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 통해 얻은 묵상 담은 책 출간돼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자주색 망토를 넉넉하게 걸친 남자가 남루한 차림으로 무릎을 꿇은 소년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친밀감, 붉은 망토의 온화한 톤, 소년의 겉옷에서 반사되는 황금빛, 소년의 어깨를 감싸쥔 노인의 두 손… 17세기를 풍미한 화가 렘브란트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신앙의 물감으로 고스란히 화폭에 옮겼다.
책 <탕자의 귀환(포이에마)>은 헨리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고 그림을 통해 받은 은혜와 묵상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렘브란트의 한폭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몇날 몇일을 꼬박 그 그림에 푹 빠져있었다고 고백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한 이 그림을 통해, 헨리 나우웬은 그가 받은 은혜와 묵상의 세계들을 이 책에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먼저 작은 아들의 방탕한 삶과 귀환을, 다음엔 큰 아들의 깊은 상실감과 분노, 그 다음엔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깊이 파고들고 있다. 그가 그 그림을 통해 결론적으로 깨닫게 된 세계는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탕자’라는 것, 그러면서 또 ‘큰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결국은 ‘아버지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은총을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자고 촉구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길을 잃은 탕자라면, 그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인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자는 것이다.
성직자이자 대학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1983년에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당시 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키지 위해 크리스천 공동체들이 무엇이든 힘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그는 프랑스 트로즐리에 있는,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라르쉬(L'Arche) 공동체에서 몇 달 머물고 있던 중, 공동체 안에 있던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방문에 붙여놓은 커다란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그 그림에 매료되고 만다.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뜨거운 친밀감, 붉은 망토의 온화한 톤, 소년의 겉옷에서 반사되는 황금빛, 그리고 양쪽을 한꺼번에 휘감고 있는 신비로운 광채에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원작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탕자의 귀향>을 묵상했고,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봤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실물보다 크게 그린 거대한 <탕자의 귀향>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던 나우웬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음미했다. 그리고는 그는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해 책에 옮겼다.
그는 자식이 자기 유산을 챙겨 집을 나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짚어내고, 작은아들의 낡은 샌들과 새 신발, 반지가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을 감싸고 있는 빛 그리고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의 공간이 갖는 의미, 아버지와 큰아들의 닮은 외적 요소들이 암시하는 바 등을 세밀하게 하나씩 탐색해 이 책에 옮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주변인들에 대한 관찰력, 각 인물들의 내면 심리 묘사,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다는 것 등을 감지해내는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가 이 그림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깊이있게 감상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림에 빨려들어갈 듯한 깊은 감상을 통해 열린 더욱 깊은 묵상은 놀라움을 줌과 동시에 감동과 큰 은혜를 선사한다.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깨닫기가 무섭게 새로운 의미의 세계가 열렸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대단한 가장’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면서 동시에 어머니였습니다. 남성의 손과 여성의 손으로 아들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 한 손으로 아들의 연약한 부분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삶을 헤쳐나가려는 아들에게 힘과 소망을 북돋아주고 있다고 보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책은 그림에 등장하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구성됐는데, 이는 헨리 나우웬이 경험한 영적 여정의 단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둘째아들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착실하게 집을 지키고 있었던 첫째아들로, 그래서 질투와 분노, 완고한 태도, 무엇보다 교묘한 독선에 사로잡혔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집을 떠나 방황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노하고 시기하는 모습 자체가 여전히 무언가에 속박된 종의 신세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바르고 착하게 사는 이들 가운데 분노가 넘친다’고 말하며, 자신에게도 ‘큰아들’의 모습이 없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되돌아보게 만든다.
“큰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불만의 뿌리가 상당히 깊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제몫으로 돌아와야 할 대가를 전혀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푸념입니다. 그것은 적개심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가 온갖 은밀하고 노골적인 방식을 통해 분출되는 불평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모습을 탕자에서 큰아들의 모습으로 빗대는 순서를 거쳐, 끝내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징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대부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부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헨리 나우웬은 이보다 ‘더 큰 부르심’을 듣게 한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치유하고, 잔칫상을 내미는 두 손이 바로 우리의 손이어야 한다는 소명이다.
나우웬은 ‘돌아온 자식들을 환영하며 잔치를 여는 아버지‘는 죄에 대하여 깊이 슬퍼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을 때, 너그러운 마음을 품게 될 때 가능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그러면서 그는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할 때 우리의 영적 여정은 종착점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며, 진정한 안식처 또한 찾지 못한 것”이라고 못 박는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오래도록 묵상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간단하고도 분명합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