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한국의 여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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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내한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 여성의 모습

				▲기생의 모습ⓒ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제공
▲기생의 모습ⓒ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제공

				▲매맞는 여아ⓒ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제공

▲매맞는 여아ⓒ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제공

				▲빨래하는 아낙들ⓒ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제공

▲빨래하는 아낙들ⓒ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제공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는 얼마전 명지대학교 용인캠퍼스에서 “초기 내한 선교사 및 외국인들의 한국이해”라는 주제로'제16회 집중세미나'를 개최했다. 관련 기사세미나에서 진행된 발제 내용 중 '여성관련 부분'만을 특별히 소개한다.(편집자 주)

기독교가 한국의 개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하겠다. 특히 한국사회가 여성의 존엄성과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은 기독교로 말미암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한말 개화기 연구에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건국대학교의 신복룡 교수는 “한국의 개화사에서는 기독교의 긍정적 요소를 부인할 수가 없고, 특히 한국 여성사나 여속사(女俗史)의 면에서 기독교가 끼친 요소를 간과할 수는 없다. 한말에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눈에는 여성잔혹사가 기이하게만 보일 수밖에 없었고, 이를 고치기 위해 여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한국여성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라고 평가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제도 속에서 신음하던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우리나라 여인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나라의 풍습들은 외국인들에게 언제나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한 외국인들의 눈에 조선 여인들의 모습은 유달리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이는 내한 외국인들이 자신들의 저술이나 기록에 당시 조선 여인들의 생활상을 공통적으로 남겨 있음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100여 년 전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의 삶은 한말 및 개화기에 내한했던 외국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춰졌을까?


집(house)은 있으나 가정(home)은 없다

무엇보다도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여성은 신분에 따라 철저히 양분되어 있었다. 상류층의 은둔(隱遁)과 하류층(또는 서민층)의 활동성은 그들에게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 내한 외국인들은 처음에 조선 여성의 지위를 평가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당시 상류층의 여성은 무조건 숨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불변의 규칙이었다. 안채라는 집의 구조와‘내외’(內外)의 풍습은 이러한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그들의 뜰과 안방에 숨어 있었다. 어떤 남자의 방도 그 여자 쪽으로 창문을 내서는 안 되며, 어떤 방문객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의 안부를 묻는 것은 손님의 도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짓이었다. 남편은 아내와 떨어져서 기거했다. 그리고 부부 사이의 우정과 같은 관계나 애정표현과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내한 외국인들은“조선 사람은 집(house)은 있으나 가정(home)은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들 간에 상호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가정의 개념이 한국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은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부터였다. 선교사들의 가정은 그 통로였다. 선교사의 가정을 방문한 조선 여성들은 남편 선교사가 그 부인을 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차 가정에 대한 의식들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여인들의 은둔생활은 남편의 품위를 입증하는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였다. 따라서 이로 인해 독특한 여인들만의 외출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대체로 여인들은 해가 넘어간 지 1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거리를 다닐 수 있었으며, 그때에도 반드시 몸종을 데리고 다녀야 했다. 부득이 낮에 외출해야 할 경우에는 장옷이나 밀폐된 가마 등을 이용해 자신을 철저히 베일 속에 숨겨야 했다. 그럼에도 외출은 가급적 삼가는 것이 여인들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영국의 화가이자 여행가였던 새비지 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는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의 경험을 다음과 기록하고 있다. 랜도어는 길에서 자신이 마주치는 여인들이 한결같이 갑자기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왜 자신이 만나는 여인들이 항상 자기 집 앞에 이미 도착해 있는지가 의아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그곳은 그 여인의 집이 아니었으며, 한국의 여성들은 외간 남자를 만나면 아무 집이나 자기 집처럼 피한다는 것을 알고 그 영문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남녀 간의 내외풍습을 잘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하겠다.

반면에, 하층민의 여인들은 상류층의 여인들과는 달리 어느 정도 여러 활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내한 외국인들은 상류층의 여인들이 하층민보다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층민들은 거리를 활보하고 악다구니를 하며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상류층의 여인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교적 전통에 따라 양반집 마님은 체통을 지키기 위해 위엄이 있어야 하고 몸가짐을 조심하며 냉담함을 지켜야 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내한 외국인들은 상류층의 부인들을 ‘겨울 부인’(winter lady)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하층민의 여인들도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계를 돕기 위해 매우 고된 일들을 감당해야 했다. 많은 경우 물질적인 이해가 그들에게 달려 있었으며, 남성 편의를 위한 차원에서 여자들은 사회의 매우 긴요한 구성원이었다. 초기 내한 선교사였던 게일(James S. Gale)은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소개하고 있다. 게일은 몇몇 일행과 함께 시가지 돌담 옆을 걷다가 돌 위에 앉아서 울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는 마치 땅이 꺼져 버릴 듯이 처절하게 통곡하고 있었다. 이에 게일은 그에게 “왜 그러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잠시 동안 게일과 그 일행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자신이 거기에 남아 있게 된 이유를 대강 이야기했다. 사연인즉 아내가 자기를 두고 떠나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일행 중의 한 여자가 “그렇게 슬피 우는 것을 보니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을까!”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남자는 정색을 하고“그 여자를 사랑한다구요? 나는 결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녀가 내 옷을 짓고 내 음식을 만들었지요. 이제 나는 어떻게 살지. … 어이구 어이구” 하면서 더 크고 처절하게 울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외국인들의 눈에 조선의 여성들은 남성의 편의물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이는 당시 좋은 아내의 기준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남편이 언제나 깨끗한 옷을 입도록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하층민 여성들의 처지가 어떠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흰옷을 깨끗케 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매우 고된 작업이었다. 그래서 여자들이 빨래하는 모습과 다듬이질 하는 소리는 내한 외국인들이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상사로 기록되고 있다.


여성이 눈물짓는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한말 내한 외국인들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가 여권문제이다. 조선 여성의 인권문제가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내한 외국인들은 당시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하에서 희생당하던 여성들의 문제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많은 기록들을 남겼다.

내한 외국인들의 눈에는 이해할 수가 없는 한국인의 풍습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칠거지악(七去之惡) - 불치의 병, 도둑질, 불임, 부정, 질투, 시부모와의 불화, 그리고 수다스러움 -에 의한 여인의 소박(疏薄)이나 삼종지의(三從之義)의 굴레, 여자는 남자가 물린 상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참으로 비인격적인 전(餕)의 풍습, 남아선호사상, 상처한 남편이 슬퍼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허물이 된다는 태도, 여자에게만 미덕으로 강요되는 수절의 풍습과 그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약탈혼(보쌈)의 풍습 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한 외국인들이 보기에 이러한 것들은 모두 여성들에게 씌워진 굴레와 같았다.

당시 여성들은 이원적인 음양철학의 원리에 따라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남자를 우대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것이다. 조선의 여성들은 열등함을 자신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속박 가운데서 여성들은 갖은 구타에 시달렸다. 고분고분하지 못하다든지 화를 내거나 추문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는 모진 매를 맞게 되고 상민의 여자로 전락했다. 물론 상류층에서는 관습상 남편이 아내를 때릴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가 남편을 괴롭히고 가정을 파괴하는 것도 모자라 부정(不貞)한 짓을 저지르면, 남편은 그 여자를 관청에 데려가 심하게 매질하고 노비의 아내로 삼게 할 수 있었다.

여자는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교육을 받아서도 안 되었다. 간혹 상류계급의 여성들이 한글을 익히기도 했지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1,000명 중에 2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여자들은 고유의 이름도 갖지 못했다. 여자가 어렸을 적에는 아무렇게나 속된 아명으로 불리다가 남동생이 태어나면 아무개 누이로 불렸다. 그러다가 시집을 가면 고향을 따서 예산댁, 나주댁으로 불리다가 자식을 낳으면 그때서야 아무개 엄마로 불려졌다. 일생 동안에 여성의 존엄성이나 정체성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러한 풍습은 내한 외국인들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에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여자들에게 먼저 이름을 지어주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여성 신자들의 이름에 마리아, 에스더와 같은 성경인물의 이름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내한 외국인들은 대체로 이러한 여성의 억압이 조상숭배의 풍습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남아선호사상에 따른 조혼(早婚)과 축첩(蓄妾)의 풍습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조상의 숭배는 급속히 뒤따라오는 자식들에게 조혼을 강요하였다. 왜냐하면 바로 아들만이 죽은 자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으며 가문을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10세나 때로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결혼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결혼은 당사자가 아니라 부모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으며, 하나의 ‘숙명’이고 ‘팔자’로 여겨졌다. 결혼 후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여자가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면, 그녀를 따라 다니는 것은 한숨과 좌절 그리고 비애뿐이었다. 여자는 자식에 대한 관계라는 점에서만 가정의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아들을 못 낳으면 그녀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느니만 못할 정도였다. 남편은 물론 일족(一族)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비난으로 인해 그녀의 무너진 영혼은 아무런 희망도 기대할 수 없었다.

축첩제도 또한 조상숭배의 풍습에서 용인되었다. 이 제도 또한 자손의 보존이나 증식을 위한 하나의 생산 수단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첩으로 데려와 함께 가사를 돌보게 할지라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에 복종하고 그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관습상 정실부인의 권위는 확고히 보장받았다. 하지만 남자들은 결혼은 아내와 했지만 사랑은 소실과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가정에서는 여인들 사이에 심각한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실부인은 소실에 대한 질투를 안으로 삭여야 했으며, 그 엄정한 법도 아래서 참고 살아야 했다.


딸은 아버지와 식사도 함께 할 수 없었다

내한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남아선호에 따른 여야의 학대였다. 여성의 지위는 애당초 딸이라는 데서부터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여야들은 어려서부터“아들은 축복이고 딸은 저주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야 했다. 여아의 이름은 대체로 비속하게 지어졌으며, 노골적으로 그녀를‘섭섭이’라고 부름으로써 평생토록 그 가슴에 멍울을 남겼다. 여아에게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했으며, 8촌 이내의 남자가 아니면 함께 말도 나눌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격리된 삶을 살았다. 남감리교 여선교사로 내한했던 와그너(E. C. Wagner)는 초경도 치르기 전에 딸을 시집보내는 나라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한국 밖에 없을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녀가 저술한 <김서방과 다른 한국의 이야기들> (Kim Su Bang and Other Stories of Korea), <복점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이야기> (Pokjumie: A Story from the Land of Morning Calm), <금옥이: 옛 한국의 신부> (Kumokie: A Bride of Old Korea)와 같은 신앙간증 형식의 소설은 당시 여아차별의 풍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선의 딸들은 시집갈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하며 인간적인 대화를 할 기회가 없었다. 이러한 차별은 특히 양갓집에서 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은 방,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던 하층민의 삶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여겨졌다. 잘사는 양반 가문에서는 딸이 아버지의 밥상머리에 앉지는 못하지만 내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나마 덜 비참했다. 하지만 생활은 어렵고 양반의 지체는 있어서 겸상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독상 받을 형편도 못되는 중류층에서는 남자가 물린 상을 여자들이 받아먹어야 하는 소위 ‘전(餕)의 풍습’은 내한 외국인들의 눈에 역사상 가장 비열한 성차별로 보였다. 여야에 대한 차별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격적인 대우는 고사하고 심지어 그들은 교환적 가치물로 여겨져 매매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처럼 한말 및 개화기 여성들의 삶은 한마디로 어둠에 갇힌 삶의 형국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삶에 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십자가의 능력은 남녀차별에 기반한 낡은 구습과 병폐를 점차 무너뜨려 나갔다. 이에 대한 저항 또한 강력했으나 기독교 복음을 통해 거듭난 예수의 여인들은 ‘힘겨루기’가 아닌 ‘사랑의 눈물’로 그 완고한 장애물들을 녹여갔다. 그 결과 억압과 다툼으로 만연하던 곳곳에 사랑과 이해가 싹트는 풍토를 조성해 나갈 수 있었다.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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