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 목사 설교] 기도생활이 주는 유익 1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날짜: 2015년 2월 8일
본문: 출애굽기 32:7~14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기도생활이 주는 유익 1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출애굽기 32장 7-14절]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재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고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지난 한해 ‘Radical’(래디컬)이란 주제로 말씀을 전하며 개인적으로 저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것은 ‘믿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믿음 좋은 사람을 많이 봐왔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열심히 예배드리는 사람, 그리고 열심히 헌신, 봉사하는 사람. 그런데 왠지 그런 행위만을 가지고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데 왜 그렇게 인간적일까?’
이러한 ‘모순’에는 우리의 잘못된 기도가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매 주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이라는 주기도문을 외우며 실상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 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던 이유는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기 위한 기도였는데, 우리는 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기도하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뜻을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꺾는 기도를 기뻐하실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 하는 기도, ‘중보기도’입니다.


왜 중보기도를?
오늘 중보기도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서 만나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우리도 위대한 기도의 용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중보기도 사역자들의 일상을 보았습니다. 참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다!”라고 하지만 중보기도는 호흡 이상의 다른 차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인 듯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삶을 생각합니다. ‘중보기도’가 아니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생각입니다. 인생의 고비마다 나의 의지가 아닌, 내 삶을 인도하심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내 삶에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기도의 사람 E. M. Bounds는 “하나님에 관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관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훨씬 더 위대한 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중보는 우리 자신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는 일이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중보’(intercession)란 말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얻기 위해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즉 ‘inter’(between)와 ‘cession’(go), 즉 이쪽저쪽의 가운데 위치하여 서로를 연결하여 주는 행위가 중보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내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사회, 민족 전체와 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모든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이렇게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중보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본래 우리 인간이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그래서 중보기도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기심’이라는 단어야말로, 현대인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일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의 말씀에 보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정말 놀라운 예언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문제는 바로 자기중심적인 이기심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자신을 양보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공부해서 남 주냐?”라고 하지요. 다시 말해서 “공부 잘해서 잘 먹고 잘살아야 된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신앙적으로 자녀들을 바로 양육한다면, “공부해서 남 줘야 한다. 너는 유익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만 생각하며,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떤 노부부가 자녀들을 다 미국에 시집․장가를 보냈습니다. 아들과 딸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여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찾아간 딸의 가정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흡족했는지 모릅니다. 사위가 얼마나 딸에게 잘하는지 감동이 되었습니다. 박사학위까지 있는 사람이, 아내를 위해서 함께 시장을 보고, 무거운 것이 있으면 들어주고, 식사 준비를 하는 중에도 필요한 것들을 거들어 주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가 좋았는지. 게다가 식사를 마치고 났더니 설거지까지. 정말 흡족한 마음을 가지고 이제 아들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에 마음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변변치 못하게, 아내가 시장을 보는 데 따라가지를 않나, 식사준비를 하는데 주방을 맴돌지 않나, 게다고 밥을 먹고는 설거지까지 하는데 정말 눈뜨고는 못 봐줄 노릇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노부부는 이야기합니다. “사위는 참 잘 얻었는데, 며느리는 영 아니야.”
이런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요.
여러분은 명절에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시원하게 뚫린 차로에서 꽉 막힌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안 됐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빨리 달리는 것이 행복하지요.
낚시꾼이 제일 기분 좋은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월척을 잡았을 때라고요? 아닙니다. 상대방이 월척을 잡다 놓쳤을 때랍니다.

중보기도는 바로 이런 인간의 이기심을 뛰어넘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며,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모세가 중보기도를 한 후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숭배하면서 율법을 어기는 죄를 지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27~28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그러자 모세가 나아가 하나님께 나아가 다시 중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1~32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들을 중보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이 생명록에서 지워지기를 간구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민족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기도!”
지난주의 말씀과 이어서 생각한다면, 중보기도야말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구체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도 좋다!
계속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기에 우리의 뜻을 꺾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내가 죽는 것이지, 내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기도 중에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욕을 위해서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정욕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가에 따라 옳고 그름이 갈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죠.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근거가 되는 마태복음 6장 33절을 연결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의 모든 기도와 간구를 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크리스천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도에 관한 구절 중의 하나가 요한복음 15장 16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에 주목하지, “내 이름으로”라는 데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인정한 사람” “Lordship”을 인정한 사람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되심을 인정한 사람의 기도가 어떻게 정욕적이고 자기중심적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는 기도”가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벌을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범한 죄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32장 1~6절까지 나와 있는데, 4절만 보겠습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우리가 십계명 말씀을 통해 배운 것이 있지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죽음’에 처하는 형벌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12절입니다.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모세는 그들이 잘못을 범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가장 좋은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 자비하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공의’를 넘어선 자비와 용서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누군가를 위해 중보하며 자비하심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중보기도가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혹시 당신의 가정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 하여 심판을 받을 만할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분명히 잘못한 자식을 부모의 입장에서 혼내야 합니다. 때로는 매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매를 든 부모의 마음이 더욱 아픕니다. 그때 누군가 말려주면 못 이기는 척 하고 매를 내려놓을 텐데 말입니다.
중보기도가 바로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도가 아닐까요?
사실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제 말이 이해가 되나요? 아버지라면 이해가 될 듯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가족이 어디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험악한 지경을 다닌다 할지라도 당신의 중보기도가 그 위험 속에서 지켜주고 있음을 아십니까?
저는 늘 제 인생을 돌아보면서, 기도 속에 산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쌓아 놓은 노력보다는 기도의 힘이 나를 이끌어 갈 때가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만나 교회에서 바로 이 기도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중보기도로 인하여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당신의 가정에서 그런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Action Plan! - 기도의 동역자가 되어 주십시오!
변화산 때가 되면 여러분은 예배를 위해 미리부터 와서 기도하는 중보기도 대원들을 봅니다. 왜 변화산 때가 되면 변화가 일어날까요? 만나 교회가 자랑하는 가장 좋은 프로그램 1위로 ‘BTD’가 선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성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중보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만나 교회 강단 뒤쪽에는 두 개의 방이 있습니다. 아론과 훌이라는 이름의 방입니다. 주일 예배가 이루어지는 4번, 시작부터 끝까지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중보기도 대원들을 야단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일 설교를 하고 났는데 영 마음이 불편합니다.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그때 갑자기 준비가 부족하다는 생각보다는 중보기도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기도했는지 의심이 갑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제가 잘못한 걸까요? 중보기도 대원들의 기도가 약했을까요?

중보기도에 대한 말씀은 다음 주까지 두 주간에 걸쳐서 나누게 될 것이고, 오늘은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 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 ‘담임목사’를 위한 기도의 동역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아니 부탁이 아니라 왜 중요한지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마음을 빼앗아가려는 ‘사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교회라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가고, 그 소원으로 인해 이 땅에 소망을 주는 공동체라면, 이 공동체를 해체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무엇일까요?
사단은 여러분 한 사람을 공략하기보다는 저를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제가 쓰러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겠습니까?
옛날 전쟁에도 보면 전략이 간단합니다. ‘장수’를 치는 것입니다. 대장이 쓰러지면 전체의 사기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지도자 모세와 합력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대표적인 아론과 훌의 기도가 나옵니다.
출애굽기 17장 8~15절을 보세요.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아말렉과의 전쟁이 ‘여호와 닛시’라는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승리의 깃발이요, 이스라엘의 모든 승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여호와 닛시의 깃발이 날리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동역의 원리’입니다. 우리 믿음의 partner, 혹은 승리의 partnership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9절에 보니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모세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것이 아니라 싸움은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자신은 능력의 지팡이를 잡고 산꼭대기에 서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중보기도에 동역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훌륭한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혼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17장 말씀의 중보기도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전에 있었던 사건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모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광야기를 가다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물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불평이 지도자를 향했습니다. 그들을 잘못 인도해 물이 없는 곳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것이죠. 사람들은 언제 불평하나요? 지도자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닐 때죠. 사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모세가 지금까지 한 일이 무엇인가요?
출애굽기 3장 7절의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얼마나 못된 사람들인지 아시겠습니까? 고통받는 자들을 인도하여 내었더니, 잠시 그들에게 물이 없음으로 지도자에게 불평하며 대드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놓았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속담이 전혀 틀리지 않죠.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바로와 싸우던 지도자를, 자신들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것이지요.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말씀은 단순히 지도자와의 문제뿐 아니라, 여러분의 영적인 생활에서의 동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역을 잘하는 사람은 승리하지만, 다툼과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치욕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자명한 원리입니다.
문제가 없었던 때, 모든 환경이 좋았던 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누구나 좋은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 타인에 의하여, 환경에 의하여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때가 문제입니다.

저는 요즘, 새가족들이 두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애찬에서 이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합니다. 우리 교회를 선택하고 등록하는 사람들의 유형이 대체로 3가지쯤 됩니다.
첫 번째는, 아는 교인에 의하여 선택의 여지 없이 등록한 경우.
두 번째는, 환경적인 요인으로 건물, 프로그램, 자녀 교육 등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차지하는 세 번째 이유는, 교회를 많이 돌아다니다가 설교가 맞아서 등록한 경우입니다. 죄송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를 찾아 등록하는 사람들의 가장 높은 비율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두렵습니다. 설교가 좋아서, 설교가 나에게 맞아서 등록했다면, 그 설교가 지루해지고, 나에게 맞지 않는 설교로 들릴 때,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이유는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역”의 원리란 나의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 힘이 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늘 마음에 맞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가족이 늘 맘에 맞아야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가 나에게 만족을 주어야만 한다면.

사실 우리 주위에는 좋은 시절, 너무나 좋은 동역자였는데, 어려운 시기에 서로를 비난하고 떠나가는 경우를 봅니다. “동역의 원리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난 가운데 사랑하고 감싸주고 동역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상처를 입으면 안 되기 때문에 사랑하고 감싸 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지날 때,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중보하는 것입니다.
저는 만나 교회가 30여 년을 지나는 동안 교회를 떠나간 많은 사람을 봅니다. 이유는 참 간단합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허물이 보일 때 비난하거나 떠나는 사람은 누구나 하죠. 하지만 내 가족, 내 어머니, 내 조국, 내 교회이기 때문에 허물을 보고도 안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그런 기도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담임목사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묵묵히 기도하며 돕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킵니다.” 정말 바보같이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와 민족이 살고, 교회가 살아나며, 하나님의 나라가 섭니다.
출애굽기 17장이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은 아론과 훌의 태도입니다. 12절입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돕는 자가 최선을 다하는 것을 봅니다. 모세가 피곤할 때, 돌을 가져다 모세에게 앉게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피곤했지만, 스스로 돌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손을 내리면 전쟁에 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피곤함을 방관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표현에 의하면 “팔이 피곤하매”라고 되어 있는데, 팔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모세의 어려움을 알고 자신들이 돌을 가져왔습니다.
중보하고 돕는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한편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모세의 팔을 들어줬는데, 아마도 모세와 같은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당신은 목회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돕는 자가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중보기도의 사람 바운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시대뿐 아니라 아마 모든 시대를 통틀어 최대의 악 중의 하나는 조금만 기도하거나 아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 기도하는 것은 안 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조금만 기도하는 것은 일종의 속임수이며, 양심에 대한 속박이며, 광대극이자 허위극입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게 기도하시며 고민하실 때, 제자들의 기도가 필요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을 보십시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가장 힘든 순간을 지나면서, 사랑하는 제자 셋(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으라”고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힘든 순간을 지날 때, 조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있지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는 늘 변명과 핑계로 일관합니다. 이것은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변명의 창고를 가지고 있답니다. 우리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사역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경계선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나는 시간이 없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시간이 없어서 밥을 먹지 않거나 시간이 없어서 숨을 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주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죠. 그런데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말을 하지만, 주님은 네가 그렇게 바빠서 꼭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해서 동역자가 되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제가 바른 판단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승리하도록,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도가 “담임목사의 판단과 결정이 나의 생각과 같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제 생각이 꺾이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결국, 기도란 내 생각이 꺾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회자는 여러분의 생각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으로 움직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아론과 훌이 되어서 목회자를 바라보십시오. “왜 목사님의 팔이 내려와서 영적 전투에서 패배합니까?”라고 질책하기보다는, 저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내가 동역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동역의 마음이란 주님과 함께하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으로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참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주님과 함께

세 사람의 남자가 주님과 달리기를 했다.
첫 번째 사람은 주님과 동시에 골인을 했다.
두 번째 사람은 주님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다.
세 번째 사람은 주님보다 조금 빨리 들어와서 1등을 했다.

그들에게는 이런 명칭이 부여되었다.
첫 번째 사람 : 주님과 동행하는 자..
두 번째 사람 : 주님을 따르는 자..
세 번째 사람 :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

주님과 달리기를 한 모든 사람이 다 칭찬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님과 같이 한다면 달리거나
놀거나 뭘 해도 칭찬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 거하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이 어떻게 되느냐?
무엇을 하느냐, 열심히 하느냐
이기느냐 지느냐보다는
내가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출애굽기 17장에 등장하는 아론과 훌의 아름다운 모습은 둘이 동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한 사람이 모세의 양팔을 들어 주려고 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아마도 모세보다 먼저 지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오른쪽에서 한 사람은 왼쪽에서 동역자가 되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33편 1절의 말씀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기가 막힌 말씀이지요.
많은 사람이 동거합니다. 그러나 그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이 선함과 아름다움은 “연합할 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합심할 때 나타납니다.
합심하는 기도는 사탄의 권세를 결박합니다.
서로에게 기도의 동역자가 되도록 하십시오.
서로에게 기도의 의지가 되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연합이 사단의 진을 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만들어갑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중보기도 동역의 열매가 맺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교회와 담임목사를 위해 기도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어떤 기도를 하실 수 있나요?

기도에 가장 적절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혹시 중보기도 대원들과 연합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구체적인 기도에 동참할 마음이 있다면 가능한 기도에 신청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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