격적이죠!”
우리가 주님을 최고로 사랑할 때, 어떤 인격적 관계가 가능할까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말을 지키고 살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책이 있습니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책입니다. 저자인 케티스 데이비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을 향한 사랑은 나 스스로 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이 내게 넘치도록 부어주신 사랑’에서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우리 딸들은 좋은 일이 생겨도 “엄마”라고 외치고,
슬픈 일이 생겨도 훌쩍거리며 “엄마”를 찾는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심장이 마구 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늘 아버지의 심정도 그러하시리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 우리의 심장이 뜁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것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Steve Kim이 [Do Dream]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강의하는데 이런 말을 하더군요.
“가장 이타적인 것이 가장 이기적이다!”
방송에서는 2조 원의 신화라는 소제목과 함께 그의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더는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을 때, 누군가를 위한 나눔의 삶을 살기 시작했고 사랑과 행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사랑의 동기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사랑에 겨워 하루를 삽니다. 그런데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이 의미를 찾고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참으로 신기하죠.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제일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거죠.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과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 7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초청한 잔치에서 저녁을 드실 때입니다. 잘 알려진 죄인(아마도 창녀였을 것이다)이 등장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죠. 예수님의 발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그 눈물을 닦더니 300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발에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수군거릴 때, 누가복음 7장 47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을 한 번 곱씹어 보세요.
제가 설교할 때 수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큰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래서 아낌없이 향유 옥합을 깨뜨렸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네요.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다른 성경도 찾아보고 영어 성경도 보았습니다.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 for she loved much”

이 여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많이” 이게 향유 옥합을 깨뜨린 것을 의미할까요? 아니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왜 깨뜨렸을까요? 그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면 옥합을 깰 수 있었을까요? 결국, 예수님이 그 여인의 눈물을 보았을 때, 그 여인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셨습니다.
사랑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온전히 주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분 앞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의 팍팍한 삶을 다 드러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이 사랑하심을 보시고, 그 사랑만큼이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하면 누군가에게 무엇을 베풀어 주거나, 어떤 행위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보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은 사랑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너무나 잘 아셨고, 그녀의 눈물 속에서 결국,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여인이 주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김장환 목사님이 쓴 [큐티 365]에 나오는 ‘나는 너를 원한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아버지와 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좋은 친구와도 같아 서로 사랑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기 딸이 약간 변한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산책하러 가자고 하면 딸이 사양했습니다. 아버지는 매우 슬펐으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의 생일이 되자 딸은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직접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며 손으로 수를 놓아 만든 정교하고 아름다운 슬리퍼를 선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야 아버지는 지난 석 달간 있었던 일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러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가 만들어 준 이 슬리퍼가 정말 마음에 든다. 하지만 다음부터 내게 슬리퍼를 주고 싶으면 사도록 하렴. 나는 네가 만들어 주는 그 어떤 것보다도 너를 원한단다.”

우리는 주님을 위한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분과 충분히 교제할 시간을 드리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네가 한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 하지만 나는 너의 첫 사랑이 그립구나.”
주님은 나와 대화하고 싶어 하십니다. 조용히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바리새인들과 비교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함을 받은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있었지만,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왜 그럴까요? 왜 그들은 서로 화가 났을까요? 정말 그 여인이 향유를 허비하기 때문일까요? 아니지요. 그들이 그 여인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 때문에 화가 났죠.
오늘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마가복음 14장 9절에 보면,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예수님이 무엇을 기념하고 싶으셨을까요? 향유 옥합을 깨뜨린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똑같이 잔치에 참여하고 있으나 사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를 말입니다.
이 여인이 누구였는지 그 이름에 대하여 견해가 분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리고 무덤을 찾던, 부활하시던 때 자리를 지켰던 여인 중에 이 여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화를 내던 이들은 십자가 앞에서, 죽음 앞에서 모두가 흩어져 버렸습니다. 복음이 전파된 것은 바로 그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매우 그럴싸하게 자신을 포장해서 이야기하고, 누군가의 헌신을 비난해도, 하나님이 분명히 아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그 여인이 주님을 사랑한 만큼 죄가 사하여졌고, 그 여인은 그 감격 속에서 삶을 삽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헌신이 있고, 헌신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입고, 그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또 헌신하고. 이 사이클이 깨어지며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우리 신앙의 고민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이 감격을 매일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죠.
우리 교회 영성프로그램 BTD가 있습니다.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일단 가면 은혜를 받습니다. 그곳에서 은혜를 못 받으면 이상하죠.
그런데 은혜를 받고 얼마나 가느냐의 문제입니다. 대개 길면 한 달을 가고, 짧으면 1주일을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영성훈련 프로그램이 인간의 감정을 건드려서 잠시 착각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때 경험했던 사랑을 다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식어가는 것입니다. 그 식은 자리에 다른 것이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제가 결혼주례를 하면서 종종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감정을 타고 오지만 결혼 생활은 우리의 의지가 필요하다!”라고 말입니다.

최고이신 그분을 사랑하게 된 순간, 우리의 헌신이 그 사랑을 반복되게 하지 않을까요?
오늘 잔치 자리에 참여한 바리새인들 역시 대단한 결단이 아니었을까요? 주위에 보는 눈도 많은데, 정통에서 이단시 되고 있는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온전히 열고 받아드릴 만큼의 사랑이 없었던 것이죠.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최고이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하라는 것이죠.
그 사랑 때문에 계속되는 감격을 경험하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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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윤리와 학생인권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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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세미나가 ‘생명윤리와 학생인권조례’를 주제로 21일(목) 오후 2시 30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됐다. 이상원 상임대표는 환영사에서 “학생인권조례는 그 내용이 반생명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고, 초‧중‧고등학교에서 사실상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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