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4-7>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배제냐 포함이냐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오니‘배제의 논리’에 익숙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자 하시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보시는 곳과 저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줍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굳이 목자를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능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까지도 사랑하는 목자
양 백 마리 중 하나를 잃는 사고가 났습니다. 그런데 목자는 양을 찾은 다음 돌아와 잔치를 벌입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양떼에서 혼자 벗어났던 양은 정상이 아니었을 텐데, 목자의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습니다. 그럼 99마리의 양은 질투하면서 불만을 토로했을까요? 아니죠. ‘나도 그런 위험에 처한다면 목자가 역시 저렇게 돌보아 주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두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작은 것은 작은 것이 아니다
하나를 백중의 하나로 보아서는 안 되고 전체를 이루는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가 모자라면 온전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마지막 하나 빠진 것이 전체를 망칩니다. 잃은 양 한 마리는 디테일의 힘에서 보면 100-1=99가 되는 것이 아니고 100-1=0이 됩니다. 토요타 자동차 리콜 사태에서 보세요. 선진기술은 디테일에서 결판납니다. 고부가도 디테일에서 납니다. 작은 것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을 이룹니다.
한기채 목사(기독교대한성결교회 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