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8월 10일
본문: 열왕기하 14:23-29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라!”
[열왕기 하 14장 23-29절]
23.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 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28. 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싸운 업적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 여로보암이 그의 조상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기준이 틀리면…
기준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페북에 누가 올려놓은 글인데요. 냉소적이기도 하고 우리 세태를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언론을 비판하는 조크]
예수 :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언론 : "잔인한 예수, 연약한 여인에게 돌 던지라고 사주"
예수 : 위선적 바리새인들에게 분개해 "독사의 자식들아!"
언론 : "예수, 국민들에게 새끼 막말 파문"
소크라테스 : "악법도 법이다"
언론 : "소크라테스, 악법 옹호 파장"
시저 : "주사위는 던져졌다."
언론 : "시저, 평소 주사위 도박광으로 밝혀져"
이순신 :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언론 : "이순신, 부하에게 거짓말하도록 지시, 도덕성 논란 일파만파"
김구 :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통일입니다"
언론 : "김구, 통일에 눈멀어 민생과 경제 내팽개쳐"
소크라테스 : "너 자신을 알라"
언론 : "소크라테스, 국민을 바보 취급하며 반말 파문"
클라크 :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언론 : "클라크, 소년들에게만 야망 가지라고 심각한 성차별 발언하며 대놓고 쿠데타 사주"
스피노자 :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언론 : "스피노자, 지구멸망 악담, 전 세계가 경악 분노"
최영 :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언론 : "최영, 돌을 황금으로 속여 팔아 거액 챙긴 의혹 "
니체 : "신은 죽었다."
언론 : "현 정권, 신이 죽도록 뭐 했나?"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몹시 나쁜 사람을 제외하고는 죄를 지으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죄를 지으려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인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실 때 예수님을 비난하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화나게 했던 것을 보면 ‘죄’와 ‘악’에 대한 문제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준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행동은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이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누구에게나 사랑의 문을 여셨다는 무책임한 행동 말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인을 화나게 하는 일들이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이죠.
요한복음 9장에는 소경으로 태어나 앞을 보지 못하고 구걸하던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온 사건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앞을 못 보는 것이 이 사람의 죄인지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인지.”
이들의 물음을 보면 아주 ‘신학적’입니다. 그들은 그가 앞을 못 보는 것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논쟁에 말려들지 않으시고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론과 교리에 관심을 가질 때 예수님은 소경에게 관심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난처하게 된 사람은 소경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소경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관계를 맺은 것 때문에 그의 삶이 난처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소경은 예수님에 관하여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나는 모릅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소경이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이 사실 한 가지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필연적으로 세상의 기준을 가진 사람들과 하나님의 기준을 가진 사람들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과 종교적 규율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이클 야코넬리의 [영성]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존 매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스코틀랜드 교회 연합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상당히 엄격하고 경건한 체하는 교단에 속한 두 사람의 목사와 함께 그들이 후원하는 선교사의 사역을 돌아보기 위해 발칸 반도의 외진 지역에 가게 되었다.
세 사람의 목사는 작은 마을에 사는 정교회 신부를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객들을 맞게 된 신부는 기쁜 마음에 희귀하고 값비싼 술을 한 잔씩 권했는데, 깜짝 놀란 두 목사는 강하게 사양했다. 그러나 매키 박사는 마치 주류 감정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코를 벌름거리며 술 냄새를 맡다가 들이킨 후 술맛을 극구 칭찬했다. 그리고 한 잔 더 달라고까지 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두 목사는 매키 박사 때문에 상당히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그들이 차에 올라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마을을 벗어나게 되자, 경건한 두 목사는 매키 박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매키 박사님, 스코틀랜드 교회 연합회의 의장일 뿐 아니라 세계교회 연합회의 임원인 당신이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꼭 알리고 싶으셨습니까?”
매키 박사는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매키 박사의 대답은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자애로움을 보여주는 것보다 자신들의 신앙 원칙을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을 실천하는 일보다 매키 박사와 신부의 신앙을 비난하는 일에 훨씬 더 흥분해 있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기준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은 가장 강성했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악인의 번성함은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직 때가 되지 않으므로 그냥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번성함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본문 2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메시지 성경에 보면 좀 더 명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이스라엘의 이름을 역사에서 지우실 마음이 없으셨다. 그래서 여호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을 사용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
흥미롭죠? 악인도 단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유보된 심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평가
오늘 본문 2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 십오 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B.C. 786년에 왕위에 오른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41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이름의 뜻이 “백성이 번성케 되기를 원하다”이듯이 북이스라엘에서 전성기를 이룬 안정과 번영의 나라를 이룬 사람입니다.
그의 치적에 대하여 오늘 본문 2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여기에서 ‘하맛’이라는 곳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맛은 아람의 수도 다메섹으로부터 북쪽 215km에 위치한 상업적으로 번성한 도시입니다.
다윗 왕 때 잠시 점령한 적이 있었을 뿐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같이 영토를 확장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큰일을 이룬 여로보암 2세를 향하여 사람들은 아주 좋은 평가를 내어놓았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4절의 기록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아무리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악을 행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의 성공으로 평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인데요.
이 땅에서 그가 잘 되고 번성함이 의로움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라!”는 교훈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이 세상에서 어떻게 평가받느냐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해도 성공하는가?”
그런데 이 질문보다 더 본질적으로 물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세상 적으로 볼 때 41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든 여로보암 2세에 대하여 성경은 단지 7절을 할애할 뿐입니다.
두 가지 관점이 있겠죠.
그가 이룬 성공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든지, 아니면 그가 이룬 성공이 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성공에 대해 착각하는 이유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죠.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데 말입니다.
여로보암 2세의 죄가 무엇인가요?
하나님 대신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이죠.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잘 나가는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장해주지 않는 성공이 얼마나 허무한지가 드러납니다. 그렇게 강성했던 북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죽은 후 30년이 못 되어서 앗수르의 손에서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가 살던 시대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기준이 선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여로보암 2세보다는 ‘아모스’에 대하여 훨씬 더 익숙할 것입니다.
성경은 여로보암이 2세가 이루었던 번영보다는 그의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 아모스와 그 시대의 영적 어둠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서 기자는 여로보암 2세의 치적을 단 7줄로 축소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대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오히려 아모스와 호세아서를 읽어야 합니다.
아모스서의 증언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경제적인 부를 누리고 있었으나 대다수 백성을 궁핍했다고 증거하고 있으며, 가장 부유했던 시대에 가장 차별이 심했고, 가장 나라가 번성했던 시대에 법의 집행관들도 뇌물로 재판함으로 가장 불행했던 시대를 살아가야 했습니다.
아모스는 남 유다 출신이지만, 북왕국의 대성전이 있었던 벧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모스 2장 6~8절을 보세요.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7. 힘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아모스는 먼저 사회적인 죄에 대하여 지적합니다.
재판관이 은을 받고 의인을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적은 부채를 갚지 못하는 사람을 종으로 팔아넘깁니다.
부유한 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하여 횡포를 자행하고 비인도적인 일을 행합니다.
참으로 신기하죠?
돈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불의한 부자들에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 결코 성공일 수 없고, 행복일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죠.
사회적 타락은 자연적으로 윤리적 종교적 타락을 불러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전 안에 한 창기에게 드나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알을 섬기는 종교와 연관된 성창제도를 의미하는 것이죠.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전당 잡힌 옷을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제단 옆에 그 옷을 펴고 뒹굴고 있습니다. 가식적인 그들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죠.
여로보암 2세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을 들라면 아모스 8장 11절이 아닐까 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의 별명이 ‘정의의 선지자’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고, 불의한 길에서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외치지만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로보암 시대의 안정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죠.
“좋은 말 할 때 들어!”
안락함에 취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에게 가장 잘 듣는 특효약은 “보금자리를 흩어버리는 것”인 듯합니다.
안락함에 취해버린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 가운데 있음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의 착각은 “잘 된다.”라는 상황 가운데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그들이 악한 길에 서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가 죽자 바로 쿠데타가 발생하고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을 하고 맙니다. 아모스의 예언이 있고 약 25년이 지나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이스라엘의 전성기에 얼마나 타락을 했는지 걸출한 선지자 두 사람이 활동을 합니다. 아모스는 사회 정의에 대하여 외쳤다면,
호세아 선지자는 “종교 정화”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하게 될 터인데, 하나님의 목적이 심판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돌이키기를 원하신다는 마음은 호세아서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혼인한 관계로 묘사되었던 것처럼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싶으셨습니다.
호세아 1장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전달하는 비유인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맞아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아이를 낳지만 그 아이가 호세아의 자식이 아닌 듯합니다.
첫째는 이스르엘인데 그 의미는 “조금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이라는 뜻이요.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니 이름을 ‘로루하마’라 짓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로루하마를 젖 뗀 후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로암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음탕하게 부정한 방법으로 낳은 자식의 이름 하나하나에 정을 떼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음탕한 여인 고멜을 맞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또 태어난 사생아를 보며 저주하지만, 다시 맞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의와 음행으로 낳은 자식 하나하나에 무서운 이름이 지어지지만,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자식들에게 혼을 내며 경고하는 것과 같은 것 같습니다.
“너 말 안 들으면 부자간의 정을 끊는다. 셋을 셀 때까지 들어라. 하나, 둘, 둘 반.”
그렇게 심판을 유예하는 부모의 마음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돌아오라!
여로보암 2세를 통해 성경이 증거 하는 것은 하루빨리 하나님의 기준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누리는 것, 편안함과 부를 보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를 통해서 보았듯이, 지금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번성함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정의가 사라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순결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라와 가정과 신앙의 축복은 ‘관계’에 있는 것이지 번성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새로 나온 [광수생각]을 선물로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준비하며 읽었기에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남녀 간의 대화입니다.(66-67)
남자: “우리 아버지는 유명한 변호사에 빌딩도 두 채나 가진 부자라고! 그리고 나도 명문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다닌다고!!
게다가 난 삼 형제 중 막내라고. 근데 왜 내 청혼을 받아주지 않는 거지? 내 배경과 스펙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여자: …….
으음. 너의 배경과 너의 스펙은 마음에 드는데 네가 싫어!
왜 제가 말씀을 준비하며 이 만화가 마음에 다가왔을까요?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번성과 축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보시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가? 라는 것이죠.
이 만화 다음에 광수생각은 이런 글을 덧붙여 놓았더군요.
“나의 재벌론”
간혹 살다 보면 아는 사람이 누군가를 가리키며 그에게 잘하라고 한다.
의문스러워 하며 내가 그에게 왜 잘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굉장히 돈이 많은 사람이란다. 그런 사람에게 잘해서 나쁠 것 없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 말에 요즘의 나는 콧방귀를 뀌지만, 고백건대 나도 한때 그들처럼 돈 많은 사람과 가까이하면 내게 뭔가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러했던 나의 행동들이 창피하기 그지없고, 누군가가 그런 나의 과거 행적을 알까 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 내게는 나만의 ‘재벌론’이 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경품이 당첨되는 것도 공짜 같지만,
당첨되기까지의 일정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 로또 역시 구매를 해야 함은 물론이고 부록으로 좋은 꿈도 꿔야 한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공짜로 얻는 일은 당시에는 분명 공짜 같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족쇄가 되어 내 발목을 잡기 마련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재벌들이 돈이 많다고는 하나 이유 없이 아무에게나 쓰지 않는다. 그에게 1조가 있다고 해서 나나 당신에게 백만 원 쓰는 것을 우리 주머니의 천 원쯤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가 백만 원을 쓰면 나나 당신은 결국 그에게 백만 원의 가치를 무엇인가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그리고 살다 보니 느끼는 것이지만 통장에 현찰로 천억을 가졌지만 내게 치맥 한잔 안 사는 재벌보다 비록 통장에 가진 돈은 이백오십만 원밖에 없어도 사천오백 원짜리 떡라면을 내게 아무런 사심 없이 사는 내 친구 장환이가 그들보다 내게는 훨씬 더 재벌이다.
고로 나는 어떤 대기업 회장에게보다 내 친구 장환이에게 더 잘 보여야 한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내게 내 친구 장환이는 재벌이니까.
정말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생각으로 세상의 것을 누리려는 욕심은 아닌지 말입니다.
아니, 아무리 내가 쌓아놓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못하는 물질과 명예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말입니다.
여로보암이 쌓아놓은 부귀와 영화에 대하여 성경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7절을 할애했을 뿐입니다.
이제 두려운 마음으로 오늘의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과 사역이 하나님은 전혀 관심이 없는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우리의 악한 행위들을 감추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결국,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 서기보다는 삶의 필요를 따라 살 때가 많은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우리가 누리는 것에 대한 가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우리의 노력이라는 말입니다.
잠언 4장 27절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거룩한 기준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 제자의 삶이라고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상의 기준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제자들과 군중이 예수님에게 힘으로 이 세상을 바꾸어 보자고 할 때, 골고다의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기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모인 우리가 정작 예수님의 길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우리는 멍에를 벗으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멍에를 메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얻으면 편안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내려놓아야 편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30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