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김규식·이승만, 지도자 3인의 ‘기독교 국가론’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이만열 박사의 시민강좌 ‘해방 후 기독교 역사’

▲이만열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이만열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이만열 박사(전 국사편찬위원장)가 진행하는 서울YMCA 시민강좌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 역사’가 8주간의 과정을 시작했다.

이만열 박사는 서울 종로2가에 위치한 서울YMCA에서 2일 오후 7시 첫 강의 ‘해방과 기독교회의 새로운 출발(해방과 교회재건, 분단과 기독교)’을 진행했다. 이번 시민강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오늘의 기독교 존재 양식과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날 강의를 시작으로 ‘6·25 전쟁과 교회(전쟁과 교회, 전후 종교상황)’, ‘교단 분열과 새 교단의 탄생(장·감·성·침의 분열과 새 교단 등장)’, ‘교회의 성장과 발전(교회성장 현상과 해외선교)’, ‘다양한 교회활동(성경·찬송가 발행, 신학교육, 연합운동)’, ‘변화하는 북한교회(사회주의적 교회의 생성 및 정착)’, ‘새로운 신학의 모색(한국적 신학, 보수신학 전개)’, ‘넓어지는 선교의 지평(노동자·빈민 선교, 인권·민주화운동, 통일·시민운동)’ 등이 다음달 20일까지 매주 화요일 이어진다.

하나의 한국교회, 해방 직후부터 ‘난관’

이만열 박사는 “한국교회는 해방을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 즉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였다”며 “이러한 기쁨을 안고 무너진 교회 조직을 재건하고 훼손된 신앙을 회복하며, 교회 내 일제 잔재를 청산하면서 나아가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했다”고 분석했다.

당시 일제의 종교통합 정책에 의해 각 교단이 통폐합된 가운데 교회 조직으로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유일했다. 이곳 지도자들은 기존 조직을 살리고자 했는데, 이는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조직’이 한국교회의 미래에 도움이 되고 국가 재건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도 효과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임원들은 교단 명칭을 조선기독교단으로 바꾸고 1945년 9월 8일 북한 지역을 제외한 교단 대회인 남부대회를 소집했지만, 감리교 지도자들이 퇴장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결국 1946년 4월 30일 두번째로 열린 남부대회는 “각 교파는 각자 성격대로 활동키로” 결의하는 등 해체를 위한 모임이 됐고, 장로교·감리교·성결교 등은 재건의 길로 들어섰다.

선교사들의 추방과 독립활동, 재입국

선교사들은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적성국 국민으로 지정돼 모두 본국으로 송환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지속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전후(戰後) 선교 재개를 준비한 것이다.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의 경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미국에 전달하고 해외선교부에서 한국 담당 임시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향후 선교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애비슨(Oliver R. Avison)은 한국 독립 지원을 위해 기독교인 친한회(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고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지원하도록 미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헐버트(Homer B. Hulbert)는 한미협회(Korean-American Council) 전국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고 한국 독립을 선전했다.

선교사들은 미국으로 송환됐지만, 당시 미군정청 협조 없이 선교사가 입국해 활동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정보가 크게 부족했던 미군정청이 美 국무성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각 교단 선교부는 신속하게 한국 선교를 재개할 수 있었다. 북장로교의 경우 선교사 7명을 1진으로 한국에 보냈으며, 남장로교는 1947년 봄까지 17명이 돌아왔다. 감리교는 1948년까지 총 45명의 선교사들이 입국했고, 강제 철수 이전 감리교 선교부가 소유했던 재산을 다시 확보했다. 이와 함께 선교사와 그 후손들이 군정청의 관리나 고문이 되면서 군정과 기독교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됐다.

미 군정과 교회의 우호적 관계

이만열 박사는 “당시 교회는 통역과 선교사, 아시아를 기독교화하려 했던 맥아더의 영향력 등으로 미 군정과 우호적인 관계였다”며 “이 때문에 일본 종교단체들이 남기고 간 많은 재산들을 교회나 기독교 학교 등이 불하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이를 ‘통역 정치’, ‘선교사 정치’, ‘기독교화 정치’라 불렀다. 당시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교회에 한 번도 출석한 적이 없었음에도, 일본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 일본을 근거지로 삼아 아시아 전체에 ‘십자가’를 퍼뜨려 공산주의와 맞서고자 했다.

영락교회(당시 베다니교회), 경동교회(성야고보전도교회), 장로교신학교 등이 당시 모두 그런 식으로 설립되면서 성도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면서, 기독교의 승리”라고 기뻐했다. 이 박사는 “대종교 등 다른 종교에도 적산 가옥이 불하됐지만, 특히 일본 신사와 조합교회 재산은 거의 대부분 기독교에 불하됐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미 군정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천주교도 마찬가지였다”며 “유럽의 천주교 지배층은 전통적으로 기득권층과 결탁돼 있었기 때문에 반공주의를 견지했고 그런 입장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 가톨릭교회에도 그대로 전수됐으며, 천주교의 반공적 입장은 자연스럽게 미 군정과 우호적 관계를 맺게 했다”고 했다. 천주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 공산당으로부터 압수한 조선정판사를 불하받아 ‘경향신문’을 복간했다.

김구·김규식·이승만 등 ‘3영수’와 기독교적 국가 재건 구상

해방이 되면서 남한 사회에서는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주장이 교회나 기독교인 정치가들로부터 공공연히 제기됐다. 이같은 구상은 1945년 11월 조선기독교남부대회 주최로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 환영대회였다. 이 자리에는 해방 정국의 ‘3대 영수’, 즉 김구와 김규식, 이승만이 모두 참석했다.

김구는 “경찰서 열 곳을 세우기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자”며 “강한 나라는 ‘성서 위에’ 세워야 한다”고 호소했고, 김규식은 “침략받지 않는 강국을 세우려면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세워야 한다”고, 이승만도 “새로운 국가 건설을 할 때 ‘만세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했다.

이중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국가 공식 행사에서 기독교 의식을 행한 최초의 정치인이었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초대 국회 개원식에서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직무를 다할 것’을 선서했다. 이후 국가 의식이 기독교식으로 진행됐고 기독교적 국가 제도가 등장했으며, 정부 각 부서에 기독교인들이 중용됐다.

“해방 후 기독교 위상 한층 제고됐다”

당시 초대 국회의원 208명 중 21%인 44명이 개신교인이었는데, 개신교의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은 5%에도 미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또 행정부 19개 부처 장·차관 242명 중 38%가 개신교인이었고, 제2공화국에서도 이 비율은 33%를 차지했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 “1백만명 기독교인들의 영향이 정부와 국회, 나라 전체 등 도처에서 감지된다”고 표현했다. 이 박사는 “그러나 이승만 정권 내 높은 기독교인 비율은 정권의 부정·부패에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적지 않음을 말해준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적 가치에 토대를 둔 국가 재건을 주장한 데는 △기독교 국가로 알려진 미국을 통해 해방이 이뤄졌다고 생각함 △기독교가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반이라 인식함 △‘3영수’를 비롯해 해방 후 입국한 정치 지도자들이 기독교적 배경을 가짐 △서구 여러 나라가 보여준 사례 등의 요인이 있다고 이 박사는 분석했다.

이만열 박사는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던 미 군정, 교회와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 해방 정국의 열띤 국가 재건 분위기 등은 기독교인들이 현실 정치 및 건국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환경을 조성했다”며 “여기에 해방 이후 한층 제고된 기독교의 위상과 풍부한 교회의 인적 자원은 기독교인들이 해방 공간에서 많은 정치적 역할을 감당하게 해 준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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