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대 라은성 교수의 재미있게 배우는 교회사학교 51
1.1. 기독론
1.1.1. 칼케돈 범종교회의
1.1.1.1. 유티케스
“유티케스(약 378~454)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사로서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께서 오직 한 본성만 지니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이단성 있는 견해를 가리켜 ‘유티키안주의’(Eutychianism)라 부릅니다. 유티케스는 신ㆍ인성이 혼합되어서 구별할 수 없다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인성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신성화되었다고 가정했습니다. 이런 견해로 인해 유티케스는 448년 콘스탄티노플의 지역 종교회의에서 정죄 받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에 이어 감독직에 오른 디오스쿠루스는 유티케스의 정죄를 철회하기 원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동방교회의 지도력을 과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디오스쿠루스의 기독론 역시 아폴리나리스처럼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을 강조하였기에 유티케스를 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티케스가 콘스탄티노플 감독 플라비안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자 디오스쿠루스는 로마교회가 이 정죄를 전복시키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늘 뜻을 같이하여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마교회가 알렉산드리아에 등을 지고 콘스탄티노플과 뜻을 같이 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교회 역시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플 교회와 함께 그 영향력을 높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디오스쿠루스는 449년 에베소 종교회의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종교회의는 플라비안 견해를 정죄하고 유티케스를 정통으로 선포했습니다. 며칠 후 플라비안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회의에서 받았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폭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감독 레오 1세는 플라비안을 지지하고 양성론적 기독론을 지지하는 서신을 그 종교회의에 보냈지만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오 1세는 그 종교회의를 ‘강도회의’(robber’s synod)라고 명했습니다.”
“교수님! 유티케스와 디오스쿠루스라는 사람은 어떤 분인가요? 이 두 사람이 4차 범종교회의 주요 인물이 아닌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즉 로마감독 레오 1세도 주요 인물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 차례대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티케스(약 378~454)는 콘스탄티노플 장로며 수도원장이었습니다. 3차 범종교회의에서 시릴을 후원했던 자였죠. 그렇다면 당연히 네스토리안들을 반대한 자이기도 하죠. 그들에 반대하여 유티케스는 신ㆍ인성의 연합 후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본성만 있게 되었다고 확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성육신하신 말씀만 있다는 것이죠. 그분의 인간 육체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 육체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시릴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견해를 벗어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거나 변질되었다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448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플라비안이 주제하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만족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그를 파직시키고 출교시켰습니다. 다음 해 449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디오스쿠루스가 이끄는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유티케스를 복직시키고 448년 종교회의를 주재했던 플라비안을 도리어 파직시켰습니다. 그리고 한 본성이라는 교리를 알렉산드리아 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결정은 로마 감독 레오 1세를 분노시켰습니다. 그는 켈레스틴을 이어 로마 감독이 된 자인데 플라비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자로서 두 본성과 한 인격을 주장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로마제국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가 죽고 그의 누나 풀체리아가 다시 남편 마르키안과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면서 단성론을 반대하는 종교회의, 즉 451년 칼케돈 범종교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449년에 개최된 에베소 종교회의를 ‘강도회의’라 칭하면서 그곳에서의 모든 결정을 무효화시켰습니다. 그에 따라 유티케스는 추방당해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를 평소에 지지하던 황후 유독시아의 후원 아래 그의 사상은 시리아로 퍼져나갔습니다. 6세기에 이르러 그를 따르는 자를 유티키안들 또는 단성론자들이라 부르고 그들이 세운 교회를 ‘야코바이트 교회’라 부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