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7장 70-72절, 10장 32-39절
2010' 경향의 강단 "네 장막터를 넓혀라 (48)"
(2010년 11월 14일 / 주일 대예배)
초신자나 신앙이 약한 교인들에게 교회생활에 대하여 무슨 의문이나 불만이 있느냐고 설문조사를 해 본다면 아마도 '헌금' 문제가 단연 1위가 될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것은 실제로 교역자들이 장결자들을 심방할 때 가장 자주 듣는 불만이기도 하며, 교회의 인터넷 신앙상담란에 빈번히 올라오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신앙생활들, 즉 예배나 봉사나 성도교제 등에 대해서는 문제 삼을 만한 것이 거의 없지만, 이상하게도 헌금만큼은 뭔가 '거북하고 껄끄럽게' 여겨지는 교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항상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헌금 자체가 잘못된 행위일리는 만무합니다.
헌금생활은 '신자의 기본의무'라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성경 곳곳에서 명백히 명령하고 계시니 여기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교회가 헌금에 대한 제도를 잘못 세워 놓고 있든지 아니면 교인이 헌금생활에 대하여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든지 그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교회가 헌금제도를 철저히 '성경중심'으로 정하고 실시하기만 한다면 교인은 그것에 대하여 함부로 비판할 수 없으며 오직 순종해야 할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는 헌금에 대하여 자신의 본능적인 기분이나 세속적인 상식을 앞세우기 전에 성경의 가르침 앞에 마음을 활짝 열고 경청할 줄 알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헌금에 대한 오해와 불만이 섞인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질문, 즉 '왜 헌금을 공개적으로 시행하며 왜 헌금의 종류가 여러 가지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과연 성경이 어떻게 대답하며 무어라고 명령하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헌금을 '공개적'으로 하는 이유는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선한 일을 장려'하기 위함입니다.
7장 70절부터 72절에 "70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방백은 금 일천 다릭과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 71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다릭과 은 이천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72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다릭과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칠 벌을 드렸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 해방 이후 제2차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총독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던 도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공사에는 물론 막대한 돈이 필요했는데 느헤미야는 이를 위하여 모든 유다 백성들이 특별헌금을 바치도록 한 후에 그 결과를 여기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헌금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를 기록에 남길 때 자기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헌금을 모두 다 합쳐서 단 하나의 통계 숫자로 요약하여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그 헌금의 내용을 세 부류로 자세하게 나누면서, 우선 70절 상반절에서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라고 했는데 이 말은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이 (이하에 기록된 대로) 성벽 재건을 위한 특별헌금을 드렸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일 먼저 "방백은 금 일천 다릭과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방백"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원문에 보면 '총독'이란 뜻의 단수명사로서 바로 느헤미야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명실 공히 예루살렘 재건 사업에 첫째 지도자였으며 또한 최고의 부자이기도 했던 느헤미야가 그 특별헌금에 있어서도 제일 앞장서면서 모범을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 다음 이어지는 71절에서 "어떤 족장들" 즉 바로 백성들 중에 나머지 지도자급 인사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헌금한 액수의 소계를 기록했으며, 끝으로 72절에서 그 외 모든 백성들의 헌금을 또한 집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날 공개헌금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느헤미야의 이런 기록은 정말 유치한 '제 자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헌금은 모든 유다 백성들이 다 함께 했는데 유독 자신의 개인헌금 액수만 제일 앞에 돋보이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만일 그처럼 자기 자랑의 소치였다면, 성령께서 느헤미야를 감동시켜 이 성경을 쓰게 하셨을 때 그런 내용이 기록되게 하셨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느헤미야 5장에서도 나타나는 대로, 느헤미야 총독이 어떤 선한 일을 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그 자신이 먼저 본을 보여 준 후에 다른 족장들과 백성들에게도 권유했듯이, 여기서도 그 특별헌금을 드림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제일 먼저 솔선수범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건축헌금 등의 특별헌금을 드릴 때에 제일 먼저 당회원들이 작정을 하고 그 후에 제직회원과 평신도의 순서로 각각 실시하는데, 이것은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위한 특별헌금의 방법과 똑같은 것입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는 말씀은 결코 헌금을 두고 한 말씀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구제할 때에 남 앞에서 자랑 삼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헌금의 비공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인데, 그들은 그 "오른손"이라는 단어 앞에 분명히 먼저 나와 있는 "너는 구제할 때에"라는 말은 쏙 빼놓고서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오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헌금생활은 원칙적으로 볼 때 비공개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공개적입니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헌금을 쉬쉬하면서 은밀히 시행한 곳은 한 군데도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만나 십일조를 드릴 때 그의 곁에는 소돔 왕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는 옆에 보는 눈들이 많다고 그것을 나중에 은밀히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모든 사람들이 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의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딱 떼어서 멜기세덱에게 바쳤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 자랑'하려고 그랬겠습니까?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이 짓게 될 예루살렘의 첫 성전을 위하여 자신의 남은 평생을 건축헌금 적립하는 데에 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가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다"(대상 22:14)라고 바로 다윗 자신의 입을 통하여 그 헌금 액수를 그대로 기록에 남겼습니다.
성경이 다윗이란 사람을 더 영광스럽게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기록했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느헤미야와 마찬가지로 이런 모든 예들은 다 그 동시대 사람과 또 오늘날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헌금생활의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헌금을 드린 성도들의 이름과 내역을 밝히는 것이라든지, 건축헌금을 드릴 때 각 개인별로 작정 헌금한 액수를 밝히는 것 등을 두고 펄쩍 뛰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왜 헌금이 비공개가 되어야 하는지, 왜 사람 앞에 숨겨야 할 비밀이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한번 물어 보고 싶습니다.
자신의 헌금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까?
예배 시간에 많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께 특송으로 찬양을 드리거나 대표기도를 올리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것만은 부끄러운 일이 된다는 말입니까?
자신의 헌금이 공개되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 헌금하는 사람 쪽에 무언가 정성이 부족하거나 온전치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공개헌금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의 헌금이 발표되는 것이 마치 제 잘난 체하는 것 같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헌금을 드린 본인은 조금도 자랑하는 마음이 없고 헌금 명단을 읽는 목사도 조금도 사람을 높일 마음이 없는데, 그저 보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그렇게 보는 사람의 문제'일 뿐인 것입니다.
헌금이란 그 자체가 너무나도 좋은 일이요 옳은 일이요 귀한 일입니다.
그런 헌금을 도대체 왜 무슨 낯부끄러운 짓하는 사람들처럼 등 뒤에서 몰래몰래 해야 옳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세상에서도 착한 일을 한 학생이 생기면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모범학생 표창도 하고, 숨어서 남을 도운 사람 있으면 기자에게 알려서 신문 기사에도 나게 합니다.
그렇게 좋은 일들을 공개적으로 알림으로써, 보고 듣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이런 훌륭한 사람들이 있구나.'하고 마음도 흐뭇해지고 또 그런 본을 받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지 않습니까?
좋은 일을 쉬쉬하면서 숨겨서 해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깝고 사리에도 어긋나는 일인 것입니다.
헌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주님의 눈앞에서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헌금하는 것 - 목사가 볼 때에도 눈물겹도록 감동스러운 일이고 교인들이 알게 될 때 서로 흐뭇하고 큰 격려가 되는 일이며 결국 모두가 다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얼마를 감추고' 가져오는 자에게 있어서 공개적인 헌금이란 부끄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처럼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붓는 헌금은 그 주님께서 칭찬하신 그대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행한 일도 (공개적으로) 말하여 저를 기념하게 되는', 많은 성도들에게 선한 일을 장려하는 아름다운 모범이 되는 것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헌금을 '여러 종목'으로 드리는 것은 많이 내도록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자의 기본 의무'를 다하기 위함입니다.
느헤미야 8장 이하 10장까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 재건을 마친 후에 영적 대각성 부흥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집회의 마지막 날에 가서 모든 백성들이 같은 내용으로 공동 서원을 작정하고 대표자들이 도장까지 찍게 되는데, 그 작정서의 내용 중 하나가 각종 헌금생활에 대한 서원이었습니다.
10장 32절 이하에 보면 실로 온갖 종목의 헌금들이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먼저 32절과 33절에 기록하기를 "32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33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매년 일정한 성전세를 드리기로 작정했는데 이것은 성전의 특별 행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항상" 필요한 지출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용어를 빌리자면 곧 교회의 '경상비'에 해당되는 것니다.
특별한 사업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유지되기 위하여 항상 필요한 교역자 사례, 직원 월급, 주일학교 교육비, 건물 관리비, 차량 연료비 따위인데, 유다 백성들도 그와 같은 성전 경상비 집행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하여 그런 성전세를 작정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34절에는 "34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기한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드려서 율법에 기록한 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에 사르게 하였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율법에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라는 규정은 있어도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나무를 성전에 바치라는 규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전에 늘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위하여서도 또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즉 순번을 정해 두고 바쳤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식사 친교나 강단꽃 준비 등을 위하여 순번을 정해 두고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5절 이하 37절 상반절에 보면 "35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36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생축의 처음 난 것과 우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37a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표현이 "맏물" 혹은 "처음 난 것"입니다.
이것은 곧 각종 수확물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제물로 바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주일의 감사헌금도 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헌금생활의 가장 기본인 십일조 또한 빼놓았을 리가 없습니다.
37절 하반절에서 39절 상반절까지에 "37b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38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39a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에서는 교회의 헌금을 계수할 때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있어야 하는 원칙과, 또한 십일조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생계를 위하여 꼭 필요한 헌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종류의 헌금들은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지만 십일조만큼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할 유일의 헌금입니다.
지금 막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국에 돌아와서 동전 한 닢이 아쉬운 유다 백성들도 준행했던 십일조 생활인데, 오늘날 이 평화시대의 현대사회에서 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물질생활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이 뭐가 힘들다고 못할 것이겠습니까?
바로 얼마 전에 성벽 재건을 위한 특별헌금을 힘을 다해 바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그 일 끝난 후에도 역시 성전 중심으로 이런 갖가지 헌금생활에 충성하기로 온 백성이 함께 서약을 했습니다.
'그냥 한 가지 제목으로 헌금하면 될 텐데 왜 그리 십일조며 감사헌금이며 또 무슨 서원헌금이며 작정헌금이며 특별헌금 따위를 일일이 봉투를 나누어서 할 필요가 있었나?'라고 생각되십니까?
하지만 그것은 느헤미야가 백성들로부터 헌금을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머리를 짜내어서 만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종류의 헌금들은 어디까지나 백성들 편에서 "스스로 규례를 정하여" 작정한 '자원헌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다 백성들은 다 한마음으로 크게 부끄럽게 여기며 통분히 뉘우치는 사실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39절 하반절에 기록된 말씀 "39b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저버리지 아니하리라' 혹은 '무시하지 아니하리라'는 뜻의 말입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 이전 그들의 조상 시절에 성전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했었는지를 뼈아프게 뉘우치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그들은 성전을 무슨 액막이 장소나 혹은 마음을 진정시키는 장소로만 여기고 그들이 '섬겨야 할 대상'임을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다시는 버리지 않겠다.'는 이 말은, 이제 그들이 성전을 '섬겨야 할 헌신봉사의 대상'으로 재삼 자각하면서 다시는 이전처럼 성전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거나 회피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각오였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참으로 적지 않은 교인들이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살림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것은 실로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재정을 두고 하나님의 백성 된 교인들이 책임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불신자들이 대신 나서서 걱정해 주겠습니까?
열 명의 교인들이 '십일조'를 드리면 교역자 한 사람의 생계는 간단히 해결될 것이고 그 교인들 자신과 자녀들은 그 교역자를 통하여 항상 영의 양식을 받아먹고 살 수 있게 됩니다.
개척교회의 설립 요건을 '세례교인 15명 이상'이라고 정해 두고 있는 이유도 그 15명이 십일조만 바쳐도 가장 기본적인 교회 재정 운영은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헌금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예의상 서로 주고받는 것만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들에 대하여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은 정말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내 집 사고 가꾸는 정성의 반의 반만 있어도, 우리가 성전건축이나 교육관구입을 위하여 '생애 최고와 전부의 특별헌금'을 드리는 것이 조금이라도 부담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이웃사회 전도와 세계 선교라는 이 선한 일들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유언처럼 남기신 유일한 명령인 줄을 안다면, 이런 선한 일을 위하여 '월정헌금' 작정하는 것을 두고 어떻게 '목사가 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하여 만들어 낸 헌금'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헌금에 여러 종목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신자로서의 각종 기본적 의무를 늘 잊지 않고 빠짐없이 지키게 하려고 명하신 것임을 깨닫고 정성과 힘을 다하여 준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헌금의 제도를 바로 정해 놓고 실시하는 것은 결코 교인들에게 강압적인 헌금을 시키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도들로 하여금 자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바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며, 그렇게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조금도 꺼리거나 염려하지 않고 바칠 수 있도록 '성전의 골방을 정결케' 준비해 놓는 일인 것입니다.
'공개적인 헌금'은 성도들로 하여금 서로 본을 보이고 격려함으로써 '이 선한 일'에 다 같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장려해 줍니다.
'여러 종류의 헌금'이 있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자신이 이행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일깨워 주고 그것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나 교육, 그 외 각종 봉사 활동들과 꼭 마찬가지로 헌금에 있어서도 성경에 입각한 제도를 정확히 세워 두어야만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각자의 헌금생활을 신실하게 준행하게 되고 또한 약속하신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교회에서의 헌금이란 그 속한 교인들에게 '은혜와 축복의 방편'이 아니라 끝까지 '거북하고 부담되는 예배순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처럼 헌금 문제에 시험을 당한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삼 년이나 따라다녔고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보고 배우면서 살았는데 왜 그 혼자 끝내 사도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여 넘겨 준 자가 되었습니까?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일만 악의 뿌리'인 '돈을 사랑함'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밑에서 '돈궤를 맡은' 회계부장 노릇을 하고 있던 평소부터 도적질을 했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을 두고 순전히 돈을 허비한 것이라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까지도 겨우 은 삼십이라는 정말 '싼 값'에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자신은 예수님보다도 돈이 더 좋고, 남이 예수님을 위해 헌금하는 것도 보기 싫었던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마귀"(요 6:70)였으며 "멸망의 자식"(요 17:12)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룟 유다라는 인생에게 꼭 맞아 떨어진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물질문제에 대하여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헌금생활에 있어서 즐거움을 갖지 못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가룟 유다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이 선한 일, 이 좋은 일, 이 즐거운 일, 이 은혜롭고도 복스러운 일이 유독 나 자신에게만은 끝까지 무언가 거북하고 부자연스러운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을 두고 교회의 헌금 제도를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과연 '하나님과 재물 중 어느 쪽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지' 이것부터 솔직히 진단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바칠 수 있는 것 자체가 신자의 특권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예물을 기쁘시게 받아 주실 제단이 바로 세워져 있는 참된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 역시 진정한 축복인 것입니다.
바른 헌금생활을 통하여 이 선한 일을 서로 장려하며 이 소중한 의무를 하나님 앞에서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드리면서 받는 은혜'와 '드림으로써 받게 될 축복'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