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16:22-26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죽음 그리고 사후 세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죽음은 동일하게 찾아왔습니다. 나사로가 먼저 죽은 것 같습니다. 동시에 죽지는 않았겠지만 본문에는 얼마 더 살고의 차이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어 있습니다. 결국 부자의 일생이라는 것도 입고, 먹고, 자고, 죽고 밖에 더 있습니까? 영원에서 보면 이 세상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생전은 짧고 사후는 깁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고 간단히 기록된 반면 부자는 죽어 장사되었다고 기록되어 형제들, 자녀들, 조문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호화로운 장례식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후의 세계는 이 세상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장례를 치루지 못했겠지만 천사들이 받들어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 고통 중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음부가 존재한다!>
비유는 죽은 다음의 세계가 분명히 있음을 보여줍니다. 현생과 이생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줍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음부에서는 낙원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음부에는 불꽃 가운데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물 한 방울을 구해도 얻지 못하는 장소입니다.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상실된 공간이 음부입니다. 음부에서는 기도도 긍휼도 회개도 전도도 소통도 불가능합니다. 불꽃과 갈증과 고통과 고민과 단절과 거절과 괴로움만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서로 얽힌 현세와 내세>
그리고 내세는 현세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25절) 우리는 ‘살아서는 부자 죽어서는 나사로’가 되고 싶겠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부자는 소유가 없어지므로 갈망하는 상태로, 나사로는 갈망하던 상태에서 위로를 받는 것으로 나옵니다.
<한 번 들어가면>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보았지만 관계는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단절이 된 상태입니다. 둘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분리된 상태입니다.
한기채 목사(기독교대한성결교회 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