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가 말하는 ‘신앙과 신학’, 그리고 ‘질문과 대답’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인터뷰]「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펴낸 김용규 선생 (1)

지난해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부터 시작해 신과 과학, 죄와 구원, 성경의 본질과 권위, 종교의 의미와 믿음의 실체 등에 대한 24개의 ‘잊힌 질문’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故 이병철 회장이 남겼다는 이 질문들에 한 가톨릭 신부가 답한 책이 출간된 것. 그러나 내용이 ‘자기계발서’처럼 쓰인 탓에 이 질문들은 다시 ‘잊히고’ 말았다.

이 질문을 다시 꺼내놓은 이는 철학자 김용규 선생이다. 한 주간지를 통해 하나 하나의 질문에 인문학적으로 답한 김 선생은, 내용을 좀 더 보충해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휴머니스트)」을 펴냈다. 2년여 전 쓴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에 이어 또다시 ‘신(神)’ 담론이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와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저자는 왜 특정 종파의 관점이 아닌 ‘인문학적 관점’으로 이 질문들에 답했을까. ‘백만장자’는 아니지만, 이 철학자에게 기독교적 관점에서 추가 질문을 던졌다. 질문 개수는 백만장자의 절반, 12개다.

▲김용규 선생은 ‘인문학적 관점’으로 글을 쓴 것에 대해 “어떤 종교의 주장을 그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설명하는 말이나 글은 그 종교의 구성원들에게는 은혜로우나, 자폐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북스럽기 십상”이라며 “그러나 종교적 담론도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설명되면 덜 은혜롭긴 해도 거북스러움이 덜한데, 이것이 제가 의도하는 바”라고 밝혔다. ⓒ이대웅 기자
▲김용규 선생은 ‘인문학적 관점’으로 글을 쓴 것에 대해 “어떤 종교의 주장을 그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설명하는 말이나 글은 그 종교의 구성원들에게는 은혜로우나, 자폐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북스럽기 십상”이라며 “그러나 종교적 담론도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설명되면 덜 은혜롭긴 해도 거북스러움이 덜한데, 이것이 제가 의도하는 바”라고 밝혔다. ⓒ이대웅 기자

김용규 선생은 먼저, 이 회장의 24개 질문에 대해 “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폐암으로 임종을 앞두게 되면서 일찍이 솔로몬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러자 문득 다가온 것이 신, 구원, 영혼, 종말 등과 같은 종교적 문제들이었다”며 “이는 모두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이 한 번쯤 의문을 가질 만한 것들이고, 결코 이 회장 개인의 질문에 그치지 않고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다가가는 모두가, 설령 기독교인이라 해도 언젠가 한 번은 마주해야 하는 숙명적 질문들”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답을 하기로 했다는 것.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흥미로웠던 것은 24개의 질문들이 대강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 등의 순서로 정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라며 “우연은 아닐 테고, 아마 누군가 이 질문들을 기독교 조직신학 체계에 맞춰 정리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어쨌든 그 덕에 기독교인들에게는 조직신학 전반을 한번 훑어보는 좋은 기회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그의 전작인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과는 달리, 책이 일종의 교리문답 같은 성격을 갖게 됐다.

신학은 애초부터 ‘질문’에 대한 복음적 응답 과정서 생겨
복음이 시대와 상황에 대해 말하려는 ‘질문’ 막아선 안 돼

-하지만, 이 시대 가장 ‘핫’한 철학자 지젝은 얼마 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철학자는 질문하는 사람이지, 답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요.

“그것은 절반만 옳은 말이지요. 철학자는 질문하는 사람이자 답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이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질문을 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질문에 답을 하는 방법입니다.

질문을 함으로써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을 개발한 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예컨대 정의가 무엇이고 용기가 무엇이라고 직접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신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을 통해 무엇이 정의가 아닌지, 또 무엇이 용기가 아닌지를 낱낱이 밝혀내지요. 다시 말해 진리가 아닌 것들을 하나씩 가려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 걸음씩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지요.

이와 달리 플라톤이나 칸트의 경우, 질문에 답을 해 가면서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을 사용했지요. 예를 들어 칸트는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나’,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나’,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판단할 수 있나’라는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다음, 이에 대한 답으로 각각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라는 대작들을 남겼습니다.

결국 철학이란 끊임없이 질문하고 부단히 대답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는데, 지젝은 소크라테스적 방법론을 택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물론 철학자가 질문만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질문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부 목회자들은 ‘질문’을 막은 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믿으라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유감입니다. 교회가 질문을 막으면, 신앙만 남고 신학은 불필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도 그런 성직자들이 있었어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회장의 질문들이 그렇듯, 고대에도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던진 짓궂은 질문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천지를 짓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라는 것이었어요. 이 곤란한 질문에 대해 당시 성직자들은 ‘그런 것을 꼬치꼬치 묻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 짓고 계셨다’는 말로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 같은 질문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지요.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같은 말로 회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도전했어요. 「고백록」 11장에 실린, 창세기 1장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탁월한 해석이 여기에서 나온 겁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은 애초부터 외부의 이교도들과 내부의 이단, 그리고 신자들의 질문에 대해 복음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신학은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새롭게 주어지는 현실적 상황에서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치는 역할을 해 왔지요. 이런 의미에서, 질문을 막는다는 것은 신학을 막는 것이자 복음이 이 시대와 상황에 대해 말하려는 것을 막는 행위라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김용규 선생은 “이병철 회장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질문들은 오늘날 거센 바람을 일으키는 새로운 무신론과 이에 대응해야 하는 기독교 교리 전반에 관해 진중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김용규 선생은 “이병철 회장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질문들은 오늘날 거센 바람을 일으키는 새로운 무신론과 이에 대응해야 하는 기독교 교리 전반에 관해 진중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하지만 신학보다는 ‘신앙’이 우선이자 전제
신앙과 신학은 ‘공리’와 ‘정리’ 관계와 같아

-그럼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신앙과 신학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요.

“둘 가운데 우위를 따진다면 당연히 신앙이 우선합니다. 신앙은 종교의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먼저 ‘믿으면 안다’는, 고대의 금언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신앙이 신학의 전제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신앙이 없이는 신학도 없다는 거지요.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만, 저는 신앙과 신학의 관계가 수학에서 말하는 ‘공리(公理)’와 ‘정리(定理)’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평행선은 하나 뿐’이라는 ‘평형선 공리’가 그렇듯, 공리란 우리가 그것의 근거를 묻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동위각은 같다’, ‘맞꼭지각은 같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다’와 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모든 정리들이 나오지요.

20세기가 낳은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현상을 ‘근거가 제시된 믿음들의 바탕에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믿음이 놓여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공리가 없이는 정리도 없다는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신앙이란 우리가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 없이는 어떤 신학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 없는 신학은 쓸모 없는 형이상학이자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신학이 없는 신앙도 역시 위험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 신학은 외부 이교도들과 내부의 이단, 그리고 신자들의 질문에 대해 복음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그 결과 신학은 복음이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무슨 의미로 선포되었는지를 알려줄 뿐 아니라,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도 말해 줍니다. 역시 매우 중요하지요.

그래서 저는 신앙 없는 신학은 공허하고, 신학 없는 신앙은 맹목이라 생각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강조했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구호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신앙과 신학이 상호보완적으로 서로를 돕지요.”

-신앙과 신학의 관계를 말씀하셨는데, 선생님은 철학자이신데도 신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시는 반면, 오히려 일부 신학자들은 신앙을 잃거나 세상의 궁금증에 귀를 닫은 채 게토화되기도 합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렇게 보이는 신학자가 종종 있는데, 그 이유를 신학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신학자는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장을 이성에 의거해 논리적으로 전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신학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명심할 것은 신학과 철학이 설령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더라도, 둘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학문의 근거, 곧 그것들이 시작하는 출발점이 각각 다릅니다. 위에서 든 기하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신학과 철학은 공리가 서로 다르다는 거예요.

기하학에서도 공리가 다르면 정리들이 달라집니다. 예컨대 우리가 ‘평행선은 하나 뿐’이라는 유클리드의 평면기하학 공리를 받아들이면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다’라는 명제가 옳지만, ‘평행선은 없다’는 리만의 구면기하학 공리를 받아들일 경우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크다’가 옳지요. 철학에서의 공리는 예컨대 플라톤의 ‘이데아’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제일명제’와 같이 이성에 의해 도출된 사변들입니다. 그렇지만 신학에서의 공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따라서 철학과 신학이 똑같이 이성을 사용하여 논리적으로 전개된다 해도 철학은 언제나 인간의 이성에서 출발하지만, 신학은 항상 하나님 말씀에서 시작해야 하지요. 이 말은 모든 신학적 결론들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으로 다시 되돌아가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신학은 신앙에 어긋나고 시대에 따라 새롭게 주어지는 현실적 물음들에 합당한 복음적 응답을 할 수 없게 되지요.”

칭의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신학 또는 변증으로는 불가능
하지만 자연과학 신봉하는 오늘날엔 ‘막중한 과제’로 떠올라

-사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주요 교리를 ‘문답식’으로 설명하는 등 질문을 중요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나친 교리 강조의 폐해도 일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기독교가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면.

“우선 교리와 신학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진리는 성경에 쓰인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교리나 신학은 그 진리가 새롭게 주어지는 현실적 상황에서 올바로 드러나도록 돕기 위한 인간적 지식이지요. 따라서 하나님 말씀은 변할 수 없지만, 교리와 신학은 변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기독교 신학의 탐구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며, 항구가 아니라 항해’라고 비유한 것이 그래서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교리와 신학은 항상 성서에 근거해야 하지만, 마치 역사학이 그렇듯 언제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 속에서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와 신학은 성서 텍스트와 전통 뿐 아니라 당대의 시대적 요구와 물음에도 부응하도록 재해석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예컨대 가톨릭교회에서 ‘교황무오설’이 그렇듯, 교리와 신학이 이데올로기화되어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진리인 양 행세하게 되지요.

▲김용규 선생의 저서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과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김용규 선생의 저서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과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트 에코가 그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장미의 이름」은 중세 어느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사건을 추리소설 형식으로 다루었지요. 사건을 해결하려 윌리엄 수도사가 파견되지만 상황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모든 사건이 늙은 수도사 호르헤의 범행임이 밝혀집니다. 호르헤는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 전통에 서 있던 당시 보수 교단에 속한, 신실한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젊은 수도사들이 십자군 전쟁을 통해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에 근거한 새로운 신학에 현혹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수도사들을 살해했고, 나중에는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호르헤가 자신은 ‘교리’가 아니라 ‘진리’를 위해 살인을 하고 죽는 것이라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에코는 바로 이 문제, 오직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소설을 썼습니다. 이런 당부도 덧붙였지요.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교리나 신학을 진리처럼 믿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새겨야 할 말입니다.”

-결국 질문에 답하는 것은 ‘변증’일 테고,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처럼 믿지 않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작업이겠지요. 하지만 교리나 신학은 진리가 아니라는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회심은 이러한 신학적·변증적 설득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예를 들어 ‘신의 존재 증명’과 같은 신학이나 변증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중요한 질문입니다. 신약성서의 언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표기된 회심을 시쳇말로 바꾸면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기하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공리’를 바꾸는 일이지요. 보다 자세히 밝히자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이란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자기 중심주의’에서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 중심주의’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자, 삶이 시작하는 공리를 바꾸는 것이지요.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 곧 칭의에 의해서만 가능하지요. 다시 말해 칭의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학 또는 변증을 통해 누군가를 회심을 하도록 하는 일은 교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이, 지금 물으신 대로 그렇다면 신학이나 변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거지요. 요컨대 제 책과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한데요(웃음), 신학과 변증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 하신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데 필요합니다. 요컨대 신학과 변증은 칭의에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성화에는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과학의 시대’라, 젊은이들이 합리적이지 않은 것,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신학과 변증은 이러한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들이 의심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실족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무신론자들의 자연과학에 근거한 공격이 활발한 오늘날 신학과 변증에 주어진 막중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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