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신드롬’ 등 미화된 귀신문화 우려
무덥고 지치는 여름만 되면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선 오싹오싹한 공포물이나 스릴러, 납량특집극들이 방송되곤 한다. 그 내용은 주로 가슴에 한을 품은 원혼들이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일삼는 괴물이나 좀비가 등장하는 슬래셔무비류였다.
하지만 요즘엔 판타지붐을 타고 도덕심 강한 꽃미남 뱀파이어나 모성애 지극한 구미호 등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연출돼 공포스럽고 혐오감을 일으키기보다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매력적이고 완벽한 모습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뱀파이어를 그린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면서 최근 개봉한 3편 ‘이클립스’는 국내에서도 170만 관객 이상을 동원했다. ‘뱀파이어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까지 낳은 이 영화에서 뱀파이어는 보통 상상하는 무섭고도 끔찍한,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가 아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뱀파이어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 역)는 최고급 세단을 몰고다니는 의사집안 아들로 등장하는 데다 오직 여주인공만을 사랑하는 보기드문 ‘일편단심 순정파’다. 인스탄트식의 사랑놀음을 즐기는 요즘 젊은이들과는 다르게 강한 도덕성까지 갖추고 있다.
또 얼마 전 방송을 시작한 납량특집극 ‘구미호-여우누이뎐’에서 구미호(한은정 역)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사람 간을 빼먹는 공포스런 존재이기보다는 딸을 향한 모성이 지극한 어머니로서의 캐릭터가 훨씬 부각된다. 오히려 이 드라마에서 구미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인 윤두수의 부인과 딸은 마치 ‘인간 구미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기적이고 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연히 만난 구미호와 사랑에 빠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도 오는 8월 방송예정이다. 이 드라마에서 구미호(신민아 역)는 여자의 모습을 한 요괴지만 호기심이 왕성하며 해맑고 방실방실 웃어대는 캐릭터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 여성처럼 친근하다.
이렇듯 인간적이고 완벽한 캐릭터로 그려져 이를 동경한 나머지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뱀파이어처럼 뾰족한 송곳니를 갖기 위해 특별시술을 받는 청소년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C.S.루이스는 그의 저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는 추하고, 더럽고, 무섭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고 매혹적이고 그럴싸하게 최대한 진리에 가까워 보이도록 위장하면서 다가온다”고 했다. 무섭고, 추한 모습의 요괴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희화화(戱畫化)되거나 미화된 귀신 문화일 것이다.
왜 ‘희화·미화된 귀신 문화’에 열광하는가
하지만 이러한 문화에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를 짚어보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있다. 허은희 교수(동의대 영화학과)는 한 언론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한 시대의 문화콘텐츠는 그 사회구성원의 잠재된 의식과 욕망을 반영한다. 뱀파이어 콘텐츠의 성공은 대중이 뱀파이어에 감정을 이입시키고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허 교수는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과 거기에서 비롯된 근원적 외로움이 뱀파이어 신드롬과 무관하지 않다”고 해석했다.
‘트와일라잇’ 같은 경우 여주인공은 뱀파이어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존재다. 평단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흥행한 데는 소녀팬들의 변함없는 지지가 있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하지만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 앞에서는 마음을 열고 감동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다. 결국 무조건적인 용납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소통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꽃미남 뱀파이어’라는 신종 요괴를 출현시킨 셈이다.
속으로는 시기와 질투, 탐욕에 눈이 멀었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 속에서 안식을 얻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판타지를 뱀파이어에 투영한다. 하지만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이다. 그토록 바라던 그 지고지순한 사랑을 퍼부어줄 뱀파이어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차마 인간이 저질렀다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범죄소식에 “사람이 요괴보다 더 무섭다”는 옛날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르는, 점점 더 강팍해져가는 인심을 느끼는 요즘이다. 십자가를 지는 죽음도 불사할만큼, 그 누구보다 인류를 용납하시고 사랑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께서 분명히 계시는데, 뜬금없는 뱀파이어가 웬말인지…….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