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의 추억들을 거두어들인다…
(나는 추억의 빛깔이 찬연한 문간에 또다시 멈추어 선다. 왜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빗장을 치지 못하는가. 우리는 행복하였고 나는 만족하며 최선을 다했노라고 당당하게 돌아설 수 없는 것일까.)
해는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산봉우리는 희미하다. 내 마음의 동산에는 아직도 빛이 환하고 아침이슬도 몇 방울 풀섶에 남아 있다.
그러나 어둠이 내리려 하니 우리는 서로 나뉘어져 돌아가야 한다. 얘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치지도 피곤치도 않다. 그래도 날이 저물었다. 우리의 연장들- 서로 바라보는 것, 듣는 것, 서로의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느끼는 것, 지성, 미래에 대한 신념-을 챙긴다. 어둠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도 솟아오른다. 아직 산허리에는 여명이 남아 있는데 언덕에는 이미 우수가 어린다. 고즈넉하게.
그 빛 속에 잠시 머물러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누구에게 이 일을 고해야 하나. 오감이 맛본 그 신비한 일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내 마음 속 깊이 남겨진 흔적, 얼마나 흡수력이 강하였던가. 그의 냄새와의 첫 접촉은 두려움과 갈망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이로운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하늘은 끝없이 높고 따스한 태양, 나는 대지의 향기에 취하여 광채들 사이를 날아다녔다.
눈물로 가득 고이는 생각들, 내 의식의 밑바닥에 항상 깔려 있던 외로움과 고뇌와 처절한 갈등을 또 누구에게 털어놓아야 하는가. 미래와 신념을, 우리 불타던 날들을 누구에게 보여야 하는가. 하늘과 땅에, 저 산과 바다에, 지는 해를 받쳐든 황혼에게 아니면 풀과 기어다니는 곤충에게. 아니야. 모두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들도 나와 함께 떠나가야 하거늘, 헛되고 헛된 것이다.
그의 손을 꼭 잡아 본다. 그의 눈은 아직도 깊고 감미롭고 정열이 가득하다. 나는 이 정열에서 기이한 힘을 얻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 날이 저물었고 시간이 다 되었으니 그 힘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신은 잔인하여서 오직 자신만이 영원을 소유하고 있다. 사랑은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을 그리워하며 스스로의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 정상을 향하여 기어오른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발을 빼면서도 쉬지 않고 올라간다. 사랑의 가치는 인간의 삶처럼 오직 그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지극히 적은 상대적 가치와 전우주적 의미를. 그리고 날이 저물면 스스로 피어나 땀과 눈물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눈을 들어 산과 골짜기와 들판을 바라본다. 어둠은 산 허리에서 아직도 머뭇거리며 서 있다. 내 속엔 빛이 남아 있다. 호수와 자작나무 숲에서 바람이 인다. 빛이 흔들리어 흩어진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피오르드해안, 빙하의 흔적에 올라 맞이한 태양 빛은 여전히 신비롭다. 푸른 야자수 사이로 붉게 타오르던 발리 섬의 해도 아직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그 속에는 문명의 십자로에서 맡았던 자연의 냄새가 있다. 태초의 순수한 냄새, 그의 냄새, 사원의 정취…. 이제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의 추억들을 거두어 들인다.
나는 추억의 빛깔이 찬연한 문간에 또다시 멈추어 선다. 왜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빗장을 치지 못하는가. 우리는 행복하였고 나는 만족하며 최선을 다했노라고 당당하게 돌아설 수 없는 것일까.
마음은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지른다. 안돼 안돼 떠나지 말아다오. 빛이여 잠시만 머물러 다오 어둠이여 잠시만 더 기다려 다오. 나는 들풀을 부둥켜 안고 애원한다.
그는 나에게 타이른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시간의 매를 맞으며 어둠에게 쫒겨가서는 아니된다. 눈물을 보이지 말라, 저무는 해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애원하지 말라. 승자처럼 당당한 얼굴로 돌아서야 한다.
모든 것이 멈추었다. 내 의식의 정지 상태에서 나는 떠나마 하고 외친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빛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사라졌다. 별들이 모두 하늘에서 떨어졌으리라. 황막하고 쓸쓸한 대지는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리라.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조용하고 느린 속도로 비가 뿌렸다. 타는 입술을 적시며 어둠 속을 걷는다. 나는 몸을 떤다. 오랜 방황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스쳐왔으나 잠깐뿐, 다시 몸을 떤다. 축축한 밤의 대기가 다정하게 내 손을 잡는다. 절망하는 나의 영혼을 위로하듯 어루만진다. 한없이 따스하고 감미롭던 그의 손길이다. 정열이 가득 찼던 그의 눈빛이다.
나는 젖을 빨려는 어린아이처럼 대지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
(노르웨이 송네피오르드 협곡을 지나면서)
-송영옥 박사는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클럽 정회원이다. 창작집으로는 <미운 남자>, <하늘 숲>, <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閃 囚구를 떠돌고 쏀덛>,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와 영한시집 , 그리고 문학이론서 <기독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International Director for Y'Menettes)을 두 차례 역임했고, 신문·잡지의 연재계약으로 전 세계 60여 나라를 여행, 문화 예술 기행을 했다. 현재 대신대에서 기독문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