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사 처남 정세국 씨 인터뷰 “김목사, 선교역사에 큰 획 그었다”
김동식 목사가 납북된 지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껏 생사확인 조차 되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가족들은 모이기만 하면 기도 드린다고 한다.그러나 납북사건들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은 차갑기만 하다.
본기자는 납북 김동식 목사의 처남 정세국 씨를 만나 김동식 목사의 선교사역에 관해 들어보았다.
인천녹색소비자연대 대표로 있는 정세국 씨는 김동식 목사의 처남으로, 김동식 목사가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부터 지금까지 다방면으로김 목사를 도왔던 사람이다.
김동식 목사가 중국에 가게 된 경위
김동식 목사님은 고신교단 출신이지만 교단차원의 선교사는 아니셨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한 교단에 소속되면 선교의 범위가 제약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교단에서 벗어나서 선교활동을 하셨다.
김 목사님은 89년도 장애인올림픽때 중국대표팀의 가이드를 맡았다. 많은 도움을 주고 받으며 그 때 당시 중국대표팀을 이끌었던 등소평의 아들과 인연이 되어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은 중국의 각 성을 돌아다니며 장애인 연합회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꾸준히 하게 됐다.
![]() | ![]() |
김동식 목사의 활동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러일을 돌보고 있는 처남 정세국씨..."가족들은 모이기만 하면 기도드린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송경호 기자 | |
이를 알게 된 중국정부는 천진지역의 30만평에 달하는 땅을 김 목사님에게 내어줬고, 김 목사님의 활동을 지원했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 고위급들과 접촉이 이뤄졌던 것으로 알고 있고, 이 때 김동식 목사님은 북한 고위층만 만나고 있었다.
김동식 목사와 북한선교
1996년도 애틀란타 올림픽 개최시 북한의 참가가 확정됐었다. 북한선수들이 머물 장소는 확보되었으나 동반하는 북한임원들이 머물 장소가 없어 그때 김 목사님께 사정을 요청해 왔었다.
우리나라 안기부와 연락하고, 올림픽 장소에 있는 한인교회 목사님의 사택을 빌릴 수 있게 됐다. 북한임원단들은 그곳에서 30여일을 머물렀고 김동식 목사님과 사모님이 직접 식사를 준비해서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줬다.
북한선수단은 자신들이 교회사택에 머문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숙소 등을 공개하기를 거부했고 철저히 통제했다. 30여일 동안 그 사택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김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아들인 천국이, 이들 세사람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북한임원들과 신임을 쌓아갔다.
김동식 목사님은 예배를 드리거나 그들에게 직접 말씀을 전하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매번 식사 때 마다 기도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처음에는 어색해 했던 그들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 점점 평화와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게 됐다고 한다.
김 목사님은 젊었을 때 잠깐 유도를 했던 경력이다. 북한선수들을 가까이 지켜보며 계순희 선수의 가능성을 알아봤다고 한다. 그래서 계순희 선수가 시합을 나갈 때마다 기도해주고 격려해 줬는데, 기도해주는 시합마다 다 이겨 결승까지 진출하게 됐다. 결승을 앞두고 먼저 계순희 선수가 기도해 달라고 찾아왔고 마침내 금메달을 따게 됐다. 더욱이 메달을 수여받고는 누구도 아닌 목사님께로 먼저 달려와 메달을 걸어주고 사진을 찍었다.
이런 과정에서 김동식 목사는 북한 고위층들과 관계가 깊어지게 됐고, 어떤 북한 인사는 자신의 자녀들을 해외유학을 보내게 되면 꼭 기독교인을 만들겠다고 고백했다 한다.
북한 고위층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김 목사님 관련된 활동과 이런 고백들은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남북 선교역사에 있어 또 다른 하나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다.
![]() | ![]() |
▲정세국씨 ⓒ 송경호 기자 | |
올림픽이 끝나고 김 목사님은 평양을 몇 번 방문하게 됐고 그러면서 북한주민들과 접촉해 이야기도 나누고 물품도 지원해 주고 했었다.
탈북자들이 서서히 늘어나면서 그와 함께 목사님을 알고 찾아오는 탈북자들이 많아졌다. 천진농장으로 많은 탈북자들이 찾아오게 되자 중국 공안들의 감시가 심해지게 됐다.
이렇게 김 목사님은 북한 고위층과도 관계를 맺으면서, 동시에 탈북자들을 돕는 등 말하자면 양면생활을 해 오셨다.
중국에 단동과 연길에 미션하우스가 있었다. 북한 고위층들이 쉬는 장소가 단동에 있었는데 매일 아침 차를 타고 신의주에 가서 꽃제비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일도 했었다.
그러자 신의주 시장이 우리한테 '복지건물을 세워줄테니 조선인민을 위해 운영해 달라'는 부탁도 들어왔었다.
이렇듯 김 목사님은 '앞문'과 '뒷문' 선교를 모두 하셨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피랍 직후 '앞문' 선교 하시며 만났던 고위층이 연결됐으면 아직 생존해 계실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탈북자들을 돕는 활동 자금은 많이 부족했으며 가족들은 물론 여러 후원인들을 모아 자금을 마련하곤 했다. 이 관리를 내가 했는데 김 목사님도 한국에 여러 교회에 다니며 간증을 하고 후원금을 모으셨다.
김동식 목사님은 평소에 책도 읽으시며 과묵하신 편이다. 그러나 남북평화 통일에 디딤돌이 되기 위해, 기독교가 먼저 나서서 일을 하기 위해, 그 모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셨다.
현재 김동식 목사 가족들
미국에 계신 누님(정영화 사모)은 목사님 피랍 후 우울증에 시달리다 유방암 수술까지 받게 되셨다. 특히 작년에 우울증이 심했었는데 자살시도까지 하셨다.
우울증은 약물치료만 꾸준히 해도 호전되는데, 차마 북한에 있는 김 목사님 생각에 약을 전혀 먹지 않아 조카가 많이 고생했다. 조카는 지금 다른 목사님 댁에서 홈스테이 중이다. 아버지의 일을 다 알고 있는 조카는 선교사가 비전이라고 얘기한다.
누님은 'CAMM' 이라는 미국의 한국 기독교인들 기도모임의 도움으로 요양원으로 들어가 지금은 조용하게 요양중이시다.
현재는 목사님이 해왔던 여러가지 일들을 뒷수습 하고 있다. 목사님이 해 왔던 일들을 글로 정리할 생각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 | ![]() |
▲정세국씨는 "김동식 목사님이 하셨던 활동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경호 기자 | |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김동식 목사님 사건이 정치적 쟁점의 도구가 되지 않길 바라고 이제는 한국교회가 개교회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북한문제나 평화통일 문제에 나섰으면 한다. 그리고 김 목사님 일이 공동의 기도제목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동식 목사님 송환문제를 떠나서 이제는 통일에 대한 열망과 남북화해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많이 본 뉴스
123 신앙과 삶

‘목사, 스파이, 암살자’ 본회퍼의 히틀러 암살 가담, 성경적으로 문제 없나?
이번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4월 9일 개봉한 영화 를 다룹니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 및 감독 토드 코라르니키(Todd Komarnicki), 등장인물은 디트리히 본회퍼 역 요나스 다슬러(Jon…
CT YouTube
더보기에디터 추천기사
이 기사는 논쟁중

中 사실상 선교 전면금지… 주중 한국대사관, 주의 당부
중국 정부가 오는 5월 1일부터 외국인의 종교 활동을 전방위적으로 규제하는 새로운 시행세칙을 시행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금지 항목에 ‘중국 국민을 신도로 만들거나 성직자로 임명하는…
인물 이 사람
![]() | ![]() |
▲김동식 목사가 했던 일들을 정리하고 있는 정세국씨...북한을 지원했던 활동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했다 ⓒ 송경호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