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4월 6일
본문: 베드로전서 1:8~9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성공이라는 우상!
[베드로전서 1장 8-9절]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던 적이 있습니다.
지난주 같은 지역에서 목회를 하며 교제하는 창조교회 홍기영 목사님으로부터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더, 더 가까이] 1년간 안식년을 마치고 온 목사님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는 책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해 고뇌한 흔적이 있는 책. 이런 소제목이 있더군요. "주님이 주님인가?"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만약 램프의 요정 지니가 실제로 존재하고 내 앞에 있다면 지니에게 소원을 빌겠는가? 주님께 기도하겠는가?"물론 우리는 주님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런데 지니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 지니는 비비면 나오지만, 주님은 간절히 기도해도 침묵하시는 경험을 하기 때문. 둘, 지니에게는 세 가지 소원을 잘 말하면 되지만, 주님에게 소원을 말하는 순간 내 소원에 문제가 없는지 고민하게 한다. 셋, 결정적인 차이점은 지니는 소원을 들어주고 램프 속으로 들어가지만, 주님은 나와 같이 살고자 한다는 것.지니에 비하면 주님은 참 부담스러운 분이십니다.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은 기도의 응답을 받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지니'인가 '주님'인가? 조용히 묵상하는 새벽입니다. 내 소원은 주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내 목회에서 주님은 나의 주님이신지.
친밀함인가? 성공인가?
신앙인들, 특히 하나님의 일을 꿈꾸는 자들에게 찾아오는 치명적인 유혹이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것이죠. 성공이 왜 복음과 배치되는가요? 복음이 하나님의 역사라면 성공은 자기 일을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음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친밀함을 기뻐하는 것이죠.
우리는 종종 밖으로 나타나는 증거를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바랄 때가 많습니다. 성령의 불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성령의 불이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떤 증거도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 없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가?”하는 것이죠. 현상이 아닌 친밀함이란 무엇일까요?
교회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주님, 저를 좀 만나주세요. 간절히 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좌절을 느낍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간절함이 생기겠습니까? 이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사실은 그분 안에서 관계가 시작된 것이죠. 단지 그 안에 어떤 현상을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친밀함’이란 이러한 현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어떤 기적보다도 소중한 것이 관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이 있습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우는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어떤 황홀한 체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친밀한 기쁨이 이 찬양 가운데 존재합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성령의 불을 체험하고 난 후에 그 일이 너무 귀해서 ‘불이야!’라고 적은 천을 옷에 꿰매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전기를 보면 성령의 불을 체험하고 난 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다음 날 아침에는 죄를 지을 만큼 충분히 회복되었다.”
우리가 늘 궁금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가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어쩌면 저렇게 바뀌지 않을 수 있을까? 기적이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아무리 기적을 체험해도 고난이 다가오면 여전히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시나요?
어떤 목사님의 책에 이런 예화가 있더군요.
어떤 사람이 남산 타워 꼭대기에 올라가서 보니까 인천 앞바다가 보이고, 갑자기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고 싶어도 순간 이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타워를 내려와서 서울 시내를 거처 인천 앞바다까지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성공을 꿈꿉니다. 한 번에 뭔가를 해보고, 뭔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공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아는 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우상 중의 하나가 ‘빠름 중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애굽에서 400여 년간의 종살이를 마치고 막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만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비록 광야였지만, 앞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살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동안 백성 사이에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빠르게 일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40일 시내산에서 머무는 동안 그들의 초조함은 극에 달하고 맙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 32:1)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 것은 그들이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우리 중에 기다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우리는 ‘instant’와 ‘fast’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빨리’ 가야 하는 세상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마음속에는 빠를수록 좋은 것이고, 쉬울수록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사로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다리는 것이 무기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이 그 오랜 종살이에서 자유를 얻고, 홍해를 건너,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기적을 체험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지 3개월 만에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출애굽기 32장 2~4절을 보세요.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 광경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 중에 1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이었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다른 신들을 예배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어떤 존재가 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결혼생활을 꿈꾸며, 완벽한 자녀와 완벽한 가정을 꿈꿉니다. 하지만 이 꿈이 깨어질 때 가정도 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대는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빼내 갈 뿐입니다.
더 깊은 갈증과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거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
‘우리에게 우상이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많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이미 우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짜 질문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가장 큰 경쟁자는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을 신경 쓰고 있는 나.
*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의 업적에 목말라 있는 나.
*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남들의 요구에 거절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
* 아내와 남편을 사랑해야 하는 데도, 그것을 가로막고 힘들게 하는 그 무엇.
결국, 우리가 우선순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로막는 것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을 아는 순간 우리의 삶에 조금 과격한 결단을 내려야 할지 모릅니다.
성공이 왜 우상인가요?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것 역시 성공하라는 것 아니었나요? 성공이 우상인 것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에 중독되면 계속해서 더 많은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모함하고, 피해를 주는 일조차 서슴지 않고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가정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나라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자신만 모를 뿐이지 지켜보는 모든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열망에 도취해 있는지를 말입니다.
중독의 증상은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독자는 늘 중독 증상에 목말라하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독의 열망을 채우려고 하지요.
성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성공에 중독되어 삶의 우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팝 가수 마돈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성공의 유혹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강철 같은 의지를 갖고 있다.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끔찍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언제나 내 모든 의지를 쏟아 부었다. … 그 순간을 한 차례 넘기고 나면 내가 특별한 사람임을 깨닫지만, 그런 다음 또 다른 무대에 서면 내가 평범하고 시시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평범해질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심이 내 인생을 움직이는 힘이다. … 언제나 그 공포가 나를 몰아붙이고 또 몰아붙인다. 이미 대단한 사람이 되었건만 여전히 나는 대단한 사람임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이런 나의 투쟁은 끝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공이라는 우상에 휩싸이는 순간 잠시의 휴식도 공포의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성공이 잊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따라가는 순간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지던 것이 어느 순간 자신의 힘으로 증명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면 자꾸 외부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남의 평가에 좌우되기 시작하면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전도서 2장 10~11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고백이 있습니다.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11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면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가 많은 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헛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채워도 채어지지 않는 공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면 소중한 관계들을 희생하게 됩니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성공을 향해 달려가며 다른 사람을 희생합니다. 어쩌면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라도 깨어진 관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힐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에 목을 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했어도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으면 공허해진다는 것이죠.
이 우상에 사로잡히면 자기 일을 마치 자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에게서 일이 전부가 됩니다. 누군가 자기 일을 비난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을 버리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평생을 일했던 직장에서 쫓겨나는 순간에 힘들지만,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으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들, 자신 스스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게 되죠.
이건 목회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목회하는 교회에서 아무리 성도가 늘어나도 결코 만족스러워하지 못하게 되는 현상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목회의 목적이 그리스도께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자신이 세워놓은 기록을 넘어서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죠. 이 사람의 목표는 늘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죠. 그래서 끊임없이 만족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면, 항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지 못하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드러내고 비웃는 사이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을 비웃으며 그 사람에 대하여 은근히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남을 비난하며 은근히 자신을 부풀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지난 8월에 우리는 한 청년의 몰락을 보았습니다.
[스펙보다 열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전교 꼴찌에서 삼성맨까지’라는 주제로 20대 멘토로 강연을 다니던 사람이죠. 실업계 출신으로 대불대 입학 후 두 번의 편입을 거쳐 연세대에 입학합니다. 이후 2010년 김원기는 “실업계 고교에서 꼴찌였던 내가 4학년이 되기도 전에 삼성 SDS에 특채됐다.”라고 자신을 홍보하며 전국을 돌며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2년 6월 ‘스펙보다 열정이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했죠.
하지만 그의 거짓말은 자서전 출간 보름 만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삼성 SDS가 출판사에 “그런 사람이 입사한 적 없다”고 항의했기 때문입니다. 출판사는 책을 전량 회수했고, 김원기는 출판사에 손해 배상금 2000만 원을 물어줬습니다. 그는 이력에 연세대 MBA(졸업)도 추가했는데, 연세대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그리고 학사경고 3회 누적으로 김원기를 제적했습니다. 그는 조선일보와의 통화에서 “성공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성공에 목을 맨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학력위조, 논문위조 등이 그런 맥락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우리가 이루어 놓은 성공이 최악의 실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말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우리 삶의 가치는 자신이 세상에서 성취한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서 시작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이루어 놓은 일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남의 말에 의해 좌우되는 그런 존재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의 명함에 새겨진 직책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의 크기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시편 139편 14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숨겨짐”
오늘 새벽 오대원 목사님의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성공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숨겨짐’, ‘잊혀짐’이 얼마나 필요한 것임을 알려주는 구절이 있네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사역 중에 한동안 우리를 '숨기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종종 회피한다. 그래서 때로 소진되기도 하고, 하나님과 다른 동역자들과 소원해진 느낌을 받기도 하며, 우리에게 적대적인 세상을 섬기는 데 필요한 힘과 용기를 잃기도 한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예외 없이 숨겨지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죠. 숨겨짐은 늘 보내시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공에 목마른 사람들은 숨겨짐의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시간 때문에 사역에 뒤처지고 잊혀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숨기실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숨겨진 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하시고 일하십니다. 단지 내가 하지 않을 뿐이죠.
오늘 새벽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늘 하나님의 일을 꿈꾸면서도 '숨겨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강하게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숨겨짐'은 곧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이어집니다.
숨겨진 시간 때문에 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죠.
숨겨지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숨겨짐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할 수 있다면….
잊혀짐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역자들을 숨기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로 하여금 해를 당하지 않도록 숨기시는 때가 있습니다. 혹은 곤경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애굽에서 요셉을 13년간 숨기셨던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자격과 인격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숨겨져 있는 시간을 통하여 훈련을 받는 것이죠. 어쩌면 요셉에게 있어서 그 시간이 그로 하여금 정치적 안목도, 관대함과 용서, 그리고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무너뜨릴 수 있는 과도한 인기나 지나친 분주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숨기시기도 하십니다. 사람 앞에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회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에 그리고 그분과 함께 움직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북한이나 미얀마처럼, 나라들을 숨기신다. 그리고 교회들을 숨기시되, 특히 교회를 핍박하는 나라에서 숨기신다. 교회들을 보호하여 준비시켜, 그 나라를 새롭게 하는 도구로 쓰기 위해 그렇게 하신다. 그리고 보통 그런 준비 기간이 길면 길수록, 하나님이 그 종들을 통해 행하시는 일은 더 크다.”
사역과 성공이 우상이 되어 버린 시대에, 우리를 숨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는 것은 굉장한 신앙의 진보입니다. 아니, 축복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지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난 자기 일에 중독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대원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1986년, 우리 가족이 25년 동안 섬기던 한국을 갑작스레 강제로 떠나게 되었을 때, 나는 이제 우리의 사역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전 우리가 선교 사역을 위임받았던 산장을 다시 찾아갔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사역을 위한 부으심을 받았던 그 산에 다시 올랐을 때,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네가 나의 사랑 안에서 쉬는 이곳, 나의 임재 안이 바로 너의 집이다. 너의 사역은 내 이름으로 위대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사랑하고, 나의 영광을 위해 내가 너를 쓸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너를 보내어, 깨어지고 아파하는 세상을 섬기게 하면서 너를 통해 나의 일을 할 것이다.” 그 즉시 나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하신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호 14:8)라는 말씀을 기억했다.
나는 내 우상이 되어 버렸던 사역을 강제로 그만두어야 했다. 당시 내가 하던 사역에서 나 자신을 분리했던 것은 나의 결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이었다. 나는 효율적인 사역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공을 쫓아가는 것이 우상 숭배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은 믿음입니다. 성공을 좇아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지만, 하나님을 좇아가면 우리 사역에서 성공이 찾아오게 됩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을 깨는 자가 성공합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상 숭배가 아닌 하나님과의 친밀감으로 일어나는 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