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문학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오늘은 잠간 내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한다. 어느 주간지에 연재되고 있는 기독문학산책이란 주제의 내 글 ‘한 잔 포도주의 기억’에 한 독자가 다음과 같은 댓글을 붙였다.
“지금 이런 글이 진정 기독문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지막 문단은 정말 님의 기독문학에 대한 생각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지롱드의 강바람이 그리울 때면 와인샵에 들를 것이다’. 저도 한번 따라해 볼까요? ‘나는 앞으로도 한강의 강바람이 그리울 때면 포장마차엘 들를 것이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 다른 내 글에 ‘이 바보 지식인아…’로 시작되는 댓글을 받았다.
우선 내 글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께 진정 고마운 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독교와 문학예술 사이의 보이지 않는 높은 담을 느끼고 있다. 예술에서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격려와 칭찬으로 용기를 줄 때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된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교리적으로는 알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열린 의식으로 문학과 예술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인간에 대한 보다 따스한 맘으로 그의 일들을 이해한다면 삶의 은총을 더 깊이 호흡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기독교와 예술 사이엔 엄청난 괴리감이 있다. 그래서 반 데르 레우후는 예술전문가와 기독교인은 서로 어울리기가 정말로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미의 향유를 통해 축복받은 자신감을 누리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을 헌신한다. 그들에게는 예술의 실천이란 신앙, 문화, 과학과 같은 가치있는 노력 체계들과 동의어다. 그들은 미를 통하여 영광스럽게 된 세계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술이 종교적 신념을 위하여 봉사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작품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성서의 내용이 직접적 표현으로 나타나기를 구한다. 작품의 소재적 한계를 주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언어의 상징성과 행간을 통한 의미 전달과 색과 음향, 선과 형태사이의 형식적인 게임에서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아무리 기독교 예술이라 하더라도 후자를 무시하고는 예술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미를 통해서도 우리와 함께 대화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좀더 너그럽고 인간적인 기독교인들이 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는 종교와 예술의 길은 서로 교차할 뿐 아니라 서로 합해지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기독 문학과 기독교 예술이 함께 공유할 비전이 있다고 본다.
-송영옥 박사는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클럽 정회원이다. 창작집으로는 <미운 남자>, <하늘 숲>, <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閃 囚구를 떠돌고 쏀덛>,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와 영한시집 , 그리고 문학이론서 <기독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International Director for Y'Menettes)을 두 차례 역임했고, 신문·잡지의 연재계약으로 전 세계 60여 나라를 여행, 문화 예술 기행을 했다. 현재 대신대에서 기독문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