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대 라은성 교수의 재미있게 배우는 교회사학교 47
6.2.2. 에베소 범종교회의
6.2.2.2. 정치적 배경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지도력을 가진 교회가 5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로마였습니다. 이곳에 있는 감독들은 대주교라 불렸죠. 그 수하에 여러 대감독들과 감독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막강한 지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클레멘트, 오리겐, 아리우스, 알렉산더, 아타나시우스 등 무수한 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지요.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래는 100여명의 감독들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했습니다. 감독들만 아니라 수도사들도 알렉산드리아 감독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그는 부귀명예와 권력을 소유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세력을 얻기 전까지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막강한 힘을 소유했습니다. 이러한 권위는 아타나시우스로부터 주어지기 시작했지만 데오필루스는 그에게 미칠 만한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3차 범종교회의는 어떻게 보면 알렉산드리아 감독과 콘스탄티노플 감독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된 존 크리소스톰은 수 년 동안 자신의 교구를 책임성 있게 목회하는 자였습니다. 열정을 가졌기에 많은 친구들을 가진 만큼 적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과의 첫번째 충돌은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루스의 가혹한 통치에 희생을 당한 사람들을 존이 환영했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물론 감정적 대립이었습니다. 존에게 도피한 자들 가운데 이단혐의가 있는 자들이 있다고 하며 데오필루스는 29명의 감독들과 함께 존을 정죄하고 파직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존은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벗어나 있는 곳의 교구까지 권력을 나타내려는 것은 다른 교구의 일을 간섭하는 것이라 하여 데오필루스가 주도하는 ‘오크 종교회의’(Synod of the Oak)를 거부하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존을 정죄하고 파직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존은 제국 먼 곳으로 추방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방 생활에 지친 존은 407년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데오필루스는 존에 반대한 운동이 승리를 거두자 환희에 넘쳤습니다. 하지만 미처 그는 잠재하고 있는 내분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존에 대한 처사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 자는 서방교회에 있는 로마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데오필루스에 반대하여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 존을 인준하였습다. 게다가 존을 대신하여 아티쿠스를 인준할 것을 요청했을 때 로마감독 켈레스틴(Celestine I, 422~431)은 그를 인정했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의 관계를 끊을지라도 인준하지 않았습니다. 데오필루스가 412년 죽자 그의 조카 시릴이 감독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시릴은 데오필스와는 다른 입장을 가진 자로서 오랫동안 추방생활을 한 자였습니다. 또 존을 추방시켰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범죄를 용서해달라는 의미에서 그의 시신을 콘스탄티노플로 운송하면서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그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더욱이 424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아티쿠스가 세상을 떠나자 네스토리우스가 428년 후계자로 임명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