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질문입니다. 325년 이전 범종교회의가 있기 전까지 지역 감독들의 모임, 즉 종교회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synod가 있었는데 감독들이 세상을 떠나면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거나 교회적 문제가 일어났을 때 해결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약 190년 부활절 일자를 정하는 일에 있어 종교회의가 있었고, 약 250년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은 정기적으로 감독들의 종교회의를 가졌습니다. 갖가지 종교회의를 통해 정통 신앙들을 점검하게 되었죠. 그런데 ‘범종교회의’는 범지역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황제가 소집했습니다. 수적으로도 가히 지역종교회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습니다.”
“그럼 교수님, 지금까지 몇 차례의 ‘범종교회의’가 있었는지요?” 민상석씨가 계속하여 질문했다.
“민상석씨! 매우 중요한 질문들을 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살펴보게 될 1~4차 범종교회의들, 즉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그리고 칼케돈 회의들까지를 프로테스탄트들은 범종교회의로 인정합니다. 1~7차 범종교회의를 동방정교회에서는 인정하는 것에 반해 로마 가톨릭은 1~21차 범종교회의를 억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수님! 왜 그렇게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지요?”
“예~, 민선생님이 쉴 틈을 주지 않는군요? 4차 범종교회의가 451년에 있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로마 가톨릭주의가 일어나면서 정통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주의’가 일어났다는 말이죠. 그리고 동방정교회의에서는 5~7차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모인 장소가 대체적으로 동방지역이기 때문입니다. 8차부터 지역은 서방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죠. 여기에다가 자신들이 7차까지 만을 범종교회의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Orthodoxy’(정교회)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8차부터는 서방교회에서만 범종교회의를 인정하고 있죠.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궁금증이 풀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그럼 니케아 범종교회의에 관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니케아 회의에서의 공식적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318명 정도의 감독들이 동방교회를 어지럽혔던 현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회집했던 것입니다. 225명은 동방교회에서, 4명은 서방교회에서, 그리고 그 외에는 소속이 불명확한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당연히 1차적 문제는 아리안주의였고, 2차적 문제는 분파에 관한 현안이었습니다. 키프리안을 다루면서 등장했던 노바티안 분파자들과 도나투스파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올바른 교회임을 주장했던 것을 기억하시겠죠?”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순전한 피조물이었고, 무에서 창조되었고, 타락할 가능성을 언제든 지닌 사람이었고, 양자된 하나님의 아들이지 본성상으로 하나님이 아니시고, 그리고 이름으로만 하나님으로 불렸다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설교에서, 저서에서, 그리고 서신들을 통해 널리 알리면서 추종자들을 만들어 갔습니다. 아리우스 보다 앞서는 교부들의 가르침과 그의 주장과 비교해보면서 아리우스의 주장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삼위일체’(Trinity)에 관한 교부들의 가르침은 세례의 형태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명령으로서 자신의 제자들이 되려면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신앙을 고백할 때 위의 이름들로 세례를 베풀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셨습니다. 이러한 ‘성삼위일체’의 세 이름에 관한 교리는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 진리이며 중요한 진리였습니다. 이것은 사도신경에 잘 나타나 있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Sumela 수도원에 그려져 있는 니케아 범종교회의 그림
“아리안주의가 있기 전에 기독교계에서 쓰인 2~3세기의 작품들을 보면, ‘성삼위일체’에 관한 가르침과 고백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비교해볼 때 아리안 가정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죠. 약 323년 아리안 위기가 일어났을 때 삼위일체론에 반대하여 아리안을 따르는 자들과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교회 지도자들 간의 갈등은 거의 5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사에서 최초로 정부, 즉 로마제국이 교회 문제, 즉 신앙 논쟁에 간섭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혁신자들의 편에 서서 전통적 진리를 변호하는 자들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범종교회의에 대한 불행한 사실은 그 범종교회의에 대한 자세한 회의록을 우리가 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지식은 대체적으로 당파적인 저자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당시 종교회의에는 두 명의 저자가 참석하였는데 회의를 소집한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틴 찬미자이고 이단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자인 가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였고, 다른 한 사람은 회의록이 쓰였다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기 범종교회의의 기록들은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그릇된 견해를 아리우스는 서신들을 써서 유포하며 추종자들을 모았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든 인물들 중 루키안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로마제국이 ‘4두 정치’아래 있을 때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루키니우스의 배우자며 콘스탄틴 대제의 누이였던 황후 콘스탄티아,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매우 가까운 친분을 가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d. 342)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매우 정치적이죠. 아리우스는 정말 정치적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인물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입니다. 무슨 혜택이라도 볼까 해서 말입니다. 제가 너무 직설적인지는 몰라도 실제 그렇습니다. 여기의 유세비우스는 후에 339~342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이 됩니다.”
“점점 교회적 문제가 의견 불일치로 치닫는 것을 간파한 콘스탄틴 대제는 호시우스를 급파하여 사건 진상을 파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호시우스는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시리아 등지에서 모인 56명의 감독들의 견해를 듣게 되었는데 모인 감독들은 만장일치로 아리안 견해를 정죄하고 출교를 명했습니다. 이제 325년 봄이 되었습니다. 지역 종교회의를 개최해서 교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콘스탄틴 대제는 5월 20일 니케아에 있는 황제의 여름 궁정에서 범종교회의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318명의 감독들이 로마제국 여기저기에서 참여했습니다. 대부분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감독들로서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소아시아, 페르시아, 다뉴브강과 에게해 지역, 그리고 그리스에서도 참여했습니다. 더욱이 아프리카, 스페인, 고올, 그리고 이태리에서 각각 한 명의 감독이 참여했습니다.”
공로상 7인과 조현삼 목사 수여
앨범·워십·CCM 부문별 시상도
2년간 발표된 2,396곡에서 엄선
한국기독음악협회(회장 안민·송정미, 이하 K-CCM)에서 주관한 ‘2024 K-CCM 어워즈(AWARDS)’가 처음으로 지난 11월 25일 서울 용산구 삼일교회(담임 송태근 목사)에서 개최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