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사회 문제들 기독교적으로 이해시킬 역량 부족”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병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생명을 치료하는 것이죠.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차원이라고 봐요.”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달라’는 소송에 휘말린 세브란스병원 조재국 원목실장(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은 다른 차원의 ‘존엄성’을 이야기했다. 병원 내에서 윤리위에 자문하며 이번 사건과정을 지켜봐 왔던 조 교수는 “병원 공식 입장이 아닌 원목실장으로서의 입장”이라는 전제를 깔고 “소송 당사자들에게 또다른 상처를 줄까 염려된다”면서도 “‘생명’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므로 논의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원목실장으로서 이번 판결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저희 병원 설립목적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류를 질병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뜻에 따라 우리는 그 생명을 건강하게 보전할 수 있도록 치료할 뿐이다. 의사들은 환자의 생명이 살아있는 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치료를 다하는 게 기본이다. 특히 우리 병원은 설립 목적이나 이념으로 봤을 때도 생명을 유지하고 치료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두번째는 생명에 대한 문제를 의학적이나 과학적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사실 과거에는 숨쉬고 있다면 모두 살아있는 걸로 봤다. 하지만 뇌사라는 개념이 생겼고, 이를 죽은 것으로 보자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 뇌사판정위원회를 통한 판단을 용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사실 어렵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특히 뇌사가 아닐 경우는 무조건 치료를 해야 한다.
이런 뇌사판정도 가족들 요청이 있어야 가능하다. 아무리 뇌사라고 해도 가족들이 계속 치료해줄 것을 요청하면 중단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런 일(치료중단)을 의사가 결정하는 경우는 없다. 뇌사상태라 해도 가족들에게는 소중한 생명이다. 회복불능 상태에서 숨만 쉬고 있는 환자의 예를 들어보자. 만약 그 환자의 자녀가 외국에 있는데 ‘살아계신 부모님을 보고싶다’고 한다면, 식물인간 상태라 해도 그 분의 ‘존엄성’은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이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생명 유지의 이유가 충분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생명, 의학적·과학적으로만 풀 수 없어
세번째는 현재 환자의 상태다. 담당의사의 소견으로는 분명히 아직 뇌사상태가 아니었다. 뇌파가 아직 진동중이다. 눈을 자기 힘으로 깜빡거릴 수 있고, 꼬집으면 통증을 느끼는 정도다. 저는 몇 차례나 찾아가 봤지만, 실제로 금방 돌아가실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호흡 능력은 미약한 상태였다. 호흡기를 뗀다고 했을 때, 오랫동안 계실 거라는 말은 못하지만 금방 돌아가실 것 같지도 않았다. 외국에서는 이런 상태에서 살아나신 분도 계시기 때문에, 쉽고 간단하게 생각할 부분이 아니다.”
-‘생명’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걸려있다.
“지난해 NCCK 전 총무인 故 김동완 목사님이 태국 여행 중 쓰러지셔서 거의 뇌사상태로 병원에 오셨다. 의학적으로는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로 오셨다. 가족들이 결단하시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그 사이 많은 분들이 ‘살아있는’ 김 목사님을 찾아오셔서 함께 기도하고 살아계신 자체를 기뻐하셨다. 한 달 가량 뒤 김 목사님은 자연사하셨지만, 그 사이 목사님을 뵙고 간 분들은 김 목사님을 실제로 만났고, 그 의미는 매우 달랐다.
그러나 간병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일본 같은 경우는 병원에서 간병을 책임지기 때문에 논의 자체가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간병인을 두거나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간병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고, 비용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점차 생명의 존엄성 문제를 생명 자체만으로 보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번 판결문에도 의학적인 문제와 사회적 비용 문제가 함께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생명윤리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나 존엄성 문제, 종교적인 문제와 생명윤리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같은 법원에서(서울 서부지법) 넉달 전 가처분 때는 기각된 사건이 이번에는 받아들여졌는데.
“법원에서 서울아산병원이나 서울대병원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의학적인 차원에서 결정했다고 본다. 하지만 판결에서 두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추정적 의사표시만으로 호흡기 제거하기는 불가능
첫째로 환자 본인의 의사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평소 환자의 언행으로 미루어 짐작한 추정적 의사표시를 판결에 반영했는데, 생명을 다루는 문제를 추정적 의사표시로 다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환자가 명백하게 그러한 표시를 했다고 해도 이는 신중해야 한다. 병원 입장에서는 추정적 의사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호흡기 제거결정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둘째로 이번 판례가 대법원까지 이어져서 결국 호흡기를 떼게 된다 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판례가 나오게 되면 이와 비슷한 사례가 많을텐데 의사들이 일일이 이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가족들이 추정적 의사표시를 이유로 호흡기 제거를 요구할 경우, 의사는 환자 본인의 의사와 가족들의 의견이 일치하는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환자의 말을 들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가 그런 판단을 해야 하는 의무도 없다. 의사는 건강상태만 판정할 뿐이다.
우리가 대법원에 바로 상고한 것은 판결 뿐만 아니라 이런 절차에 있어서도 명확한 기준을 내려달라는 뜻이었다. 호흡기 제거판결을 내릴 것이라면, 구체적인 절차까지 마련해줘야 한다. 명확한 절차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대법원에서 설사 호흡기 제거판결이 난다 해도 (병원 입장에서는) 무작정 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
-기독의료기관으로서 사명감이 느껴지실텐데.
“판결문은 생명에 대한 문제를 지나치게 의학·과학적, 그리고 사회적 비용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신앙적, 윤리적 관점에서 그렇다. 뇌수술을 받고, 뇌사에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의미있는 생명 아닌가.
하나님께서 세브란스에 주시는 메시지 있을 것
하나님께서 이번 사건을 통해 세브란스에 생명에 대한 가치를 지켜 나가라는 사명을 주신 것 같다. 우리도 대법원에만 이 문제를 맡겨놓고 있지 않고, 기독교계를 비롯한 각계 의견을 듣고 고민해 보려 한다. 특히 원목실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믿음의 시각에서 이러한 문제를 바라보려 한다. 그러나 아직 재판 중이기 때문에 외부적인 입장 표명 같은 것은 자제할 생각이다.”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보나.
“기독교, 특히 개신교회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여러 곳에 연락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논의해 온 교단이나 단체가 거의 없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 관심이 있고 심도있게 공부하신 목사님도 많지 않은 것 같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 맹점 가운데 하나로도 볼 수 있는데, 사회적 문제들을 기독교적으로 이해시킬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는 사이 일반인들은 이미 세속적인 논리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가 버린다. 우리는 뒤따라다니면서 그게 아니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