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대 라은성 교수의 재미있게 배우는 교회사학교 50
6.1.1.1. 요약
“381년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로 인해 삼위일체 논쟁은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질문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간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이슈는 수년 간 논의되어 마침내 451년 칼케돈 범종교회의에서 마무리 됩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동일본질’, 즉 호모오우시오스(homoousios)라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여전히 인간이십니다. 사람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그분은 성육신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멸하고, 완전하고, 전능하셔야 하는데 그분이 인간이 되시거나 완전한 인간이 되시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혼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성 또는 인성을 강조하는 견해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인성을 무시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알렉산드리아 학파’ 흔히 ‘알렉산드리아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분의 인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신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신성과 인성 간의 구별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안디옥 학파’ 또는 ‘안디옥인들’이라 부릅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께서 니케아 신조에 따라서 완전한 신성을 지니셨을 뿐만 아니라 그 신성이 무한하시고 인성도 그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신성 간에 구별을 짓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문제에는 신학적 논쟁과 아울러 정치적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순수한 신학적 논쟁이 있으면 건전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정치적으로 확산시켜 신학적 논쟁에서 승리하려고 하면 문제가 늘 일어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3차 범종교회의에서 일어납니다.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감독들 간에 알력이 있었습니다.”
“381년에 이르러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동방교회에서 큰 권력과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었지만 그의 지상권은 콘스탄티노플 감독의 권위로 인해 위축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많은 학자들이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신학논쟁에 임했습니다. 특별히 민족주의를 내세우거나 아니면 성장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정부의 간섭이 싫어서 논쟁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상황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청빙건이 있게 되면 후보 목사님이 누구든지, 아니면 장로나 안수집사 투표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당사자에 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반대하는 자들이 반대하기 때문에 괜히 반대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래서 청빙건이나 투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죠.”
“431년 3차 범종교회의는 네스토리안 논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네스토리우스는 428년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의 신학을 지니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 또는 ‘하나님의 모친’이라는 ‘데오토코스’라는 용어 사용을 반대하는 자였습니다. 이처럼 네스토리우스도 그 용어 사용을 싫어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어떤 시작이 있었거나 고통이나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ㆍ인 대신에 그는 로고스와 가정된 인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의 역할을 단순히 ‘그리스도를 낳은 자’ 또는 ‘크리토토코스’라고 하거나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지니신 것처럼 마리아도 ‘하나님을 낳은 자’와 ‘사람을 낳은 자’라는 말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중인격을 가르친다고 하여 그는 고소를 당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본성과 두 인격을 가르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고소를 네스토리우스는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만 네스토리안주의라는 말은 두 본성과 두 인격을 주장하는 것으로 지금도 인식되고 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학파로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구별을 강조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측면의 모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2)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강력한 혐의는 그가 ‘두 아들’을 가르친다는 것과 볼 수 없는 분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3) 이런 혐의를 그가 부인했지만 네스토리안주의는 위의 사상을 항상 가르칩니다.
“여기에 정치적 영향력이 가미됩니다. 당시 로마제국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408~450)는 431년 에베소 범종교회의를 개최합니다. 그 종교회의 진행을 간략히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시릴은 문제를 신학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수도사들과 정치인들도 관여하도록 했습니다.
2) 시릴은 자신의 교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동방교회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동방교회인들은 분개하여 반역회의를 개최하여 시릴을 정죄했습니다.
3) 감독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4) 네스토리우스는 결국 파직되고 추방당했습니다.
5) 네스토리안들은 핍박을 받아 페르시아로 도주했습니다. 동방교회는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6) 결국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승리라 볼 수 있습니다.
7)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를 후원했지만 쉽게 관철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정리가 되는지 궁금합니다. 복잡하게 설명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를 우리가 반복하고 있음을 배우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