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6): 존 밀턴의 <실락원>을 중심으로
런던 시내 현대식 건물들 한복판에 가면 눈에 띄는 고도가 있다. 고도가 된 이 건물은 밀턴이 묻혀있는 세인트 자일스 크리폴게이트 교회이다. 밀턴은 런던에서 부요한 공증인이며 음악가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런던에 있는 성 바울로 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크라이스트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다. 학창시정 밀턴은 그의 도덕적 결벽성과 외모의 여성성 때문에 ‘크라이스트의 귀부인’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이는 밀턴의 인간적 면모를 가장 잘 말해주는 일화다.
교육적 배경 뿐 아니라 실제로 밀턴의 삶은 런던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태어난 곳이 런던의 브러드 스트리트이며, 초기 시편들이 탄생한 곳도 런던 근교이다.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파크 부근 집에서 <실락원>을 다시 쓰기 시작하였고 페스트를 피하여 이사해 살던 집도 런던 번힐 거리이다. 지금은 이 집들이 모두 없어지고 첼폰트 세인트 자일스의 집만이 남아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런던 여행길에서 나는 어느날 기념관이 된 ‘밀턴의 집’을 방문하였다. 빨강 벽돌 로 된 2층 건물로,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농가 같다. 집 뒤에는 아담한 뜰이 있고, 뜰 위로 하오의 태양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집 내부에 들어서자 조그마한 서재 안 모든 물건들이 밀턴의 숨소리를 듣게 했다. 벽에 걸린 초상화와 <실락원> 초기 간행본, 토머스 엘우드의 저서…, 나는 밀턴을 기억나게 하는 이 추억의 물건들 속에서 작가의 영혼과 조우하였던 것이다.
토머스 엘우드(Thomas Elwood), 그는 밀턴의 친구로(어떤 기록엔 제자로 나온다), 밀턴에게 ‘낙원 회복(Paradise Regaind)에의 꿈’을 꾸고 실천에 옮기도록 만든 사람이다. 밀턴은 <실락원>을 쓴 이후 4년 동안 구상 끝에 <복락원(Paradise Regaind)>을 집필한다. <복락원>은 여러 일화를 동반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엘우드와의 에피소드는 실제로 복락원 탄생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 독실한 퀘이커교도였던 엘우드는 어느 날 밀턴에게 이렇게 동기를 부여한다. “그대는 <실락원>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얘기를 하였는데, 낙원을 다시 찾는 것에 대하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가?”
나는 좁은 서재에서 숨죽이며 발돋움을 하고 눈을 감았다. 밀턴이 <실락원>을 집필한 시기를 보통 1658년경으로 보는데, 그가 앞을 볼 수 없었던 시기는 1652년경부터였다. 이미 장님이 된 밀턴에게 이 대작에 대한 창작의욕을 복돋우고 격려한 그 힘이 어디서 온 것일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밀턴은 너무나 운명이 기구하다.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힘이, 그리고 여유와 평화는 너무나 늦게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가정적으로도 밀턴은 행복하지 않았다. 첫 번째 아내는 한동안 밀턴을 버리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으나, 세 딸만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다. 두번째 아내도 결혼 후 일년 남짓 지나서 죽는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62년 결혼했던 세번째 아내는 끝까지 헌신적으로 밀턴을 돌본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밀턴은 정치적으로도 순탄치 않은 시대에서 한 생을 살았다. 밀턴 연구가들이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활동은 역경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실락원>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이 시련 속에서 산출된 보배인 셈이다.
그리고 이 시련 속에서 <실락원>이라는 대작을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은 것은 크라이스트대학 시절 그토록 철저하게 기독교적 도덕과 윤리관에 입각했던 그의 삶 자체가 근본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생각의 근거는 <실락원> 여러 부분에서 보인다. 여기서 밀턴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예찬하고, 죄의 원인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암흑 속에서 자신을 지탱시켜준 것은 요한일서 1장 5절 말씀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나도 그날 밀턴의 방에서 이 말씀을 기억하였다. 얼마나 많은 밀턴 애호가들이 그의 서재에서 이 성경 말씀을 상기하였을까. 밀턴은 그때마다 미소 띤 얼굴로 초상화 속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