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7월 13일
본문: 열왕기하 10:25-31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모양은 위선이다!”-예후
[열왕기하 10장 25-31절]
25.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지휘관들이 칼로 그들을 죽여 밖에 던지고
26. 바알의 신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27.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28.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29.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30.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
31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계속해서 왕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왕도 처음부터 악한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왕권을 유지하려다 보면 참 많은 유혹이 있는 듯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눈에 보이는 욕망에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입니다.
저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이 의도적으로 악한 길을 가거나 위선적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면 문제가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그들을 올바로, 선한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강력한 믿음, 신앙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나 라는 것이죠.
연초에 저에게 강력한 도전을 준 메시지 중의 하나가 높은 뜻 정의교회 오대식 목사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전이(轉移)라는 말을 하면서 그런 비유를 들더군요.
조폭 3명이 갇힌 교도소에서 예수님이 같이 지내게 된다면, 예수님이 조폭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조폭이 선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우리 중에 아무도 예수님이 조폭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향력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하면서 왜 변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의 모습이 때로 위선적이 될까요? 왜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세상에 영향을 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일까요?
둘 중의 하나겠지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능력이 없던지,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산다고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든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왕에게서 일어나는 문제가 무엇인가요?
위선은 내 속사람이 죽지 않기 때문이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28.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29.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조금 더 자세히 이전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25.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지휘관들이 칼로 그들을 죽여 밖에 던지고
26. 바알의 신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27.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그렇게 무섭게, 철저하게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척결하면서 왜 여로보암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요?
먼저 여로보암이 지었던 죄가 무엇입니까?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갈라지면서 여로보암이 통치하던 나라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그에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북이스라엘 백성이 남 유다의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릴까 봐.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잡아두려고 벧엘과 단에 우상을 만듭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것이지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하나님이 여기 계시니 여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건물에 거하시는 분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 어디든지 영으로 거하시는 분인데 그것을 망각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 계신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쉽게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위선적인 삶을 살겠습니까? 형상이 있는 곳에서는 신앙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되겠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자꾸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려는 유혹에 빠지게 될까요? 그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위선적이다!”라고 말합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과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미신을 믿는 사람은 미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삶과 신앙이 분리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알기에 어디에서나 시종여일한 삶을 살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미신을 섬기는 사람은 쉽게 세상과 타협합니다. 어떤 때는 굉장히 신앙적이고, 어떤 때는 굉장히 세속적입니다. 즉, 세상을 거스르기보다는 세상과 함께 가는 길을 택하죠.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인가요? 참 신기하죠, 우리가 목에도 걸고 집에도 장식하는 십자가가 “사형 틀”이라는 것을 아시죠.
그것도 보통의 사형 틀이 아니라 로마에서 당시 체제에 반항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극형의 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그 무서운 십자가 상징을 목에 달고, 교회의 가장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상징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나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십자가를 지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체제에 대하여 대항하겠다는 것입니다. 위선적인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가 신앙적인 결단을 하고 바알을 불사르고 우상숭배 하는 사람을 죽였을지 모르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타협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죠.
타협이 무엇인가요?
“다 양보하는데 이것 하나는 양보 못 해!”라는 태도입니다.
전심으로 그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후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30.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
31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위선이라는 말과 조금 대비되는 단어가 있다면 “전심”이라는 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위선의 이유는 누군가를 신경 쓰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평가가 중요하기에 자신의 내면과 다른 모습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솔직하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에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을 보고 계시는 분이시죠.
아주 재미있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 초창기에는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기도하는 철야기도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철야기도의 전통이 요즘에는 사람들의 편의를 생각해 시간을 조금씩 앞당기다가 아예 저녁 7시 예배로 드리는 교회까지 생겼습니다. 이런 일이 늘 아쉽게 생각하던 어느 교회에서 다시 철야기도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조금 늦은 저녁에 모여 새벽까지 기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정이 넘고 1시 2시가 될 무렵, 거의 기도하면서 졸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까지 골며 자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은 졸지 않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니까, 기도하다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모두 자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교회 장로님까지 자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이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장로, 집사 할 것 없이 다 저 모양이니 하나님 얼마나 민망하십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무개야, 그렇게 깨어서 남의 흉이나 볼 거면 너도 얼른 자거라!’
어쩌면 기도시간에 자는 것보다 깨어서 남을 정죄하는 것이 더 나쁜 것이겠죠.
혼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것은 그 시누이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누군가에게 착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죠. 그래서 그 행위가 선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후가 바알 신상을 다 부숴버리고 이방 숭배자들을 죽여 버렸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전심이 아니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에 위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행하지 못함이 “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되 과도하게 행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말씀 이외에 자기 생각이 들어가면 잘못되기 십상입니다.
열왕기 하 9장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를 왕으로 삼은 것은 아합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합의 온 집안과 이세벨을 심판하려 하심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합의 온 족속과 이세벨을 심판하는 데 있어서 유다 왕 아하시야를 죽입니다. 열왕기하 9장과 10장을 보면 정말 잔인하게 심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알을 섬기를 모든 자를 심판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의도인가를 의심할 정도의 일이기도 합니다.
성서학자들을 유다의 왕 아하시야를 죽인 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하시야도 범죄한 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 이상을 행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과유불급”이라는 말을 합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데 너무 운동을 열심히 해서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건강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히 먹어야 하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또 다른 병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그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우리가 흔히 목숨 걸고 믿는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 목숨을 걸고 잘 믿는데 자신의 가정을 돌보는 일조차 소홀히 하는 것을 보면 목숨을 잘못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기도만 하는 사람을 보면 신앙을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예후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따라 행했지만, 용서하심을 보지 못하는 심판, 그리고 심판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 자신이 심판관이 되어 잔인하게 행하는 것을 보면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말씀 앞에서” 자신을 검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여러 가지 “유전”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안식일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잘 섬기자는 규칙들이었는데, 그것이 지나치다 보니 하나님보다 규칙이 더 중요하게 된 것이죠.
이들은 율법을 토대로 “-하라”는 248개의 조항과 “-하지 말라”는 365개의 세부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미드라쉬라고 부릅니다. 하루에 몇 번씩 기도하고 금식을 얼마나 자주 하고 등의 규칙 특히 안식에 대한 조항만 39개나 됩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무너진 담벼락에 깔렸을 경우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볼 만큼만 돌을 헤쳐 본다. 그 사람이 살았으며 구할 수 있으나 죽었으면 안식일 다음에 시체를 꺼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비난을 받고 죄인처럼 취급을 받습니다.
참 신기하죠?
하나님을 열심히 믿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어길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사실 이단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죠. 말씀을 믿으면 되는데, 더 잘 믿겠다고 말씀 이외의 것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참 쓸데없는 것을 성경처럼 강조하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어떤 곳은 성찬을 할 때 떡을 씹어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요즘은 기도의 종류도 많습니다. 왕의 기도, 관상기도, 방어기도.
어떤 사람은 밥을 하기 전에 주걱으로 십자가를 긋고, 밥을 뜨기 전에 십자가로 가르고 기도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부적처럼 사용합니다. 십자가를 걸어놓으면 악귀가 물러간다고, 마치 부적을 부쳐놓고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비는 사람처럼 말이죠.
기도하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때리며 기도하는 것.
정말 말할 수 없이 성경의 말씀을 지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기는 신앙의 행태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나는 일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개인의 상황과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을 가질 수 있으나 말씀을 벗어나는 것들로 신앙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죠.
이야기가 조금 빗나간 듯하지만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 이외의 것을 주장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 욕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말씀을 순종하면서 시작했지만, 그 말씀을 순종하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자신에게 찾아온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욕심을 내는 것이죠.
당연히 그런 생각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예후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북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일이고 그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쓰다 보니 욕심이 생겼을 것 같습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를 죽이면 그 땅도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그가 개혁을 시작하면서 그가 휘두를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과시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넘어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픈 마음에 많은 신앙인과 사명자들이 넘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참 무서운 일이죠.
하나님의 사명으로 시작한 인생이 욕심으로 무너져 버리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를 잡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죠. 첫째는 술을 탄 단물을 원숭이가 다니는 길목에 놓는 것입니다. 원숭이는 술이든 단물을 한번 먹고, 또 먹고, 결국 취해서 잠이 들 때 잡는다고 하죠.
다른 하나의 방법은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조롱박을 줄로 묶고, 그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견과류를 넣어 둔답니다. 그러면 원숭이들이 그것을 꺼내 먹으려고 손을 넣어 한 주먹 쥔답니다. 그러면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을 치지 못합니다. 손에 쥔 견과류를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둘 다 원숭이의 욕심을 이용하여 잡는 것이죠.
사단이 우리 인간을 잘못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욕심이라는 미끼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미끼는 포장하기가 참 쉽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조금만 위선을 떨면 사람을 속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 최초의 죄가 무엇입니까?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셨는데, 동산 한가운데 있는 오직 선악과 하나만을 손대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교묘하게 사단이 유혹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비난합니다.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나요?”
만들지 않았으면 먹지 않았을 텐데.
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고, “한 가지” 때문에 불순종하며 살까요? 왜 그 한 가지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그 많은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순종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할까요? 왜 우리는 내 꿈을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면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하여 그렇게 무감각할까요? 우리 삶에 불만이 생기는 것은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시나요?
열왕기하 10장 16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를 태우고”
벌써 이상하지 않나요?
그의 열심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말입니다. 결국, 열심을 가장한 그의 욕망을 말입니다.
예후는 하나님에 대한 대단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아합의 집과 관련된 사람들을 찾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죽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땅을 우상숭배의 땅으로 만들어버린 바알의 선지자들과 바알을 숭배하는 백성을 모두 죽였고, 바알의 신전과 우상을 깨뜨렸으며, 심지어 바알의 신전을 화장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위선은 곧 드러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을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기준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기도하려고 했나요?
왜 큰소리로 기도를 했나요?
끝까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렇게 무섭게 우리의 열심이 변질할 수 있다는 것을 예후를 통해 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위선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오늘 말씀을 통해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우리의 행동이 위선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 ‘위선’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위에, 신앙의 이름 위에 살짝 얹어 놓은 욕망이 위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무섭고 두려운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이 위선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