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C. S. 루이스 소천 50주년을 맞이하며
오는 11월 22일은 C. S. 루이스의 소천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 각 지역이 여러 가지 이벤트 준비로 들썩거린다. 특별히 최근 C. S.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과 관련된 책들이 다수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가 저술한 「C. S. Lewis: 별난 천재, 마지못해 나선 예언자(복있는사람)」는 루이스 전기의 결정판이 될 듯하다.
C. S. 루이스는 1898년 11월 29일 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탄생하였고, 1963년 11월 22일 소천했다. 그는 세계적 명문인 옥스퍼드대학과 캠브리지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영문학자였지만, 단순히 학문적 상아탑 속에서의 고립된 삶만을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문학평론, 소설, 시, 수필 등 다양한 작품활동을 했고, 다른 무엇보다 평신도 신학자요 기독교 변증가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그는 1, 2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아픔을 경험한 영국 사회에서 순전한 기독교와 초자연적 유신론의 가치와 매력을 열정적으로 변호했던 ‘공적인 신학자(public theologian)’였다. 그가 어린이를 위해 쓴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는, 최근 영화로 만들어져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C. S. 루이스를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명의 신학 사상가에 포함시켰다. 맥그래스의 ‘탑 텐 리스트(Top Ten List)’에는 어거스틴(Augustine)과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같은 교부신학의 대가들, 안셀름(Anselm)과 아퀴나스(Thomas Aquinas)같은 중세 신학의 거장들, 루터(Martin Luther)와 칼빈(John Calvin),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같은 위대한 종교개혁자들, 청교도 신학의 완성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20세기 최대 신학자라 평가되는 칼 바르트(Karl Barth), 그리고 C. S. 루이스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10인(IVP)」).
그를 어거스틴, 칼빈, 에드워즈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에 대해 비판적인 감정을 품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감리교 신자는 존 웨슬리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루이스가 들어갔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루이스의 신학적이고 변증학적인 글들에 조금이나마 심취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맥그래스의 리스트에 C. S. 루이스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이 근거가 있다는 사실에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조직신학과 변증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필자도 C. S. 루이스가 가장 위대한 10인의 신학사상가의 반열에 충분히 포함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C. S. 루이스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는 10대에 의지적인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 후 1930년, 32세 되던 해에 회심할 때까지 그는 예리한 지성과 은폐된 광기를 함께 지닌 문학도로서 굴곡있는 삶을 영위했다. 그가 기독교로 회심하는 데 영향을 미친 사람은, 가톨릭 신자로서 그의 친구였으며 「반지의 제왕」과 같은 대작을 남긴 소설가 톨킨(J. R. R. Tolkien, 1892-1973), 작가 겸 가톨릭 영성가였던 체스터턴(G. K. Chesterton, 1874-1936) 등이다. 특별히 루이스는 체스터턴의 「영원한 인간(The Everlasting Man)」에 크게 심취했는데, 루이스는 그 책을 “내가 아는 한 최고의 기독교 변증서”라고 격찬한 바 있다.
기독교로 개종한 뒤 루이스는 결혼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52년 9월 미국 출신의 시인이자 이혼녀였던 조이 데이빗먼(Joy Davidman)을 처음 만난 뒤, 그녀가 영국에서 시민권을 얻도록 돕기 위해 1956년 그녀와 혼인신고를 했다. 1956년 10월 조이가 골수암 판정을 받자, 조이에 대한 루이스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고, 이듬해 1957년 3월 조이와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이후 조이의 병세는 호전되는 듯 했으나, 결국 1960년 7월 조이는 별세했다. 두 사람 사이의 깊고 진솔한 사랑을 그린 영화가 바로 <섀도우 랜드(Shadowlands)>이다.
우리의 관심은 C. S. 루이스가 기독교 변증가였다는 사실이다. 21세기 초인 지금, C. S. 루이스의 변증적 통찰과 착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심오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세월이 갈수록 더 커갈 것이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중론이다.
그가 남긴 기독교 변증서에는 이미 클래식이 된 「순전한 기독교」, 그리고 「고통의 문제」, 「기적(이상 홍성사)」 등이 있고, 이외에도 다양한 변증적, 신학적 저술이 있다. 「순전한 기독교」의 원작 「Mere Christianity」를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영어 단어 ‘mere’가 의미하는 바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스의 본래 의도를 따른다면 ‘단순하면서도 본연적인·본질적인’이라는 뜻을 담은 단어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순전한’이란 표현으로 번역한 것은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순전한 기독교」에서 루이스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도덕론적 논증을 펼친다. 그리고 탁월한 통찰력을 갖고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쉽고 명쾌한 필치로 기술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도덕적 스승이나 성인으로 보는 것은, 예수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라는 루이스의 지적은 통렬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미치광이가 아니었고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선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를 구주와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루이스의 주장은 심오한 설득력을 가졌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주장을 수용하고,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은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또 「고통의 문제」에서 “왜 사랑이 많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과 고난을 겪도록 허용하실까?”라는 신정론적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전능하심과 고통의 공존 가능성을 치밀하게 변증한다. 그는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고통의 존재는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하심에 대한 반증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박도 아니다. 도리어 고통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존중하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증거한다.
그의 또다른 책 「기적」은 무신론자들을 대상으로 자연주의의 부당성을 예리하게 고발하고 초자연주의의 타당성을 빈틈없이 논증하는 불후의 명작이다.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 자기 자신이 이미 완고한 무신론자였기에, 루이스는 무신론자들의 철학적 전제들, 심리적 에토스, 세계관적 빈곤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왜 자연주의가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왜 기독교적 유신론과 초자연주의가 인간의 지적·도덕적·영적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지를 탁월하게 변증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20세기 최대의 기독교 변증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다.
다행히 한국교회는 홍성사의 귀한 수고와 노력으로 루이스의 거의 모든 저작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정밀한 번역 작업의 열매로 이 귀한 책들이 소개될 수 있게 된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에게 C. S. 루이스를 들고 읽을 것을 적극 권면한다. 그러면 기대 이상으로 큰 신앙적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루이스의 영향력은 계속될 것인가? 맥그래스 교수는 루이스의 거룩한 영향력이 적어도 앞으로 한 세대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지적 상대주의가 창궐하는 이 험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C. S. 루이스의 귀한 저작들은 성경 다음으로 가까이할 만한 가치가 있다. 부디 조국 교회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루이스를 통해 영적 성숙의 귀한 자양분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성욱(덴버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큐리오스 인터내셔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