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 목사 설교] 예배자가 된다는 것!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날짜: 2015년 1월 11일
본문: 로마서 12:1-2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예배자가 된다는 것!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Action Plan’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다시 한 번 만나교회의 슬로건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나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소망을 던져 줄 수 없다면 더는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지난주 신년 집회를 인도한 이루다 목사님을 통해 참 인상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 거룩함으로 우리를 부르시는데 우리는 ‘거북’한 것은 아닌지. 선지자 요나를 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로 ‘yes’라고 했으면 1장에서 끝났을 것을, 미루고 미루다 성경 통독을 하는 우리에게 3장이나 더 읽도록 만들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의 사명에 대하여 거룩하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가장 큰 이유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과 생명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명을 위한 우리의 ‘mission’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지역과 세상을 섬긴다.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모임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 불림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배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며 섬기는 힘을 얻습니다.
‘힘’이란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헌신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1년 전 제가 여러분과 함께 “Radical Gospel”이라는 주제에서 “믿음으로 살아라!”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는 것처럼 “주님, 제가 제 몸을 온전히 드립니다!”라는 말 자체가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참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우리 같은 것을 고쳐 쓰시려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자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격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사명에 충실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왜 예배합니까?
예배하지 않는 어떤 선행과 훈련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를 통해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혹시 우리의 만족이나, 감정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의 기쁨과 감격!”
혹시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억지로 한다면 잘못된 것 아닌가요?
현재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이 예배의 지루함을 호소합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예배가 지루하다, 설교가 길다 등등의 이유입니다.

어느 40대 아들과 60대 어머니의 대화입니다. 여러분에게 공감이 갈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나는 예배드리기 싫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일 아침은 늦잠 자고 싶어요.
둘째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요.
셋째 성가대의 불협화음이 싫어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머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둘째, 예배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셋째, 너는 담임 목사니까 결석하면 안 된다.

학창시절을 지난 여러분이라면 모두가 기억할 것입니다. 학교에 가고 싶은 날도 있고 가기 싫은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기 때문에 학교에 갑니다.
혹 여러분 중에는 가정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 가정을 떠나고 싶을 때도 있죠. 하지만 내가 가정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고, 어머니고, 자식이기 때문에 다시 가정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점점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예배가 우리의 사명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은, “예배가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주목해 보세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절) 
오늘 본문에서는 “제물”(제사)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 제사를 수식하는 말로 “거룩한 산”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습니다.
제사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레위기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제사장을 중보자로 세우고 제물을 드리는 예식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있었고, 피를 흘릴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신약시대로 넘어가면서,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시므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따로 제사장도, 제물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중보자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물 된 우리에게 예배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드리라는 것”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그러므로 구체적인 행위를 동반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몸보다는 마음을 드리므로 예배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은 드리기 쉽지만, 몸은 드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구별된 우리의 몸이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예물을 원하시지도 않으시지만, 마음만 있고 몸이 따르지 않는 예배를 거룩한 예배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구체적인 헌신의 행위들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헌신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의 관객이 아니라 예배의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가 있기 위해 어떤 헌신을 하고 계십니까?
언젠가 [대찬 인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영화배우 강수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천재 배우인 그녀의 대본은 늘 깨끗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천재여서가 아니라 너널너덜하게 연습한 대본 말고 또 하나의 대본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말입니다.
주연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외워야 할 분량도 많고, 애써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에 조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배의 주역이 아니라, 예배의 관객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 갖추어진 예배에 관람한 사람들과 그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헌신한 사람들의 예배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예배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형식적인 면이요 다른 하나는 내용적인 면입니다.
먼저 형식적인 면에서 예배를 정의해 보겠습니다.
“어떤 예배도 성경적인 예배란 없다.”
모든 예배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이 모든 표현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단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면, 요한복음 4장 23~24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의 기준이란 ‘영’과 ‘진리’입니다. 어떤 형식으로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혼란스러워서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왜 만나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나요?
왜 만나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가운을 입지 않으며, 강대상이 없나요?
왜 만나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전자 음악을 사용하나요?
왜 만나 교회는 광고를 설교시간 전에 하나요?
왜 만나 교회는 헌금 바구니를 돌리나요? 등등.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면서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의구심이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드려왔던 예배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가?’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예배에 대한 형식적 정의를 다시 내려 보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 달라도 신령(영)과 진정(진리)으로 드리는 것이라면 용납할 수 있다.”
예배는 수없이 다른 모양과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언젠가 예배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유행한 “대-한민국” 손뼉을 함께하게 시켜본 적이 있습니다. 이 손뼉은 엇박자로 되어 있어서 모든 사람이 따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간에는, 이 손뼉을 칠 수 있으면, 젊은이요 그렇지 않으면 늙은이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손뼉을 치자고 했더니, 거의 모든 사람이 따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선 대부분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익숙함이 다른 사람의 익숙함과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결국, 모든 형식이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형식에 대하여 마음을 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마음을 열고 마음껏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왜 만나 교회에서 1~5부까지 주일 예배의 형식이 다른지 아시겠습니까?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은 이유는 여러분이 가장 기쁘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예배 가운데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형식이라 해도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더욱 중요한 만나 교회 사역 철학 중의 하나는, 아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예배 가운데 끌어들이기 위해 문화적인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 교회의 예배를 이렇게 또한 정의합니다.

“우리 교회 예배는 교회 중심적인 예배가 아니라 선교 중심적인 예배입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예배 가운데로 들어오도록 준비하는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으시나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매일 듣던 사람의 사랑 고백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의 고백과 아직 들어보지 못한 사람의 고백을 더욱 기쁘게 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백성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이 땅의 모든 백성이 예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예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서 찬양을 받으시지 못하고, 지루함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아프실 것입니다.

음악이 예배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음악이 예배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을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시리라는 것이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예배할 때,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그것만을 받으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는 스타일, 음량 혹은 곡의 속도와는 전혀 무관하다. 하나님은 노래가 빠르든 느리든 시끄럽든 조용하든,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에 모든 종류의 음악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그 모두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두를 좋아하신다. 만약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그것이 예배의 모습인 것이다.”(릭 워렌)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음악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배경과 인격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다양성을 받으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싫어하셔, 혹은 이것은 예배 음악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예배로…
예배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내용적인 면에서 예배를 정의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로 “영적 예배”라는 말입니다. 즉 내용적인 면에서 예배는 영적 예배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우리 생각의 오류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선택하므로 나머지 부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송파에 있는 옛 교인들을 심방할 때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심방한 세 집 모두 빌라를 지어 세를 놓은 주인집이었습니다. 처음 심방한 장로님 가정은, 그다음 심방하게 될 권사님 댁을 전도했으며, 그다음 집은 그 권사님 가정이 전도하여 올해 신천 집사가 되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집의 권사님이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인의 경험에 의하며 신앙성장의 첫 번째는 예배 참석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예배에 참여하며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예배시간에 임할지 모른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사는 삶의 환경에서 모든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거나 참여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배가 우리의 “선택적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선택”이라는 말 가운데는 헌신보다는 ‘편의’라는 의미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예배의 주체가 ‘나’가 아니고 ‘하나님’임을 인정할 때, 예배는 나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선택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예배 회중을 또한 선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나는 저런 사람하고는 예배드릴 수 없어! 저 사람 때문에 나는 교회를 떠날 거야!”라고 하는데 우리 주님은 “바로 그 사람과 함께 예배드리기를 원해!”라고 말씀하시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적 예배”라고 말하면서도 “관계”를 더 중요시하지 않은지 말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관계가 될 때는 다른 회중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관계가 깨어지면, 여러 가지 핑계들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말씀을 하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 23~24절을 주목하십시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사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얼마나 약합니까?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구약 시대에 보면,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화목하게 시키셨습니다. 레위기 7장 15절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구약 시대의 제사에 보면, 드려진 제물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화목제물은 예배를 드린 모든 공동체가 함께 즐기며 먹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화목제물을 나누는 데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제사로 드리는 소 한 마리는 1,300근에서 1,500근이 나갔다고 합니다. 제사장 몫인 제물의 가슴과 뒤쪽 다리 하나를 떼 내었다 해도 나누어야 할 고기는 엄청난 양일 것입니다. 이 고기를 하루 이틀 만에 나누기 위해서는 한 두 사람과 나누어서는 안 될 일이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심지어는 “미운 사람”과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칙을 지킬 수 없게 되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누구나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아니 우리가 자랄 때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싸우고 난 아이들을 억지로 화해를 시킬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라고, 손을 잡으라고, 너희의 입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
아주 어렸을 때는, 서로 안아주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힘든 행동을 통해서 무언가 화해와 사랑의 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어색하고 강요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요와 어색함 속에서 화해가 이루어짐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영적인 부분에서, 영적인 예배에서 성공해야 온전한 삶을 살게 됩니다.

또 하나 영적 예배에 대한 중요한 오류가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마치 예배를 미신처럼 드리는 것이죠.
예배는 두려운 감정을 제어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잘못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주일성수 한다면 그 근본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교우 중에는 사업차 출장을 가게 되면 꼭 주일을 거르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기거든요!”라고 덧붙입니다.
일견 체험적이고 좋은 신앙을 가진 것 같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의 관계 속에서 만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즉 예배의 미신적인 요소란, 의무감에서 드리는 것이냐 사랑의 관계에서 드리는 것이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당시의 잘못된 종교와 예배의 형태에 대하여 예수님이 분명하게 답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시니”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시고 싶었던 일은 “하나님은 사물(things)이 아니시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영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지, 육체적인, 세상의 것과 관련지어 말씀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일어나는 일이죠. 우리 집사람이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께 조그만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렇게 말을 하더라는 것이지요. “아니 학기가 끝났는데 왜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왜일까요? 학기 초에 가져다주는 선물은 “뇌물”이지 “감사의 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물을 드리고 싶었지 뇌물을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도 기쁘게 받으셨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우리에게 “감사의 고백”을 받고 싶으신 분이시지, 조건적인 뇌물을 받으시려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드리는 우리의 시간과 물질, 재능이란 조건적인 것, 혹은 물질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이만큼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 자체가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만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하게 구별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느 장소에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소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시간에 예배를 드리든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삶에서 구별된 시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류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진실 앞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거짓 고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예배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계신 곳에 우리가 머무르려는 것이 예배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오셨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예배일까요?
물론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훨씬 더 훌륭합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 교회라는 건물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의미는,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그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렸다는 것이고, 그것이 성도 간의 거룩한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성도 간의 거룩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는 헌신의 다짐이 있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이 약속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임재와 선교를 위하여 장소를 옮긴다면 의미가 있지만, 나의 편의대로, 자의대로 장소가 옮겨진다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Action Plan
이제 “구별”이라는 관점에서 예배자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Action Plan’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거룩”이라는 말이 성경에서는 “구별”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예배는 구별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지요.
오늘 본문에서 로마서 기자도 분명하게 말하는 것처럼, 거룩한 산 제물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드릴 때, “흠 없는”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찾고 찾아서 드리는 예물이 흠 없는 예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를 향해 미소 지으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올 때, 제사를 드리는 것(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구별하여 왔습니까?
또 하나의 선택적 예배가 아니라, 그분을 가장 사랑하는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었습니까?
시간의 구별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예배를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남는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예물을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물질 중의 하나를 지갑에서 꺼내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특별하게 구별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헌신과 봉사가 자신의 남는 시간과 자신의 즐거움으로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아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입니까?

여러분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가장 신뢰할 때 우리를 향해 미소 지으신다는 사실을.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장소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드러날 때, 예배의 삶을 산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불의한 재물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불의한 인간관계를 청산하고 나오셨습니까?
철저한 신뢰는 철저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철저한 순종은 우리의 이해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의 삶을 살 때는, 우리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이 아니라, 지극히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주로 비상식적인 순종의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몸과 삶이 드려지는 헌신 말입니다. 자신의 것을 챙기고, 자신의 성을 쌓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과 재물을 쌓는 그런 일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분의 하시는 일들을 기뻐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야말로 예배자의 삶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합니다.
지금도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들을 감사합니다.

만나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주일 1, 2, 3, 4, 5부 예배 중에 어떤 예배를.
새벽 5시 30분 예배와 저녁 9시에 매일 드려지는 예배.
수요일에 여성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시니어대학과 함께 드려지는 수요공감예배.
금요일에 말씀을 묵상하며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금향로 예배.
매월 초하루가 되면 새벽 5시 30분에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하며 성만찬에 참여하는 예배.
매년 전 후반기에 일주일씩 새벽에 드리는 변화산 새벽기도회.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송구영신예배와 같은 절기 예배.

지금 여러분은 어느 예배 자리에 나와 있으며, 그것이 자의적 선택인지 구별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여러분이 2015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기꺼이 구별하여 예배를 드리기로 한다면 어느 예배를 구별하시겠습니까?
오늘의 결단이 여러분의 Action plan입니다.

또한, 예배가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기꺼이 헌신하는 것이라면, 오늘 이 예배를 위해 여러분은 어떤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시간의 부분에서 예배 시간뿐 아니라
주차 봉사 (1-4부까지)
헌금 위원 봉사 (1-4부까지)
안내 위원 봉사 (1-4부까지)
카메라와 통역이 필요한 곳에서 (2-4부까지)
새가족부와 사진 봉사
찬양대와 악기로 봉사하는 곳에서

물질에 부분에서
주일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 사랑 나눔, 십일조 등
어느 부분에서 우리의 귀한 물질을 구분하기를 원하십니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누구도 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구별하여 드리는 모든 것이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 줄 것입니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곳에서 여러분이 예배자가 되고, 아무도 헌신하지 않는 곳에서 여러분이 헌신자가 되는 것 말입니다.
무엇보다 예배시간에 늦는 실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잠시도 끊지 못하고 놓지 못하는 스마트 폰의 버튼을 꾹 누르고 들어오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예배자로서의 여러분의 옷차림과 음식, 그리고 자세에 대한 부분을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헌금시간이 되었을 때 주머니에 손을 넣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예배자로서의 삶은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면서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Action Plan에서 깊이 생각해 봅시다.
“나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거슬리는가?”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내가 고쳐야 할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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