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은 잃어버린 우리 삶의 가치이자 원형”

김재홍 기자  jhkim@chtoday.co.kr   |  

이충렬 감독이 말하는 <워낭소리> 이야기

무슨 심오한 철학이 담긴 것이 아니었다. 흔한 결말로 귀결되는 사랑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보기 힘들고 찾기 힘든 사랑 이야기였다. 한 무명의 PD는 바로 그 이야기를 4년 반의 시간을 거쳐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영화 <워낭소리> 제작에 얽힌 이야기다.

▲노인과 소가 나란히 발을 맞추며 함께 땔감을 지고 오는&nbsp;의 명장면. 마치 세상의 짐을 함께 나누어진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노인과 소가 나란히 발을 맞추며 함께 땔감을 지고 오는 의 명장면. 마치 세상의 짐을 함께 나누어진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영화 <워낭소리>가 다루는 사랑은 뭔가 특별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세상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15년을 사는 소가 할아버지의 사랑으로 40년을 넘기고 살아가는 이야기라든지, 그 사랑에 반응하여 묵묵히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일한 소의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워낭소리>를 제작한 이충렬 감독(43)이 11일, 안양 성결대학교를 찾았다. ‘워낭소리와 한국 독립영화’라는 제목으로 교양특강이 열린 이날, 특강 장소에는 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미 3백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영화관을 찾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워낭소리를 보고 감동을 느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사실 주인공이 없다고 한다.

영화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늙은 소가 등장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된 영화에는 이들의 일상이 여과되지 않은 채 드러나 있다. 특별한 주문도, 연기지도도 할 수 없었다. 스크린 상으로 꾸밈없이 솔직한 말들이 흘러나올 때는, 재밌기도 하지만 진지함이 묻어난다.

이날 강연에서 이 감독은 자신의 작품에 무슨 특별한 사연이나 심오한 내용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이 감독은 “너무나 소중하지만 잊혀져가는 것들을 가져와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충렬 감독. 농촌에서 늙은 소와 함께 일하던 노인의 모습에서 이 감독은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충렬 감독. 농촌에서 늙은 소와 함께 일하던 노인의 모습에서 이 감독은 아버지를 발견했다.

이충렬 감독이 이 영화를 촬영한 것은 사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1998년 IMF의 위기를 겪으면서 잊고 살아왔던 아버지에 대한 관심을 발견했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농촌과 그곳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다루고 싶었고, 그때부터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어렵게 찾은 한 농가에는 늙은 소와 다리가 아픈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언뜻 ‘초라한’ 행색의 삶 속에서 이 감독은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아주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인 최 노인은 실제 모습과 영화에서 나타난 모습이 다를 바가 없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 불편한 다리와 거친 숨소리, 고집스러운 말투와 성격……. 평소 할아버지의 삶의 모습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불편한 다리로 손수 소를 먹일 꼴을 벤다. 할머니는 기계도, 농약도 사용하지 않는 할아버지가 늘 못마땅해 잔소리한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대꾸하는 법이 없다. 영화 속의 할아버지에게 모든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 등장하는 할아버지의 ‘일소’ 또한 그러하다. 사람으로 치면 이미 일할 나이를 넘어섰고,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 소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미 소는 달구지를 끌기조차 힘에 부칠 정도지만,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소와 함께 밭에 일을 나간다. 소는 비록 느리지만 묵묵히 일을 마친다. 마치 할아버지도 소도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일할 수 없을 만큼 늙어버렸지만 매일 묵묵히 일을 마치는 할아버지와 소. 말은 않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일할 수 없을 만큼 늙어버렸지만 매일 묵묵히 일을 마치는 할아버지와 소. 말은 않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한국에서 소는 ‘희생’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영화는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우직하고 희생적인 소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그것이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할아버지의 사랑과 배려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소 방울 소리에는 민감하다. 그리고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늘 외양간을 돌보며 꼴을 채워넣는다. 소 또한 할아버지의 사랑에 응답하는 듯, 늘 할아버지 곁에서 함께 걷고 일한다. 그리고 그것은 소가 쓰러지기 전까지 계속된다.

이 감독은 영화에서 소의 ‘희생’은 잃어버린 우리 삶의 가치이자 원형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또한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아버지, 나아가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비록 세상의 화려함과 웅장함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그렇게 숭고한 희생의 터 위에서 우리가 자랐고 지금 존재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숭고한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여 다른 이를 살리는 사랑이다. 마치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에서 보여주듯, 결코 서로의 허물을 들춰내지 않는다. 이 시대에 아픔을 감싸주는 온유한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한 듯하다. 아름다운 영화에는 보통 멋지고 예쁜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남들보다 뭔가 ‘부족한’ 이들이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존재하게 하는 수많은 희생과 섬김이 있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눈물과 기도가 크나큰 위기에서 나를 건져냈을지도 모른다. 영화 <워낭소리>는 마치 말 못하는 자들의 입을 통해서, 세상의 어떤 사랑보다 크고 깊은 것이 크리스천 안에 있고,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지를 묻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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