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칼럼] 아가서 강해(14)-아 5:10~16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사람들은 술람미 여인에게 “네 사랑하는 자는 남들 사랑과 무엇이 다르냐”고 물었다. 본문은 그에 대한 술람미 여인의 대답이다. 술람미 여인은 신랑 솔로몬의 유별난 특성에 대해 자랑한다. 샬롬의 신랑 솔로몬은 샬롬을 주러 오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교회는 술람미 여인처럼 그리스도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네가 믿는 신앙, 네가 믿는 하나님은 다른 종교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권면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해야 한다. 창조론, 구속론, 기독론, 신론, 성령론, 천사론, 마귀론, 교회론, 삼위일체론, 신앙과 과학, 종말론, 세상(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문학, 삶 등등)에 대해 신앙의 눈으로 답해야 한다. 이제 신부(교회)가 어떻게 신랑(그리스도)을 자랑하는 지 살펴보자.
1) 존귀한 신랑(10절)
신랑은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 뛰어나다. 이것은 신랑의 존귀함을 찬양하는 구절이다. 흰 것은 존귀함을 나타낸다. “전에는 존귀한 자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렘 4:7). 존귀는 단순한 과찬으로 존경하는 게 아니다. 비굴함으로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존경’의 라틴어 어원 ‘레스피케레’(‘respicere’)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올려서 바라보는 것이다.
솔로몬의 피부는 희고도 붉었다. 그의 아버지 다윗 왕도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을 때에 얼굴 빛이 붉었다(삼상 16:12). 붉은 것은 십자가 보혈의 존귀한 사랑을 나타낸다. 즉 흰 것과 붉은 것은 모두 존귀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존귀함과 순결과 사랑과 연관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는가.
2) 왕(순금) 같은 신랑(11절)
머리가 순금 같은, 왕 되신 신랑 솔로몬을 찬양한다. 금은 존귀함과 변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오직 왕만이 황금 면류관을 쓴다. 즉 순금은 왕을 상징하고(시 21:3) 하늘나라의 영원함을 상징하며(계 3:18; 21:18, 21) 탁월함을 상징한다(시 45:7; 왕상 3:13). 결국 이 본문은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3) 영원한 신랑(11절)
고불고불하고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털은 신랑 솔로몬 왕의 사랑의 역동성과 영원함을 나타낸다. 하지만 실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고불고불한 머리털이 얼마나 가겠으며 까마귀 같이 검은 머리털이 몇 년을 가겠는가. 본문은 신랑 솔로몬 왕을 향한 술람미 여인의 과장된 찬양일 뿐이다. 신부의 외적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부부도 당연히 없다. 영원해 보이는 것들도 조금씩 빛바래 간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로부터만 오는 것이다(히 13:8).
4) 순결하고 부드러운 신랑(12절)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 박혔다. 비둘기는 부드럽고 온유한 성령과 순결함의 상징이다. 순결한 신랑을 바라보는 신부의 눈은 얼마나 복된가. 눈이 젖으로 씻은 듯 아름답게 박혀 있다. 보석이 아름다운 자리에 아름답게 자리한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본문은 술람미 여인이 자신의 눈에 대해 극찬한 신랑 솔로몬에 화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아 1:15; 4:1)
5) 기쁨과 샬롬의 신랑(13절)
향기로운 꽃밭은 위안과 기쁨과 평안의 장소이며 향기로운 풀 언덕도 기쁨이 넘치는 장소이다. 솔로몬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았다. 신부는 신랑과 같이 뺨을 맞대고 있으면 세상이 온통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 같이 보였다. 기쁨과 샬롬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는 영원하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6) 은혜로운 말을 할 줄 아는 신랑(13절)
신랑의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신랑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얼마나 신부에게 향기롭고 기쁨이 넘치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은 백합화 같다(사 35:1-2). 그 말씀이 곧 사랑이다. 투명하고 부패하지 않는 몰약이 뚝뚝 떨어지는 입술은 이 말씀 받은 자의 영원한 복됨을 나타낸다.
7) 완전한 경륜의 신랑(14절)
술람미 여인은 신랑의 손이 황옥 물린 황금 노리개 같다고 찬양한다. 황옥은 녹주석(beryl, KJV), 보석(귀감람석, chrysolite, NIV), 토파즈(topaz, NEB·The Living Bible)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 단어이다. 황금 노리개는 금가락지(gold rings, KJV) 또는 금 막대기(rods of gold)를 나타낸다. 유대 왕 솔로몬의 손은 당연히 아름다웠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신랑을 ‘황옥 물린 황금 노리개’라고 한 표현은, 솔로몬이 성결하고 영원하며 완전한 신랑감임을 칭송하는 구절이다. 손은 역사와 행사를 나타낸다. 즉 귀하신 그리스도의 경륜과 하신 일이 완전함을 나타낸다.
8) 다스리는 신랑(14절)
신랑의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했다. 특별히 ‘몸’은 몸 가운데서도 복부(belly, KJV)를 가리키는 듯하다. 솔로몬 시대에 코끼리의 앞니인 상아는 아주 귀한 수입품이었다(왕상 10:22). 이 상아는 분명 왕좌의 주변 장식용으로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혹시 복부에 이 상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몸을 가진 사람이 왕이요 술람미 여인의 신랑이었다. 신랑이 아로새긴 상아를 입힌 청옥 같은 몸으로 빛나는 왕좌에 올라 다스리는 왕임을 나타낸다(왕상 10:18-22).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표상이요, 그리스도는 하늘의 기둥이요, 하늘 영광의 왕좌에서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9) 능력 있는 신랑(15절)
신랑의 다리는 순금 받침 세운 화반석 기둥 같다. 대리석(marble, KJV)으로도 번역되는 화반석은 결이 곱고 아름다워 솔로몬의 성전에 쓰인 석재였다(대상 29:1). 이 비유는 솔로몬이 안정적이고 능력 있는 신랑감임을 나타낸다.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 있는 사람은 최고의 신랑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견고하며, 그리스도는 능력을 지니신 주님이시지 아니한가.
10) 판단(공의의 심판)하는 신랑(15)
신랑의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다. 레바논 같다는 표현은 심판의 보좌에 앉은 모습을 나타낸다(단 7:9). 왕은 그 나라의 최종 심판자이다. 심판의 보좌에 앉은 사람이 자신의 신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는가! 백향목처럼 보기 좋다는 표현은 무엇일까? 백향목은 당대 최고의 나무였다. 당대 최고의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신랑이란 누구인가. 심판의 백향목 보좌에 앉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창조의 주(主)요 구속의 주(主)인 그리스도 뿐이다.
11) 소통의 신랑(16절)
신랑의 입은 심히 달콤하다. 말씀의 통로인 입이 어떻게 달콤할 수 있는가. 사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말씀의 입술은 놀랍게 달다. 다윗은 시편 119편에서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다고 고백하였다.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도 말씀이 얼마나 꿀송이처럼 단지를 체험한 사람이었다. 다윗과 요한처럼 과거 깊은 영성의 소유자들은 말씀 안에서 이런 놀라운 체험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요즘 영성이 있다는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말씀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물리적인 이상한 것에서 능력을 찾으려 한다. 이 같은 것은 유사(類似) 영성일 뿐이다. 참 영성의 사람들은 오직 말씀 안에서 놀라운 능력을 찾았음을 잊지 말자. 기독교는 소통(말씀)의 종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와 대화가 통해야 한다. 말씀이 통하면 모든 것이 통한다. 십자가 사랑으로 이웃과 하나님과 소통하라!
12) 사랑하는 친구 같은 신랑(16절)
친구와의 친밀한 사랑은 아름답다. 남녀 간 사랑도 때로는 친구 같은 사랑이다. 참 친구는 친구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사랑한다. 친구를 위하여 죽으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친구라 하시며, 친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요 15:14-15).
소중한 것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술람미 여인은 신랑이 떠난 후 신랑의 많은 장점들을 발견하였다. 그러면서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혹시 여러분은 신랑 되는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술람미 여인처럼 주님이 떠난 후 탄식하지 말고, 다시 눈을 번쩍 뜨고 주님의 사랑을 느껴 보자! 신랑이나 신부는 혹시 곁을 떠날지 모르나, 주님은 늘 우리 곁에서 우리 사랑을 기다리신다!
사랑 풍경14-도장골 아주머니
남한강 도장골에서 작은 편지가 왔다
도장골 아주머니는 그리운 유년의 내 유모였다
늦둥이 막내의 투정을 넉넉히 받아주던 우리집 유모였다
편지 속 유모는 늘
낡은 사진처럼 익숙한 시간에 멈춰 있다
기다리는 그리움들은
그렇게 잘 움직이지 않는다
편지 속 도장골에도 현실은 늘
호암지 낮은 안개처럼 지나간다
물참나무 그림자 따라
과수원 땀방울을 닦으며 가을이 진다
도장골 언덕은 여전히 작아도
대림산 가을 해는 제법 커 보인다
친구가 커 보이고
우리들도 커 보이고
고향 종소리는 더욱 커 보인다
수확 앞둔 과수원길 따라 도장골 저녁 연기가 커 보인다
도장골 건너 저녁 달래강은
묵묵히 역사 속으로 쉬지 않고 걸어가고
도장골 아주머니는
잡초 같은 내게 늘
언제든 의지할 만한 유일한 긍정적 화초였다
그 도장골 아주머니가 그리운 유모 되어 낡은 편지를 보내왔다
그만 안나처럼 고부랑 할머니 권사가 다 되어서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