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우리로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1)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화해와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에 부부의 만남, 부모자식의 만남, 형제자매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원수와의 만남 등 인간의 삶은 피할 수 없이 만남으로 시작하고 만남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남이 귀중하지만 우리들은 만남을 위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거나 노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연 그대로 내버려놓고 좋은 대화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우연히 잘되어 갈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만남의 노력 없이 대개 작고 큰 불화를 그냥 눌러버리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부부간에 문제가 생기면 눌러버리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의 문제도 터놓고 만나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눌러버리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문제도, 국가적인 문제도,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버려서 자연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불화가 정신적인 암이 되고 파괴력을 가지고 큰 슬픔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중요성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울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늘 거울을 들여다보시고 나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하나님 좀 보여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간단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너 거울 있지? 예.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느냐?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바로 여러분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으실 때는 여러분과 사랑을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좋아하는 형상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이 매일같이 어떻게 데리고 살며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과 대화를 통해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난 다음 우리에게 권력을 주셔서 하늘의 새, 땅에 있는 짐승, 바다에 있는 고기, 사물을 다스리게 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능력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최소, 최고, 최선의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존재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만나기 위해서 우리가 비록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과 21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를 위해서 만들었다. 그러므로 나를 찬송하게 하라.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에 묶여서 심히 더러워졌을지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서 지은 사람들이니 내 곁에 오게 하라. 내가 그로 하여금 나를 찬미케 하도록 만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매일 매일의 생활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엄청난 행복과 기쁨을 갖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기쁨을 가지고도 즐거워하는데 하나님은 기쁨이십니다. 사랑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사귀고 산다면 우리에게 슬픔은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만남 중에 최고의 만남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최고로 중요한 것입니다. 신명기 33장 29절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야훼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런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하나님을 만나서 기쁨을 가지는 기쁨의 종교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을 기뻐하니 찬양소리가 그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여하간 기쁨이 종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해되면 그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도 ‘기쁜 소식’이라고 우리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슬픔이 많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 혼자 있을 때 같이 있을 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불평과 원망과 탄식이 기쁨보다 더 많습니다. 너무나 우리 마음속에 슬픔이 많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오랫동안 교제가 되어지지 않고 단절이 와서 끊어지고 마는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이 같지 아니하고 상처를 주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2.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
불안과 불행과 슬픔과 고통이 다반사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잘못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마귀하고 만나지 말아야 되는데 잘못 만난 것입니다. 오늘날도 전문가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누구며 읽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인가에 따라서 5년 후에 우리 인생이 달라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만났으니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나가서 마귀와 만나서 마귀와 대화했기 때문에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날 때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나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유혹에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야 그리스도를 따라서 교회를 나오게 되고 하늘나라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와 잘못된 만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저주와 병과 가난과 죽음 등의 포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담보고 말씀하기를 너 아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지도를 하지 아니하고 아내의 말에 따라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었으므로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저주를 받고 가는 곳마다 생활에 가시넝쿨과 엉겅퀴가 납니다. 가정에도 가시넝쿨과 엉겅퀴, 사업에도, 생활에도 가시와 엉겅퀴가 나서 찔리고 상처입고 고통을 당하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만나지 않고는 인생에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은 목적이 없습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잖아요.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삶의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또 죽음밖에 없으므로 죽음의 불안과 공포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재산만 있으면 잘사는 줄 아는데 우리 한국의 최대의 재벌이었던 이병철씨가 세상을 뜨기 전에 질문을 던져놓고 세상을 떴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느냐. 그 질문을 던져 놓고 대답을 얻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말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세상을 떠나게 되면 점점 더 헛된 것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누리고 재물도 많고 쾌락을 많이 쫓은 솔로몬이라는 유대의 왕은 그가 죽기 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전도서 1장 2절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사람 철학은 간단해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2장 22절로 23절에 보면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삶의 목적을 찾을 수도 없고 만사가 허무하고 무의미하며 결국 절망과 죽음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제가 이 강단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면 저와 함께 교회 개척에 애를 쓰고 힘을 쓴 서대문에서 온 성도들은 참 너무 마음이 안되었습니다. 다 청년 때 왔는데 할아버지가 되고 아줌마 때 왔는데 할머니가 되고 젊음을 좀 돌이켜 주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의 단절은 그보다 더 무섭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하나님의 식구인데 하나님과 단절 되어서 교통이 없으면 우리의 삶속에 어디에서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를 나누어 살아야 참 행복을 갖고 살 수 있지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면 큰 슬픔과 불안과 고통 속에 살다가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젊을 때보다도 나이를 먹으면 마음에 변화를 다스리기가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마음에 여러 가지 고통을 다스릴 수 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에 다가오는 슬픔을 다스리기가 힘이 들어요. 오직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간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마음에 평안이 다가오지 인간적인 수단으로는 마음의 평안이 오지 않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성령충만하여 하나님과 늘 같이 있기를 힘써야지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와 그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 심신이 마귀에게 도적질당하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까?
3.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마귀와 그의 나라
온 세상은 마귀의 정사와 권세가 지배하고 흑암의 나라가 꽉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 마귀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우리가 교회 문밖에만 나가면 저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불순종의 아들, 안 믿는 사람들의 배후에는 악령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 뜻이 아닌 악령의 뜻을 쫓아서 인생에 불의를 가져오고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이 된 인간은 죄의 주인인 마귀의 손아귀에 잡혀 꿈쩍하지 못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죄란 뭡니까? 하말티아라는 것이 헬라어인데 죄는 화살을 과녁을 향해서 쏘았는데 과녁을 맞추지 않고 빗나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이 세상에 빗나가게 만든다. 정의를 빗나가게 만들고 거룩함에서 빗나가게 만들고 행복에서 빗나가게 만들고 평안에서 빗나가게 만들고 모든 것 다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를 덮어 씌워서 우리가 모든 일에 실패하게 만들고 우리의 생애에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여 슬픔으로 인생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8절에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우리는 마귀의 종이 되어 자유를 잃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리가 마귀의 종이 되어서 온갖 더러움과 추함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4. 우리와 화해하기를 원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구원하려면 죄 없는 인간의 탄생과 대신 죽는 사역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는 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얻은 피는 다 죄에 물든 피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물든 피를 유전 받아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있는 사람이 다른 죄 있는 사람을 위해서 대신 속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살려주려면 죄 없는 사람이 태어나야 되고 그 사람이 또 자기 몸을 드려서 우리 속죄재물이 되기를 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태어납니까? 아버지 없이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핏줄을 이어주는 아버지 없이 태어나야 되는데 바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은 인생의 핏줄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없이 성령으로 태어나게 하셨으므로 그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같이 살았으되 세상의 죄악의 피는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가 굉장히 갈등을 느꼈습니다.
죽는다는 것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라는 가장 극악의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야 하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는 여러 번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옮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굉장히 갈등을 하고 고민을 했으나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서 견뎌냈던 것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이 보내신 인생이 죄 있는 우리들을 대신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몸 찢고 피를 흘리므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마귀의 가장 큰 실패는 예수님 같은 분이 태어날 것이라고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태어나서 그 고통스러운 죄악의 재물이 될 것이라고 마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인생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담과 하와를 자기 부하로 만들고 죄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영원히 이 지구상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기의 종노릇 할 것이요 인간의 삶은 마귀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밖에 없다고 하나님은 영원히 이 지구의 운명을 마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인간이 탄생하고 죄 없는 인간이 우리 위해서 대신 죽었으므로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은 예수님 오시기 약 7백 년 전에 예언한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 보십시오. 예수님은 인간으로써 오셔서 죄의 값을 이처럼 지불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가만히 알지 못하고 있으면 큰일입니다. 여기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나 때문에 그가 나 때문에 죄악을 짊어지고 허물을 짊어지고 병을 짊어지고 저주를 짊어지고 죽음을 감당해서 십자가에서 다 지불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날 위해서 지불했으면 우리가 마땅히 그 열매를 받아야 될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용서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허물의 용서를 받아야 마땅하고 병에서 고침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저주에서 해방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어서 천당 가야 마땅합니다. 지옥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위해서 이 땅에 내려와서 33년을 계셨고 그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죽은 것은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하셨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 신앙보다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값 주고 사놓은 것을 여러분이 마땅히 취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는 말씀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것은 단호하게 저항하고 마귀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은 내 것이라고 주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고서 종교적인 신앙만 가지고 왔다갔다 한다면 참 슬픈 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몸 찢고 피를 흘려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는데 왔으면 우리가 기도를 하고 악착같이 주님이 주신 것을 받아야지요. 여러분 영혼이 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의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되고 범사에 형통하여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되고 건강하여 원하시면 100살까지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무리가 아닌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6절로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의로운 사람인 것 같으면 죽어줄 사람이 있겠지요. 선한 사람 같으면 대신 죽어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죄인 되었을 때 엉망진창으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버림받아야 할 이런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을 대신 죽으라고 내보냈으니 그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기에 그렇게 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맏아들을 내보낼 때 꼭 우리를 위해서 죽으라고 내보내신 것입니다. 몇 번이나 예수님은 안 죽고 그냥 천국 갈 수 없으냐고 간구해도 대답 안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얼마나? 예수님을 주어서 여러분 대신 죽게 할 정도로 사랑을 한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사랑하고 계십니다. 제가 종종 그런 말을 합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조용기! 네가 보기에는 모양 없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속이 후련하고 좋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집에 가셔서 주무시기 전에 거울을 쳐다보시고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고 한번 외치십시오.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6시간 고난당할 동안에 우주적인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몸 찢고 피 흘린 재물을 통해서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마귀는 아담의 죄 때문에 죄를 이유로 해서 아담을 붙잡고 세상을 아담에게 주었는데 세상을 점령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인간의 모든 죄를 청산하고 불의를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서게 되니까 이제 마귀는 아담의 자손들을 잡고 있을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이제는 너희는 나의 백성들을 붙잡고 있을 권리가 없으니 물러가라! 지구를 내 놓아라. 이 지상을 점령하여 다스리던 정사와 권세를 내놓아라. 마귀는 안 내놓겠다. 여러분 우리 눈에는 안보였지만 영적 거대한 전쟁이 갈보리산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때 만일 예수님께서 아이구 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아버지 나는 십자가에서 내려 갈렵니다. 그렇게 했으면 마귀의 영원한 승리가 되고 인류의 구원의 희망은 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끝까지 참았다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내가 다 이루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내가 다 이루었다. 마귀에 붙잡힌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를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일도 이루어줬고 허물을 사하여 거룩하게 만드는 일도 이루었고 병을 고치는 일도 완성을 했고 축복해주는 것도 다 완성했고 천국 가는 것도 다 완성해서 모자람이 없이 내가 다 이루었다. 그러자 마귀의 정권은 무너지고 군대는 해산되었습니다. 우주에서 무너졌습니다. 그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 세상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하나님의 군대의 집회 장소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리 하나님의 정사와 권세가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주의 천사들이 정사를 가지고 우리를 다스리며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이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마귀보다 많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이제는 긍정적으로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사랑받고 있다. 도움 받고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되고 항상 희망찬 꿈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진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좋아진다. 나는 더 행복하게 된다. 희망찬 꿈을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서 여러분에게 희망을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야 돼요. 우리 주님 백성들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어야 돼요. 여러분은 잘될 것을 믿어야 돼요. 좋은 일이 생겨날 것을 믿어야 돼요. 평안이 있을 것을 믿어야 돼요.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한마디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매일같이 새로운 날이 다가올 때 오늘도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이 돌보아 주신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 부족함이 없으니까 오늘도 만족하게 살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그렇게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정권은 이제는 공중에서 법적인 존재성을 잃어버리고 쫓겨났습니다.
정권은 바뀌었습니다. 마귀의 정권은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권이 이 우주를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마귀에게 속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여러분께 나타내서 여러분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로 16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우리가 다 화평을 가져올 수 있다. 가족이 화평하고 형제가 화평하고 이웃이 화평하고 원수가 화평할 수 있도록 보혈의 화평의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5. 화해의 시작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시기를 원하셔서 여러분과 나를 품에 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 죄가 하도 더럽고 추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우리를 보고서 밀어내고 저주하시고 끌어 안을 수가 없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보혈을 의지해서 나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와 원수 된 담을 허물어버리시고 죄악을 다 멸해버리시고 여러분과 나를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걸머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나타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국 내 천국, 예수 기쁨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화목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로 19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친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의 친자식이 되시고 여러분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쭈삣쭈삣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큰 사랑으로 여러분을 품에 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아바 아버지가 되십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아바 아버지, 그분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제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부정적인 마음 없이 아바 아버지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나가니 붙들어 주시고 안아주시고 돌보아 주시옵소서. 탕자가 아버지를 떠났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니 아버지가 뛰어나가서 탕자를 안고 환영을 해주었던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품어서 안아주시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의로운 옷을 입히시고 여러분과 나에게 성령으로 인을 쳐서 성령의 반지를 끼워 주시고 예비한 신발을 신기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나가자만 신발이 닳도록 일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셔서 이제 좋은 신발을 신게 해주시옵시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살찐 기쁨을 가지고 살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에 살지 않고 기쁨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살고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화목케 하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했으므로 우리에게 화목해 하는 능력을 주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말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원수와 화목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화목되고 부모 자식 간에도 화목되고 형제간에도 화목되고 이웃 간에 화목되고 원수하고도 화목되게 하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전혀 화목할 수 없는 사이에 화목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니 놀랍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누구와 원수 되더라도 화목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는 화목하십시오. 가족들과 화목하고 이웃들과 화목하고 심지어는 원수하고도 화목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고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처절한 죽음 안에서 우리에게 화해의 두 손을 하나님은 내밀어주시고 예수님은 여러분과 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매 화목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아버지 품에 안기고 아버지는 우리를 품에 품으시고 이제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으로 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원수가 아닙니다. 친 아버지인 것이요 친 자녀들이 된 우리들은 하늘나라의 모습을 쫓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도 여러분과 같이 계시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수는 항상 있고 고난은 항상 다가오지만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원수 앞에는 오히려 주님께서 상을 베풀어서 여러분을 만족케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외롭지 않습니다. 슬플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메마른 땅에 생수와 같이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광풍을 피하게 해주시고 폭풍우를 가리워 주시고 마른 땅에 샘물나게 해주시옵시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같이 되어서 여러분과 항상 같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마음속에 누리며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9절로 11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을 이루었으니 화목을 이룬 사람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기쁨이 화목된 사람들에게는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이제 기쁨을 주시는 역할을 하시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앞에 매일 기도하고 기쁨을 요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화해의 십자가는 우리가 생각할수록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한국이 낳은 역사적인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CCC 대학생 연합회도 만들어서 젊은이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세상을 뜨셨는데 그가 한 말 중에 기억나는 것은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죽은 곳이다. 예수님이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사랑의 심장이 터진 곳이 바로 십자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손 붙잡고 예수님은 내 손 붙잡고 아버지의 손 붙잡고 심장에 손을 얹어 화목을 시켜놓고 그 심장의 피가 터져서 죄를 갚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처절한 죽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해의 두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은 공짜로 화해한 것 아닙니다. 대가가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펑펑 쏟아서 우리 화목의 끈을 굳세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을 잡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을 붙잡아서 죄를 씻어주고 의롭다고 해주고 화평을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놀라운 일인지 이 모든 일이 선물로 주시고 믿음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로운 행위를 해서 화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이 선물로 용서와 화해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화해를 가로막는 마귀와 죄, 불순종 등은 다 십자가에서 청산되었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할 때 청산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막을 힘, 막을 자가 없습니다. 마귀의 거짓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화목과 사랑, 평안과 기쁨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다시 버림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과 화해한 결과로 기쁨도 평안도 소망도 우리의 것이므로 우리가 구하면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텅빈 가슴을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오른편에는 즐거움이 넘치는데 우리는 이 분을 아버지로 부르고 화목해서 아침 저녁으로 만나고 항상 그분의 은혜 가운데 있으니 기뻐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뻐해야 돼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기쁨으로써 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은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뻐하면 그것이 약이 되어서 장수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뻐하기 때문에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시간에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내가 먼저 즐거운 웃음을 웃고 기뻐하면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기쁨이 올 때 내가 웃겠다는 말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예수 이름으로 기뻐 해보십시다. 하나, 둘, 셋! 하하하.... 아, 진짜 기뻐지네요? 할렐루야~ 믿음으로 해보겠다고 나가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한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담대함을 가지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큰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나가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축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러분은 다 새것이 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여러분을 위해서 좋은 일을 다 일어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의인이 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되게 하셨고 치료받고 건강하게 만드셨고 잘살고 능력있게 축복받게 만드셨고 천국백성이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믿으면 합니다. 믿음으로 여러분을 이끄시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충만한 기쁨을 가지고 영원한 즐거움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인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과 화해를 통한 엄청난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갖고 내 이웃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속에 엄청난 사랑과 기쁨과 행복이 있으니까 이웃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기쁜데 기쁨을 나눌 수밖에 없고 내가 기쁜데 이웃 사람하고 평안을 나눌 수밖에 없지요. 그러므로 나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며 축복과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크고 위대한 화해를 가졌으니 세상의 어떠한 불화도 끌어안고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기쁨의 사람입니다. 평안의 사람입니다. 화해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여러분을 그렇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아버지를 마음속에 모시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힘이 없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요. 저는 이번 동남아에 나가보고 느낀 것이 큽니다. 그분들이 다 한국교회를 배우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어요. 한국교회를 배우자. 한국교인들처럼 기도하자. 한국교인들처럼 찬송하자. 한국교인들처럼 믿자. 한국을 배우자. 그 마음이 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범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 이름을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환난 때 내가 저를 돌보고 위로해 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서 동남아 일대에 모범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정성을 다해서 동남아 일대에 신앙이 아직까지 모자란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굉장한 능력을 가지신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크고 위대한 화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해봐야 될 것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화목하고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도록 힘을 써야 될 것인 것입니다.
2013. 7. 14.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