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수필 ‘미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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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필명, 美枝와 未枝

“‘美枝’는 글자그대로 아름다운 나뭇가지이다. 나뭇가지의 아름다움은 우선 나무 자체가 충실해야 되고 잎도 무성하며 향내와 예쁜 꽃을 피우고는 알찬 열매도 맺어야 한다. 삼·사박자를 다 갖춘 나무를 대하기는 쉽지 않지만 찾아 헤매노라면 천신만고 끝에 맞이하는 행운도 가질 수 있다.

범부의 눈에는 쉽게 띄지 않는 천애의 벼랑에 도도한 기품으로 서 있는 이 나무는 향일성이어서 그런지 모양새가 곧을 뿐 아니라 강열한 내음은 단연 군계일학이다. 이 美枝를 대하며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그 발랄한 기는 약동하는 힘을 샘솟게 한다. 미지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있다.”

이 글은 문단의 대선배 한분이 나의 필명과 함께 주신 글이다. 내가 처음 문단에 선을 보였을 때였으니 매우 오래 전 일로서 호 내지 필명을 사용하고 있는 기성 문인들이 근사하게 보이던 철없는 시절의 일이기도 하다. 그 날 선배님과 앉아있었던 한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는 오렌지 훌라워라는 출처모를 칵테일이 놓여있었고 그 향기 속에서 촛불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까페의 작은 무대에서는 낫킹콜의 목소리를 닮은 한 남자가 고엽(The Autumn Leaves)을 불렀으니 영락없는 가을의 날이었다.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숲속에서 나뭇잎들이 바람소리를 냈다. 그곳에서도 누군가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을 부르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 때문에 선배가 준 이름 “아름다운 나뭇가지”는 상대적으로 환한 봄날의 아침처럼 눈부신 이미지를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선배의 눈을 바라보면서 릴케의 시를 떠 올렸다.

“쌓인 숨결에 수건을 대듯/ 아니 생명이 단숨에 쏟아져 나가는/ 상처를 수건으로 누르듯/ 나는 너를 내게로 끌어당긴다” 이 시는 릴케가 <두이노의 비가>를 쓸 당시 루 살로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의 밀도가 어떠했는지를 표현한 시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매우 좋아하는 교수 한 분이 美枝를 未枝로 바꾸어주셨다. 아름다울 미(美)자 대신에 아니 미(未) 자 未枝를 주셨던 것은 “미지의 세계(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나의 지나친 열정에 대한 기우 때문이셨다. 그 당시 나는 어쩌다가 75개국이 가입하고 있는 국제와이즈멘(Y's Man International)에서 책임을 맡고 일을 하던 때였는데 회의 참석차 나가면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인근 나라들을 겁 없이 돌아다녔다. 교수님께서는 이런 나의 지나친 열정을 칭찬 반 염려 반으로 맘을 쓰고 계셨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한번은 러시아 여행길에서의 일이다. 레닌그라드 광장 인근의 언덕에서 숨차하며 뛰어 내려오는데 점치는 한 노파가 나를 붙잡고 돋보기 같은 것으로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쯧쯧… 방랑끼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역마살이 끼어서 도저히 한곳에 못 붙어있어.” 그러하니 교수님의 혜안이 여행에 대한 내 열정을 염려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를 ‘美枝’라 불러주었던 그 선배는 여러 해 전 4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늘 이때 쯤이면 선배님과의 일이 매우 마음이 아프고 내 잘못에 대한 후회가 크다. 그분이 세상을 떠나시기 여려해 동안 나는 이런저런 일들에 쌓여서 뵙지 못한지 오래였다. 그 무심했던 시간동안 나는 여전히 미지의 땅을 열심히 밟고 다녔다. 공교롭게도 선배님의 부음을 들었을 때는 러시아 여행에서 막 돌아온 직후였고… 그 충격과 후회스러움으로 몇날 며칠을 앓았다. 늘 내 곁에서 바라보아줄 줄 알았던 사람, 아무 때고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음 놓았던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리다니… 해마다 4월, 선배의 무덤가에는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벌들이 윙윙댄다. 그런 날은 정말 그분이 보고 싶다.

그 일이 있은 후 이따금 사람과의 만남에서 오늘 미뤘다가 내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날 때는 열일을 제쳐놓고라도 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엊그저께는 오랜만에 美枝를 未枝로 바꾸어 주셨던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세월을 거꾸로 사시는지 교수님은 여전히 힘이 넘치고 여전히 쿨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시고 “未枝구나. 여전히 美枝야’ 라고 유쾌해 하셨다. 동일한 발음을 구분해서 부르신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교수님의 서제의 창으로 봄날의 햇살이 부러운 듯 기웃거렸다. 정원에서는 여린 나뭇가지들이 한 줌 바람에도 흔들리며 한 뼘 햇살에도 윤기를 흘리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나뭇가지들은 올해도 충만한 생명감으로 설레며 자랄 것이다. 자연의 섭리만이 생명의 리듬을 완성한다. 그러하니 결국 나의 일생이란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 동경의 율동감에 나는 너무나 행복하였다.

-송영옥 박사는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클럽 정회원이다. 창작집으로는 <미운 남자>, <하늘 숲>, <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閃 囚구를 떠돌고 쏀덛>,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와 영한시집 , 그리고 문학이론서 <기독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International Director for Y'Menettes)을 두 차례 역임했고, 신문·잡지의 연재계약으로 전 세계 60여 나라를 여행, 문화 예술 기행을 했다. 현재 대신대에서 기독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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