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인식했던 기독 작가들
미술사가들이 미술의 기원을 원시인의 동굴벽화에서 찾듯 문학사가들은 인간의 모방충동이나 쾌락본능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개념이 없는 곳에서는 문학적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 활동이라 해서 그것 자체가 문학은 아니다. 그것을 문학으로 인지하는 것은 오늘날의 문학적 관점이지 고대의 문학적 관점이 아닌 때문이다.우리는 고대의 사가(saga)나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민담(folktale), 오늘날의 익살까지도 구전문학 작품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서사 장르들인 무대극과 오페라·영화·라디오극, 발레나 무언극과 같은 비언어적 이야기로 전달하는 예술까지를 포괄하여 문학을 논하기도 한다. 성서가 한국 현대문학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문학으로서의 성서’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그에 따라 그동안 문학의 변방에서 홀대받던 기독문학이 문학의 관심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기독교의 전래로 인한 한국 근현대문학의 발달과정에서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된다.
초기 한국의 기독문학은 개화 계몽의 서사적 형상화로 그 존재를 나타냈다. 그 중 몇 작품을 살펴보자. 190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백악춘사의 <다정다한(1906)>은 고위직 관리가 신학문을 익히고 관리가 된 후, 독립협회가 벌인 만민공동회를 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다 강등, 면직되고 소학교를 세우려다 투옥되는데 그는 옥중고초를 겪으면서 기독교에 귀의 한다. <다정다한>은 부패한 관료를 구원하고자한 시대정신의 발로이자 기독교적 박애주의 사상의 실천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승휴의 <쟁도불공설(1907)>은 유교와 기독교가 서로의 우월성을 논증하는 내용으로 결국 유교인이 기독교를 택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같은 해의 반아라는 필명의 작가가 쓴 <몽조(1907)>는 유학해 신학문을 배운 주인공 한대흥이 개화 운동을 하다 옥중에서 살해되자 그의 부인 정씨가 기독교에 귀의해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몽조>는 개화기 사상의 근원을 서구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서구문명의 바탕이 기독교임을 보여준 작품으로서 기독교사상을 순수한 교리적 입장에서 다룬 작품이다.
목사이며 작품을 쓴 최병헌의 <성산명경(1907)>은 주인공 신천옹이 유교와 불교를 비롯한 민간 신앙차원의 종교를 두루 거친 후 기독교로 귀의할 뿐 아니라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 종교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그들을 전도하는 내용이다. 질문과 담론, 그리고 해답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논리적으로 기독교를 증명하는 한편, 성령의 역사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투사함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올바르게 표현하려고 시도한 작품이다.
이해조가 ‘동농’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고목화(1907)>는 기독교인 의사인 조 박사의 희생적인 헌신을 다루고 있다.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 까지도 예수의 사랑으로 받아들인 조 박사에게 권 진사도 감동되고 악인이 감화돼 회개하고 기독교에 귀의한다. 두 사람과 두 계층의 화해를 통한 민족적 화합을 기독교 정신으로 모색하고 있다.
안국선의 <금수회의록(1908)>은 꿈에서 인류를 논박하는 동물들의 연설회장에 들어간 일인칭 관찰자인 주인공의 보고서다.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 의식을 동물들의 입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한 풍자소설이다. 윤리적 타락으로 인한 가정과 사회의 붕괴를 기독교의 교리로 회복하고자 시도한 작품인 동시에 기독인들을 비판하는 한편 그 사명을 주장한 작품이다.
동일한 집단 안에서도 시대에 따라 문학에 관한 현대적 관념들이 서로 다양하게 상충하고 있는 현상을 생각할 때 문학 이론들은 국경을 초월한 지평선에 관한 의식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개화기 시대 우리의 기독문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사명을 인식했을 뿐 아니라 기독 작가라 불리운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송영옥 박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