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신학의 공로자 ②] 한국칼빈주의연구원장 정성구 박사
칼빈탄생5백주년기념사업회(대표회장 이종윤 목사)는 한국교회 개혁신학 발전의 공로자 6명에게 공로패를 수여하고 기념논문집을 헌정키로 했다.
공로자 6인으로는 이종성 박사(한국기독교학술원장), 한철하 박사(전 아세아연합신학대 총장), 신복윤 박사(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정성구 박사(한국칼빈주의연구원장), 이수영 박사(아시아칼빈학회 명예회장), 이종윤 박사(한국장로교신학회장)가 선정됐다.
그 중 40여년간 칼빈을 연구한 칼빈 전문가 정성구 박사(67)가 시애틀을 방문했다. 지난 1일 시애틀한인장로교회(담임 김호환 목사)에서 열린 시애틀 목사회(회장 이승인 목사) 월례회 특강에서 강사로 나선 정 박사는 칼빈 5백주년을 맞는 중요한 시기에 교회 개혁은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놓은 칼빈에게서 찾을 것을 강조했다.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칼빈 평전 ‘교회 개혁자 요한 칼빈’이란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칼빈주의학회 총무, 회계, 회장 등 임원으로 20년을 일했습니다. 회장을 하다 보니 1년에 4차례에 걸쳐 학자들이 세미나를 하는데 학자들이 모여서 칼빈의 칭의론 교회론, 성화론, 성경론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모든 목사님들과 모든 교회 리더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의 핵심 교리와 사상과 신앙의 원리를 바로 알게 되길 바랍니다.
일각에서는 ‘500년 전의 칼빈이 오늘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신학이 발전하는데 무슨 칼빈을 이야기하느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나는 감리교인데, 순복음인데 칼빈과 무슨 상관이 있나?’를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가 목회한 교회에 가서 보니 ‘칼빈주의 감리교회’라고 적혀있습니다. 칼빈은 교파를 넘어서 오늘의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적 사상적 기초를 놓은 인물입니다. 모두 칼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칼빈을 몰라서는 프로테스탄트 목사와 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과 기독교 강요가 나오게 되었던 배경은 무엇인지요.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며 문제가 생겼습니다. 평화로울 때 신앙생활하기가 더 어려운 것처럼 지하교회에 있던 사람들이 지상으로 올라오고 국교가 됨으로 갑자기 육국 소장들이 교회 안에 오고 판사, 변호사들이 오고 고급관리들이 교회 안에 오니까 준비가 되지 않은 목회자들이 헛발질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기보다 청중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목회자는 옛날 그대로인데 갑자기 고급관리들이 돈 많고 실력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장관들이 입고 있는 옷하고 똑같은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영어로 목사를 ‘minister’라고 부르는데 단어를 찾아보면 장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관과 같아지려고 의자에 조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교권이 정권을 이기려고 비상수단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제도뿐 아니라 마리아 숭배 사상은 여신 숭배사상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래서 교권 밑에 성경을 보니까 성경도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마음대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고친 것이 가톨릭의 교권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를 ‘고해성사해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렇게 바꾼 것입니다. 온갖 거짓된 인본주의와 혼합주의가 되었습니다. 이런 세월이 천 년을 흘렀다고 해봅시다. 이것은 사도적 기독교도 아니고 성경적 기독교가 전혀 아닙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는 다 가짜입니다.
우리 말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밤이 깊으면 별빛이 더 찬란하게 빛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복음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희미하게만 드러났습니다. 13-14세기 오면서 성경 필사에 종사하는 수도사들 사이에서 개혁의 움직임이 일었고 체코 프라하대학의 총장이었던 얀 후스가 그 영향을 받아서 프라하 시내 안에 있던 베들레헴 교회서 설교를 했습니다. 메세지의 핵심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였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교황의 말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1415년에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후스를 죽인 그 사람들은 가짜 기독교입니다. 오늘날도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이것이 루터가 오기 전 100년 전 사건, 1517년 마틴 루터가 95개조를 고치고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 종교개혁은 그때 95개조를 붙인 것 뿐 아니라 라틴 말로 인쇄되어 전 유럽에 확장됐습니다. 결국 종교개혁은 돌이킬 수 없이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위대한 설교자였지만 치밀하거나 조직적이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1년 후에 27살 나이의 요한 칼빈을 통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게 하셨습니다.”
-‘기독교 강요’를 집필한 칼빈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27살의 젊은 칼빈은 첫째는 하나님이 쓰셨겠지만 준비를 잘했습니다. 어학의 도사였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에 도사였고 라틴어는 자기 모국어보다 더 잘했습니다. 4가지 언어를 확실하게 했고 두번째는 교구신학에 대해 명석하게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천 년 전의 학문을 잘 알았습니다. 거기다 글과 말을 논리적으로 조리있고 확실하게 할 줄 아는 문필가이기도 했습니다. 칼빈은 그런 배경을 가지고 결국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강요’는 고난 중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칼빈이 파리대학교 총장 연설문에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친구 집에 숨어 있다가 거기 있는 도서관에 푹 빠져 집필한 것이 ‘기독교 강요’입니다. 칼빈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십계명을 정말 성경적으로 잘 조직해서 논리적으로 전개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칼빈은 제네바의 생삐에르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칼빈은 장로교뿐 아니라 기독교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만, 일반적으로 칼빈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점도 많은 것 같습니다.
“강단에서 흔히 ‘칼빈 선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명칭입니다. 칼빈은 어느 신학교 출신이냐고, 어느 노회에서 누가 손을 얹어 목사가 됐냐고 하면서 그것이 없으니까 ‘칼빈 선생’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너무 역사를 몰라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칼빈 시대는 프로테스탄트 신학교가 없었습니다. 목사 임명을 시의회에서 했습니다. 제네바시는 도시국가였기 때문에 4년 전에 파렌에게 목사 임명을 줬고 다음 칼빈에게 목사 임명을 주었습니다. 1570년에 영국에서 출판된 자료가 있는데 라틴말에서 영어로 번역된 내용입니다. ‘제네바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목회자, 목사, 신학박사 요한 칼빈’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칼빈이라고 하든가 칼빈 목사, 칼빈 박사 이렇게 해야 정확합니다.
칼빈은 일생 동안 강해설교의 대가였습니다. 칼빈은 신구약 66권을 주석설교 했습니다. 그 강해설교를 보면 신명기를 가지고 200번의 연속강해를 했습니다. 욥기를 가지고 159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영성이 맑고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취임부터 마지막 임종까지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칼빈은 두 말할 것 없이 명설교가였습니다.
또 칼빈주석을 읽고 심심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 보급이 잘 안되었고 그 당시 목회자에게 실제적으로 유익하게 주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의 설교를 읽어 보면 학문적으로 높지만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칼빈의 설교의 핵심이 구속사적인 강해설교라는 것을 알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은 많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개혁이냐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없습니다. 참된 교회개혁이란 무엇일까요.
“교회개혁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입니다. 대개 목사님들은 예시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본질은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인물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도구이자 배경입니다. 설교에서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교훈만을 받으려 하면 안됩니다.
교훈은 명심보감에도 많고 사서삼경도 있고 좋은 게 많습니다. 자꾸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하지만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교훈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한 인물의 신앙 이야기 보다 하나님의 중보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오게 하기까지 그 사람을 통해 위대한 신앙의 발걸음을 걷게 하고 자녀들을 통해 예수님을 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인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주님의 구속사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구속사의 도구입니다. 또한 우리를 찾아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인들을 속량하기 위해 인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칼빈이 깨달았던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는 안목이 1930년대에 와서 칼빈주의자들에게 되살아났습니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봐야 설교자의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목회자를 깨워 강단을 정화해야 한국교회가 살고 이민교회가 살 줄 믿습니다.
우리의 목장이 크든 작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땅 위에서 다하는 순간까지 바른 복음을 증거할 수 있고 구속사적인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성구 박사는
총신대, 대신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칼빈대 석좌교수로 있다. 총신대 대학원장 및 대신대 총장을 역임했던 정 박사는 한국칼빈학회장, 한국칼빈주의 연구원장을 지내며 40년간을 칼빈 연구에 힘써왔으며, 한국칼빈주의연구원을 설립하고 뿐만 아니라 칼빈과 관련된 1만여종에 달하는 수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칼빈박물관’을 운영하여 깊이 있는 사상 연구에 공헌하고 있다. 칼빈탄생 5백주년기념사업회(대표회장 이종윤 목사)는 한국교회 개혁신학 발전의 공로자 6명에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